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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다 레이 님 만화책 <나루사와는 맛있게 먹는 얼굴을 사랑한다>(AK코믹스, 2016) 첫째 권을 읽다가 생각합니다. 이런 만화가 다 있네 하고요. 그렇지만 참으로 이런 만화가 있을 만할 뿐 아니라, 이제 우리 삶이나 살림은 좀 바뀌거나 새롭게 거듭나야지 싶습니다.

'가정 주부'는 가시내만 맡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한자말로는 '가정 주부'입니다만, 한국말로는 '살림꾼'이에요. 오늘날 한국 사회나 일본 사회에서 '가정 주부'는 으레 가시내만 도맡아야 하는 일로 여깁니다. "아저씨 가정 주부"를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예부터 '살림꾼'은 사내나 가시내 사이에 금을 긋지 않는 이름이었어요. 살림을 알뜰히 꾸리는 사람은 누구나 살림꾼이에요. 어른뿐 아니라 아이한테도 이 살림꾼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어요. 살림이 야무지고 손끝이 알뜰하며 마음결이 야무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살림꾼이 되었어요.

겉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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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k코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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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럽지만 나는 맛있게 밥을 먹는 여성이 좋다. 맛있게 밥을 먹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너무 좋다! 그리고 그 모습을 매일 바라보는 것이 내 꿈이다! 그 꿈을 빨리 이루기 위해서, 그래! 나는 주부가 될 거다!' (30∼31쪽)

만화책 <나루사와는 맛있게 먹는 얼굴을 사랑한다>에 나오는 나루사와는 고등학생이라고 합니다. 어릴 적에 어떤 큰 생채기를 입은 아이인 듯한데, 이마 한복판에 커다란 흉터가 있어요.

이마에 남은 흉터는 그저 겉으로 보이는 흉터일 텐데, 이 아이는 마음에 흉터보다 더 커다란 생채기가 있구나 싶습니다. 겉으로는 동무들이 무섭게 여기지만, 속으로는 누구보다도 여리면서 착한 숨결이지 싶어요.

아무튼, 이 아이 나루사와는 사내입니다만 '가정 주부', 그러니까 '살림꾼'을 꿈꿉니다. 회사원이나 공무원이나 운동선수나 정치인 같은 직업을 바라지 않아요. 집에서 밥을 짓고 살림을 꾸리는 즐거운 보금자리를 꿈꿉니다.

'아, 그러고 보니 오므라이스는 오랜만이네. 꽤 잘 만들어졌어. 엄마 맛에 가까워졌는지도.' (54쪽)

'아아, 사상 최대로 실망스러운 방식으로 먹는 사람이 옆집에 살고 있었다니.' (79쪽)

시골집에서 아이들을 늘 돌보면서 건사하고, 모든 밥이나 살림도 도맡는 아버지인 내 모습을 돌아보면서 만화책을 새삼스레 읽어 봅니다. 어느 모로 보면, 나도 '가정 주부' 노릇을 합니다. 집에서는 가정 주부요, 밖에서는 한국말사전을 쓰는 일을 하지요. 집 안팎 모두 신나게 할 일이 많으니 하루 내내 언제나 바쁘거나 부산해요.

그러나 이런 집 안팎 두 가지 일이 바쁘거나 힘들더라도 딱히 다른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일이 힘들면 그저 힘들 뿐, 이 일을 안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어요. 하루가 고단하면 그저 고단해서 밤에 곯아떨어질 뿐, 이 일을 누군가한테 맡기거나 떠넘기고픈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밥을 지어서 차리면서 즐거워요. 나는 밥을 짓고 빨래를 하면서 흥얼흥얼 노래를 부릅니다. 나는 살림을 꾸리고 바깥일을 모두 도맡으면서 씩씩하게 어깨를 폅니다.

밥짓기란, 살림하기란, 이리하여 내 보금자리를 내 손으로 가꾸면서 사랑하는 길이란, 가시내나 사내 가운데 한 사람만 맡아야 할 일이 아니라고 느껴요. 가시내도 사내도 서로 즐겁게 집안일하고 집밖일을 익히고 배우면서 나누어야지 싶어요.

두 어버이 가운데 한 사람이 돈만 벌어와야 하지 않아요. 두 어버이 가운데 한 사람이 밥만 차려야 하지 않아요. 두 어버이는 저마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을 키울 수 있어야 하고, 두 어버이는 저마다 슬기롭게 보금자리를 가꾸는 마음이 되어야지 싶습니다.

비빔밥을 한다. 아이들이 손수 비벼서 스스로 밥그릇에 덜도록 맡긴다. 작은 손이라도 아이들이 보태면 아이들은 더 맛나게 먹는다. 밥을 지어서 먹는 일이란 무엇일까.
 비빔밥을 한다. 아이들이 손수 비벼서 스스로 밥그릇에 덜도록 맡긴다. 작은 손이라도 아이들이 보태면 아이들은 더 맛나게 먹는다. 밥을 지어서 먹는 일이란 무엇일까.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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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이 왔어요!" "있지, 아키. 그건 엄마 역할 아니야? 아키는 지금 아빠잖아." "응? 그런가. 상관없잖아. 아빠가 만들어도!" "치이. 그럼 내가 할 일이 없잖아." "후유는 '회사'에 가는 거야!" (103쪽)

만화책 <나루사와는 맛있게 먹는 얼굴을 사랑한다>는 재미나게 이야기를 엮습니다. '맛있게 먹는 얼굴을 사랑'하는 고등학교 사내 아이 나루사와는 '손수 밥을 지어서 차려 주기를 몹시 즐깁'니다. 다만, 맛있게 먹어 주는 꾸밈없고 해맑은 얼굴을 보여줄 적에만 밥짓기를 즐겨요. 맛없이 먹는다든지, 아무 낯빛이 없이 먹으면, 아주 끔찍하게 싫어해요.

참으로 그렇지요. 온마음을 기울여서 밥을 지었는데, 이 밥을 아무 낯빛이 없이 그냥 입에 넣기만 하면, 밥을 지은 사람으로서 보람이 없다고 여길 만해요.

우리가 먹는 밥은 '영양소'이기만 하지 않거든요. 우리가 먹는 밥은 영양소일 뿐 아니라 '사랑'이거든요. 밥을 짓는 따사로운 손길이 스미면서 사랑으로 이루는 밥 한 그릇이라고 느껴요. 살림꾼이 되는 사람은 바로 '언제나 사랑을 나누는 일을 즐겁게 하는' 몫을 맡는다고 느껴요. 그러니까 이 만화책에 나오는 사내 아이는 바로 이 '사랑'을, '살림꾼으로 나누고 싶은 사랑'을 생각하는 숨결이로구나 하고 느낍니다.

만화책으로만 그치는 이런 이야기가 아니라, 참말로 우리 사회에서 모든 사내와 가시내가 저마다 즐겁게 밥을 짓고 살림을 지을 수 있기를 빕니다. 사내도 가시내가 상냥하게 웃고 노래하는 마음으로 밥짓기랑 살림짓기를 누릴 수 있기를 빌어요.

덧붙이는 글 | <나루사와는 맛있게 먹는 얼굴을 사랑한다 1>
(야마다 레이 글·그림 / 김보미 옮김 / AK코믹스 펴냄 / 2016.7.25. / 5500원)



나루사와는 맛있게 먹는 얼굴을 사랑한다 1

야마다 레이 지음, 김보미 옮김,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2016)


태그:#나루사와는 맛있게 먹는 얼굴을 사랑한다, #야마다 레이, #만화책, #살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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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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