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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무위도>
 소설 <무위도>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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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장>

예진충을 대신해 은화사의 새로운 책임자가 된 첩형관 채욱은 어이가 없었다. 척숭과 은화사 요원이 살해된 것도 믿기지 않았지만 자운헌에 도착하고 보니 담곤과 그의 제자들의 행방도 묘연할 뿐만 아니라 거실에는 금의위 사방 전광이 또한 죽어 있는 것 아닌가.

채욱은 희생자들의 상처를 자세히 살폈다. 척숭과 젊은 은화사 요원이 당한 검날은 같았고, 전광을 벤 검은 달랐다. 젊은 은화사 요원은 기습에 의해 당한 것 같았다. 사선으로 베어져 있으면서 날의 들어감과 나감이 예리했다. 벤 자는 검의 세기보다는 빠름에 주력했다. 보통 고수가 아니다. 쾌검을 전개하면서 이렇게 깊이 들어가다니. 상처의 두께로 볼 때 결코 둔한 검이 아니다. 북쪽 초원의 오랑캐들이 주로 사용하는 휘어진 만도(蠻刀)이거나 중원의 협봉도이다.

높이 치솟았다가 내려오는 속도로 검을 휘두른 것 같은데 이 자는 사람의 급소를 정확히 알고 있다. 쇄골과 경추 사이의 경동맥을 정확히 지나가되 칼날이 뼈에 닿지 않았다. 따라서 칼의 회수도 빨랐다. 희생된 은화사 요원의 목은 삼분의 일 가량이 벌어져 있지만 이는 쓰러지면서 머리가 땅에 부딪치면서 벌어진 것이리라. 만약 희생자가 기둥에 묶여 있었더라면 그의 목에는 가느다란 선만 남았을 것이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예리하고 빠르다. 별호가 예검비화인 자신이 베더라도 이 정도의 검흔만 남길 수 있을까? 자신할 수 없다.

척숭의 상처는 혼란스러웠다. 젊은 요원이야 단 일격으로 끝난 것을 쉽게 알 수 있었지만 척숭이 당했을 때의 형세를 추측하기는 힘들었다. 상처는 세 군데였다. 왼쪽 가슴과 오른쪽 허벅지 그리고 심장. 심장을 꿰뚫은 초식에 의해 절명했다는 건 두말 할 나위없지만 상처가 너무 깨끗했다. 검의 들어오고 나감에 흔들림이 없고 검날을 횡으로 눕혀 갈비뼈 사이를 정확하게 파고들었다. 마치 척숭을 묶어 놓고 찌른 것 같았다. 하지만 다른 상처와 정황으로 볼 때 정면 대결을 벌였음에 틀림없다.

만약 손속을 주고받았다면 상대의 동작을 정확히 파악하고 자신의 자세를 확실하게 갖추어야 이런 공격을 성공시킬 수 있다. 가슴과 허벅지에 난 상처는 깊지 않고 흘러간 걸 보니 척숭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한 가벼운 공격이지 싶다. 척숭과 은화사 요원을 살해한 자는 누구일까. 채욱은 일말의 호기심이 솟는 한편 마음 깊숙한 곳에서 두려움 또한 은근히 고이는 걸 느꼈다. 만약 이 자와 대결을 하게 된다면….

금의위 사방 전광의 죽음엔 또 다른 의문이 들었다. 분명 척숭과 은화사 요원이 당한 것과는 검이 달랐고 상처가 특이했다. 검날은 강호의 검객들이 흔히 사용하는 양날 검일 뿐만 아니라 두께 역시 일반적이었다. 다만 검이 앞의 은화사 요원이 당한 것보다 깊이 들어갔고 검흔도 컸다. 힘이 좋은 자이군. 채욱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은화사 요원은 왼손잡이에게 당했지만 전광은 오른손잡이에 의해 당했다. 검도 다르지만 검길의 운용도 달랐다. 전광을 벤 자는 어깨에 힘을 배분하지 않고 손목의 힘으로 벴다. 이 역시 기습의 일종으로 상대방이 방심했을 때 의표를 찌르는 공격으로 유용하다. 그런데 손목의 힘만으로 이 정도 깊이와 크기를 만든다는 건 타고난 힘이 좋다는 의미다.

