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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고를 볼 때마다 다짐을 하지만 늘 미수에 그치고 뜻을 이룬 적이 없다. 시도를 안 하는 건 아니다. 정리해야 할 대상을 골라내다가 중단을 되풀이했기 때문이다. 오랜 귀중품(?)이 한 순간에 쓰레기로 분류되는 순간마다 내 마음이 아파와서다.

창고정리가 매번 좌절되자 이번에는 나라는 인간에 대한 좌절이 밀려왔다. 요즘 자주 쓰이는 말로 '불가역적' 창고정리는 내 인생에서 꿈으로만 존재하고 실현될 수 없는가. 정리를 할수록 짐이 왜 늘기만 하는가. 나는 왜 이리도 욕심이 많아서 고물상에서도 마다할 온갖 잡동사니들을 주워 모으는가. 이런 잡동사니들을 부둥켜안고 사니 내 인생이 잡동사니를 닮는 건 아닐까 등등.

우리 집에 원래 창고는 하나였다. 그런데 그게 공식적으로 그렇다는 것이고 비공식적인 창고는 날로 늘기만 했다. 어디든 잠시만 방심하면 창고처럼 변해갔다. 방과 부엌의 구석진 곳이나 선반, 책꽂이의 빈자리나 책이 꽂힌 앞 쪽, 창문 아래쪽, 마루 밑 등. 아무리 시골살이는 버릴 게 없고 다 쓸모가 있다고 하지만 심했다.

그런데 그날이 왔다. 피할 수 없는 날이 다가왔다. 30여 명이 우리 집으로 농장 탐방을 오기로 한 것이다. 이 내방객들은 탐방 일을 열흘쯤 앞두고 약속이 정해진 것이라 자신감을 갖고 차근차근 창고정리를 시작했다. 정리를 시작하자 '이것만은 결코 버릴 수 없다!'고 여겨 모아 둔 것들이 부지기수로 발견되었다.

로켓스토브 만들 때 필수인 크고 작은 굵기의 '스파이럴 관'을 필두로 가스레인지 종류별 받침판, 단열재인 재활 '펄라이트', 고물상에서 사 온 구리 합금 엘보, 주름관인 연돌용 자바라, 투명 아크릴판 조각 등 적정기술 손수 제작 자재들이다.

녹이 시뻘겋게 슨 실외용 2구 연탄화덕도 나왔다. 산나물을 삶고 쑥차나 고욤잎차를 가마솥에 덖을 때 딱 한 번 쓰고 처박아 둔 것이다. 누군가가 버리겠다고 하길래 차를 몰고 가서 싣고 온 60년대의 동아일보 신문스크랩 상자가 테이프도 떼지 않은 상태로 두 상자가 나왔는데 허연 곰팡이가 군데군데 슬어 있었다.

술 끊은지 7개월이 되었고 공병 반납을 다 했다고 여겼는데 빈 맥주병이 한 상자나 나왔다. 양주병이나 전통주 병들은 생김새가 특이해서 버리지 못했는데 그게 봄에 새싹 돋듯 여기저기서 얼굴을 쏙쏙 내밀었다. 고향마을에 갔다가 주워 온 연한 갈색의 유리판이 다섯 개 나왔다. 책상 위에 깔아서 밑에 메모지를 넣어두려고 주워 온 것인데 여태 창고바닥에서 잠자고 있다.

새시 모기장인 스테인리스 망이 구겨진 채 나왔다. 이것 역시 가을에 썰어서 볕에 말릴 농작물들을 생각하면서 읍내 어느 연립주택 쓰레기장에서 주워 온 것이다. 작년 가을에 아무리 찾아도 안 보여서 철물점에 가서 철망을 새로 사 왔는데 이제야 얼굴을 내밀다니 괘씸했다.

잊혀 있던 물건들은 더 있었다. 논에서 타작을 하고 마대에 나락 담을 때 사용하는 초대형 깔때기가 나왔다. 이렇게 큰놈이 어떻게 숨어 있었는지 신기했다. 언젠가 후배가 나락 깔때기가 있냐는 전화가 왔길래 호기롭게 오라고, 주겠다고 했다가 끝내 못 찾아 허탕치게 했던 그 주인공이다.

일반창고를 정리하고 나면 다음에는 농기구 창고도 정리해야 하는데 날짜는 자꾸 갔다. 생태화장실 대·소변기도 비우고 깨끗이 청소를 해야 하는데 진척이 없었다. 진척이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버리려고 제쳐놨던 잡동사니들을 다음날에는 자비심과 측은지심을 발동시켜 '구제'하는 데 있었다. 버려지려다 아슬아슬하게 생명을 부지하게 된 놈들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 창고를 들여다보면 아니다 싶어 다시 끄집어냈다.

정리정돈의 핵심은 제자리 놓기가 아니라 버리기라는 금언을 떠올리지만 그게 되지가 않는다. 요즘 유행하는 '단순하게 살기(미니멀 라이프)'의 원칙 중에는 나 들으라고 하는 원칙들이 많다. 가령, 한 가지 주워 오려면 두 가지 버려라. 잡동사니 보관 개수를 분야별로 딱 정해 놓고 그 이상이 되면 무조건 줄여라. 1년 동안 한 번도 안 읽은 책, 안 쓴 물건은 무조건 버려라. 책은 딱 100권만 보유하라. 추억 서린 물건부터 버리기. 중고시장에 팔려고 하지 말고 그냥 줘라 등.

정리를 하다가 끝내 덜 된 곳은 아예 천막(텐텐지)으로 씌워놓고 방문객을 맞았다. 이제 이것들은 천막에 덮인 채 몇 년을 묵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창고정리를 하면서 혹시나 고가의 골동품 같은 게 나와서 횡재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까지 해 뒀지만 기우에 그쳤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남도민일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잡동사니, #창고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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