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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환경운동연합은 23일 자발적 참가시민 50여명과 함께 금오도 끝자락 소리도 특별 답사를 통해 시프린스호 사건 21주년을 기렸다.

7월 23일은 1995년 호남정유(현 GS칼텍스)에 입항할 유조선 시프린스호가 원유를 싣고 태풍을 피하다 소리도 암초에 좌초해 해양오염 사상 최대의 피해를 기록한 날이다.

좌초된 시프린스호는 소리도 덕포 해안에 원유와 벙커C유 등 5천톤 넘게 유출시켜 3826㏊의 양식장과 인근 해역을 오염시킨 초대형 사고를 일으켰다.

여수 시내에서 시프린스호 좌초 현장인 소리도를 당일로 다녀오려면 여수연안여객선 터미널에서 아침 6시 20분발 정기여객선을 타고 가야만 오후 4시대에 2항차 배 편을 이용해 나올 수가 있다. 소리도 역포항까지는 정기여객선으로 약 두 시간이 걸린다.

역포항에서 참가자들은 마을버스 시간을 기다리며 한 시간가량  현장 바다정화 작업을 벌였다. 소리도 마을 버스편 등을 이용해 섬의 중간 지점인 연도항을 지나 다시 고개를 넘어서 덕포항에 도착했다.

21년 전의 시프린스호 사고 현장이 보이는 덕포항에서 당시를 설명해 주는 여수환경운동연합 조환익 국장
▲ 21년 전의 사고 현장이 보이는 덕포항에서 당시를 설명해주는 여수환경련 조환익 국장 21년 전의 시프린스호 사고 현장이 보이는 덕포항에서 당시를 설명해 주는 여수환경운동연합 조환익 국장
ⓒ 오병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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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프린스호 시고현장이 보이는 곳에서 21년전의 상황 설명을 듣는 참가자들
 시프린스호 시고현장이 보이는 곳에서 21년전의 상황 설명을 듣는 참가자들
ⓒ 오병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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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현장이 바로 보이는 바닷가에서 여수환경운동연합 조환익 국장이 사진 자료를 든 채 사고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사진들이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는 사진입니다. 보도된 내용입니다. 사진을 보시면 마을 주민들이 마스크도 없이 바닷가에 나와서 기름을 씻어냅니다. 이것은 사실 오염을 감소시키지 않는 방법이죠. 씻어내는 것은 바다를 오염시키는 거라서, 지금은 이 방법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근데 당시엔 이렇게 했습니다."

사고 당시의 사진 자료들
 사고 당시의 사진 자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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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수습을 하던 기관들의 영역다툼(?)에 대한 설명도 이어졌다.

"바다는 해경 관할이고, 육지는 자치단체 여수시 관할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집니다. 해경은 바다의 원유를 육지로 밀어내려고 하고, 여수시는 바다는 나몰라하면서 육지에 기름이 덜 올라오게만 하려는 그런 일도 있었습니다."  

조환익 국장은 당시 서울의 중앙환경운동연합 환경조사팀 간사였다. 시프린스호 사건이 그를 여수에 머물게 만들었다.

당시 여수에서는 한창진씨 등이 '여수환경을 지키는 시민모임'을 구성하여 활동을 벌이고 있었지만, 시프린스호란 대형 사건이 터져, 중앙 환경련의 도움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때 서울 환경련의 조환익씨가 시프린스호 사건을 담당하게 된다. 결국 그는 환경련의 조사팀장을 거져 여수환경련이 태동하자 여수에 내려와 현재까지 여수환경련 활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사고 당시에 현장에 수차례 와서 현장을 경험한 여수환경련 '자연의 벗' 대표 김정일씨가 당시를 회상하며 설명하고 있다.
 사고 당시에 현장에 수차례 와서 현장을 경험한 여수환경련 '자연의 벗' 대표 김정일씨가 당시를 회상하며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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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환경련에서 매월 답사를 떠나는 '자연의 벗'을 이끄는 김정일씨도 당시를 회상했다.

"당시에 제가 현장을 자주 오게 되었는데, 올 때마다 여기 기름이 떠서 낮에는 반사해 눈이 부셔서 바다를 못 볼 지경이었습니다. 출렁거리면서 파도에 밀려오는 원유 덩어리는 어떻게 감당 할 수가 없었습니다."

더불어 기자를 상대하는 대기업들의 여러 가지 행태에 대한 에피소드 소개도 빠트리지 않았다.

"여수시민들이 나섰던 '환경을 지키는 시민의 모임'이 당시 규탄하며 피해 보상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려고 준비하니까, 피해기업이 맞불을 놓는 겁니다. 같은 날 호남정유측이 소리도 현장에서 선상 기자회견을 하겠다며 배를 동원해서 기자들을 대거 쓸고 가버린 일이 있었죠." 

해당 기업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시프린스호 사고 수습 과정에서 '뇌물수수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로 인해 당시 호남정유에 대해서 시민사회는 "사고의 책임을 지고 피해어장 복구와 피해 주민에 대한 보상에 충실해야 할 사고 기업이 뇌물제공으로 이를 회피하고자" 했다며 비난한 바 있다.

소리도 역포 어촌계장 김정무씨(74)
 소리도 역포 어촌계장 김정무씨(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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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작업 현장에 들렀던 역포 어촌계장 김정무(74)씨는 "섬에는 캠페인 하러 더러 오는 단체 정도만 있었는데, 시프린스호 사고 당일을 잊지 않으려고 온 지는 몰랐다"며 21년 전 당시를 얘기했다.

"대부분 주민들은 사고 후에 기름제거작업을 했죠. 물론 일당을 받았지만, 그때만 해도 제대로 마스크도 없이 작업했습니다. 일단 저희 삶의 터전이잖아요? 동원되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내 어장, 내 바닥(바다)이니까 자기의 일처럼 모두 정신없이 작업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어선이 있었는데 어선까지 동원해서 작업을 했으니까요."  

사고 후 삶의 터전을 잃은 것은 물론 10년 이상 고통을 겪었다는 김정무 어촌계장은 "다시는 그런 일이 안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참가자들은 덕포항을 떠나며 어촌계장의 소망과 같이 다시는 시프린스호 사고와 같은 참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돌탑을 쌓기도 했다.

참가자들이 시프린스호 원유유출  같은 사고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현장에서 돌탑을 쌓고 있다.
 참가자들이 시프린스호 원유유출 같은 사고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현장에서 돌탑을 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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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환경련 조환익 국장은 대형사고 전후에 국가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주문한다.

"외국의 선진국 사례를 보면 사고 이후 20년, 30년이 지나도 생태계 회복 과정에 대한 자료를 차근차근 축적합니다. 이런 과학적인 모니터는 사고 이전, 이후에 국가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죠. 근데 우리는 아주 미흡합니다. 피해가 반복될 수 있는데도 방치되고 있죠. 특히 제대로 된 자료가 부족하면 피해기업과 또 외국 보험사와의 보상문제가 터지면 늘 제대로  된 자료 부족으로 어민(국민)들은 늘 손해를 보게 됩니다. 국가에서 제대로 해줘야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죠."

덧붙이는 글 | <여수넷통>에도 송고합니다.



태그:#시프린스호 사건, #소리도 답사, #덕포항, #여수환경운동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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