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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산시 하양읍 부호리 114 금호서원의 강당
 경북 경산시 하양읍 부호리 114 금호서원의 강당
ⓒ 추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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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강은 경북 영천에서 발원, 대구를 지나 낙동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강이다. 금호강이라는 이름은 이 강의 물길과 갈대들이 가야금을 연주하는 듯한 소리를 낸 데서 연유한다. 그런데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부호리는 금호강을 바라보고 있다. 따라서 이 마을 한복판 114번지에 있는 서원이 금호서원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당연하다. 서원이 금호강을 바라보고 있고, 금호강이라는 이름 자체도 좋으니, 그 강을 바라보고 세워진 서원에 금호서원 이상 가는 이름을 붙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의 금호서원은 본래 자리에 고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름값에 어울리는 경관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다. 주변이 상전벽해를 한 탓이다. 지척에 대학이 셋이나 들어서면서 덩달아 상가, 원룸 등이 앞다투어 서원 둘레를 에워싸 버렸다. 게다가 정문 앞에는 나라에서 손꼽히는 거대 제과회사의 대구공장까지 세워졌다. 뽕나무 밭이 바다로 변한 것만큼이나 모든 경치가 바뀌고 말았다.

하지만 주변 풍경이 삭막해졌다고 해서 금호서원에 깃들어 있는 정신사까지 가치가 하락하는 것은 아니다. 금호서원에 서려있는 올곧은 선비정신은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함없이 사람답게 사는 길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힘차게 웅변하고 있다. 금호서원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응당 배향 인물인 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에 대해 탐구해야 한다. 금호서원이 허조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건립되었기 때문이다.

금호서원의 강당에서 바라본 사당 쪽 풍경
 금호서원의 강당에서 바라본 사당 쪽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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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서원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449호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그래서 문화재청 누리집에 소개되어 있다. 금호서원을 문화재청은 '준도문(遵道門)이라 편액한 외삼문을 들어서면 정면하여 강당인 수교당이 자리잡고 있으며 마당의 좌측에는 평기와를 얹은 4칸 규모의 맞배기와집인 성경재(誠敬齋)를 두었다. 성경재와 마주보는 마당 우측의 경사진 대지 위에는 사당이 배치되어 있는데, 사당의 주위에는 방형의 토석담을 둘러 별도의 공간을 이루게 하였으며 담의 정면에는 3칸 규모의 평대문인 내삼문을 세웠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금호서원 주차장에 당도하면 외삼문이 아니라 측면의 협문이 답사자를 맞이한다.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길이 서원 측면에 나 있다. 조선 시대에는 대체로 정문이 아니라 이 협문으로 출입을 했을 터이므로 주차장이 협문 앞에 마련되어 있다고 해서 어색할 것은 없다. 물론 지금 그렇게 된 것은 제과공장이 서원과 금호강 사이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서원을 설명해주는 안내판도 협문 앞에 세워져 있다. 안내판은 '허조는 조선 초의 유학자이자 정치가로 황희와 함께 세종 30년간을 태평성대로 이끈 조선 왕조의 명재상이었다. 그는 조선 왕조 통치의 기본 법전인 경제원과 속육전을 수찬하였으며, 유교 국가의 통치 이념인 국조오례의와 사례의를 찬정하고 석전의식을 개정하였다. 또한 성균관학사와 사부학당을 세웠다.'라고 설명한다.

금호서원 외삼문
 금호서원 외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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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해서 금호서원이 처음부터 대규모 서원으로 출발한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원이 가진 역사처럼 금호서원도 사당에서 출발하여 서원으로 커졌다. 그리고 상당수 서원이 그렇게 되는 것처럼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다. 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는 아픔도 겪었다. 아래는 안내판이 말해주는 금호서원의 역사다.

'효종 4년(1653) 영남유림이 금호동(현 하양읍 금락리)에 사당을 창건하였으며, 숙종 10년(1684)에 위판이 봉안되었다. 경종 4년(1724)에 사이동(현 하양읍 서사리)으로 이건하였으며, 정조 14년(1790)에 사액되었다. 고종 8년(1871)에 서원정비령으로 훼철되었고, 고종 38년(광무 5년, 1901) 훼철원지에 유허비각이 건립되었다. 1923년 현 위치에 서원이 복원되었다. 경내에는 사당인 경덕사를 위시하여 수교당, 성경재, 구인헌, 내삼문, 외삼문, 하당 등이 있으며, 정문 현판은 준도문이다. 강당인 수교당은 정면 4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지붕 겹처마 집으로 전면에는 툇마루를 두고 있다.' 

<세종실록>에는 허조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단숨에 알게 해주는 일화가 실려 있다. 조선 시대 때는 과거시험에서 자신의 답안지를 평가한 시험관을 은문(恩門)이라 부르며 평생의 스승으로 섬겼다. 그런데 허조의 은문인 염정수(廉廷秀)가 우왕 재위 중 최영, 이성계 등에 밀려 사형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어마어마한 정치적 사건이 발생하자 평소 염정수를 따르던 관리들은 물론 그를 은문으로 섬겨온 제자들 중 어느 누구 나서서 그의 시신을 거두는 자가 없었다. 그때 허조가 홀로 나서서 울음을 쏟으며 염정수의 주검을 간추리고는 관을 마련하여 장례를 치렀다.

그런 허조를 태종이 아꼈다. 태종은 임금자리를 물려줄 때 세종이 있는 자리에 허조를 불렀다. 태종은 허조의 어깨에 다정히 손을 얹은 채 세종에게 "주상, 이 사람은 나의 주석(柱石)이오."하고 말했다. 감격한 허조가 눈물을 흘리며 마음속으로 충성을 맹세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실제로도 허조는 주석지신(柱石之臣), 즉 나라의 경영을 떠받치는 대들보와도 같은 신하가 되어 황희와 쌍두마차로서 세종 시대를 이끌었다.

금호서원의 사당
 금호서원의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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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세종의 아들 세조는 허조의 아들 허후(許珝)를 죽였다. 세조의 형 문종은 승하하면서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 좌참찬 허후 등에게 어린 임금을 잘 보필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1543년(단종 1)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모두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는 계유정난을 일으켰다. 수양대군, 한명회, 정인지, 권람, 한확 등이 성대한 잔치를 열고 허후를 불렀다. 풍악이 울리고 술잔이 돌았으나 허후는 홀로 좋지 않은 표정을 띤 채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수양이 그 까닭을 물었고, 허후는 "집에 제사가 있다" 식으로 변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내심 눈치를 채었지만 수양도 모르는 체 넘어갔다.

수양 일파는 황보인, 김종서 등의 머리를 잘라 저잣거리에 내걸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자식들도 모두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허후가 나서서 "이 사람들이 무슨 큰 죄가 있다고 효시를 하고 자손들까지 죽이려 합니까? 김종서는 가까이 지내지 않아 잘 알지 못하나, 황보인은 사람됨으로 보아 결코 모반을 할 리 없습니다." 하고 반대했다.

세조가 그제서야 "네가 잔치 때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그 때문인가?" 하고 질책했다. 허후가 "그러합니다. 조정의 원로들이 같은 날에 다 죽었으니, 허후는 살았어도 역시 죽은 것입니다. 어찌 차마 고기를 먹는단 말입니까?" 하며 눈물을 흘렸다. 결국 허후는 사육신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끝내 죽임을 당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 허조(許慥) 역시 아버지와 함께 죽임을 당했다. 경산시 하양읍 대경로 527에는 허후, 허조 부자를 기려 1792년(정조 16)에 세워진 '허후 허조 부자 정축각'이 남아 있다.

금호서원의 담장
 금호서원의 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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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서원은 강당과 사당이 좌우로 배치되어 있는 점이 특징이다. 다만 강당 수교당은 남향인 반면 사당 경덕사는 서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경덕사가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소수서원의 현지 안내판에 나오는 '사당(문성공묘)이 강당(명륜당) 뒤에 있지 않고 서쪽에 있는 것은 서쪽을 중시한 우리나라 전통사상에 따른 것'이라는 해설을 참조할 만하다. 물론 강당과 사당 사이는 담장으로 가로막아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짓고 있다.

금호서원의 또 다른 특이점은 서재만 있고 동재가 없다는 점이다. 동재 자리를 사당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통의 강당인 수교당 뒤에 웅장한 규모의 현대식 강당인 경의관이 건설되어 있고, 또 수교당 왼쪽에 양몽재도 있어 서재가 없는 부분을 완벽하게 보완해주고 있다. 양몽재에는 '하양 허씨 청소년 보학 교육본부'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그 현판은 자라나는 후손들이 문중의 역사를 잘 알았으면 하고 바라는 현 기성 세대들의 마음을 알게 해준다.


태그:#금호서원, #허조, #허후, #김종서, #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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