결국 자운헌에서 담곤과 남녀를 빼돌린 일행은 두 명 이상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하나는 초절정 고수, 또 한 명은 힘이 좋은 자. 아니 그보다 더 많은 인원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누구이고 어디로 갔는가. 담곤 일행과 같은 편인가 아니면 우리의 경쟁자인가. 채욱은 일이 복잡하게 되어감에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새나왔다.

채욱은 무정도 동백웅과 함께 개봉을 출발하면서, 담곤의 별장을 감시하기 위해 척숭과 은화사 요원 및 금의위 대원 6명을 선발대로 먼저 보냈다는 설명을 예진충한테 들었다. 그 후 정주에 와서 금의위 책임자인 장반 풍천의를 만나 예진충으로부터 지휘권을 인계 받았다는 사실을 전했다. 그리고 풍천의와 그의 오른팔인 장반 신렵과 함께 자운헌에 도착한 것이다.

채욱은 전광의 시체를 살펴본 뒤 자운헌 주위를 수색했다. 

"풍장반, 정주 병마사에게 관군 지원 요청을 하도록 하오."

채욱이 풍천의를 돌아보며 말했다.

"뒤쪽으로 길이 있는 것 같소이다. 이 자들을 수색 추적하려면 우리들 가지고는 어림도 없을 것 같소. 수배자 죄명은 역모 혐의라고만 전해 주시오."

금의위에게는 지방 관아의 병력 징발권이 있지만 동창은 원칙적으로 황궁 소속이고 더구나 은화사는 비밀 조직이기 때문에 드러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하옵죠. 인원은 어느 정도로 할갑쇼?"

풍천의가 되물었다.

"너무 많아도 번거로우니 오십 명 내외로 요청하도록 하오."

채욱는 일단 자운헌 뒤쪽의 반야봉에 수색 본부를 차리기로 했다.

화북의 평야지대에 우뚝 솟은 운부산은 도끼로 자해한 듯한 험한 인상만으로도 황하를 짐짓 멈추게 하기에 충분했지만 속까지 그러려니 하고 속단할 건 아니다. 반야봉을 기점으로 대항산으로 이어지는 북쪽 능선만큼은 조수협이니 구사곡이니 하는 험로가 뉘 집 애 이름이냐는 듯 순하고 부드럽게 이어졌다. 부드러움만큼 속이 깊어 품안에 파묻히면 방향조차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숲이 우거졌다.

담곤과 헤어진 관조운과 혁련지는 북쪽 대항산 방향으로 팔부능선을 타고 하루 밤낮을 꼬박 걸었다. 그들은 주능선을 타지 않고 팔부에서 숲을 헤치며 길을 나아갔다. 주능선은 멀리서도 눈에 띄기 쉬울 뿐만 아니라 자칫하면 매복이나 차단에 걸릴 위험이 있었다.

금의위와 은화사의 추격대가 담곤 사숙을 발견했을 경우를 가정할 때 그들의 연락수단은 관조운과 혁련지가 제 아무리 날고긴들 자신들을 앞지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행방이 묘연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주능선을 타고 가지 않으면 추격대는 그들이 어느 지점에서 빠져나갔는지 가늠하기 어렵게 된다.

그들은 산중의 들쭉날쭉한 협곡을 타느라 거리감이 잡히지 않고 방향 감각도 명확하지 않았다. 다만 아직 산세가 험하고 숲이 깊은 것으로 보아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성읍과 멀리 떨어진 곳이라는 것만 짐작할 뿐이었다. 사실 칠팔부 능선은 길이라고 할 게 없었다. 그저 지나기 편한 경사나 완만한 곡선 쪽으로 방향을 잡아가며 관목을 헤치며 나아갈 뿐이다.

길 아닌 길이 어렴풋이 나있는 곳도 있지만 그건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 아니라 짐승들이 다니는 통로였다. 오늘 하루 정도만 숲에서 보내고 다음날 새벽에 산에서 내려가리라고 계획을 세웠다. 이틀 반 정도면 작령을 넘어 고평(高平) 어디쯤 나오리라는 것이 혁련지의 추측였다.

"사매가 상대했던 덩치 큰 금의위 무사를 제압한 건 무슨 수(手)였지?"

분초를 다투는 추격권을 벗어났다고 생각한 관조운이 약간의 여유를 갖고 혁련지에게 물었다.

"상대가 전혀 생각지 못한, 뜻밖의 임기응변 수였죠."

혁련지가 생글거리며 답했다. 그녀도 자신의 수가 그렇게까지 먹혀들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 같았다.

"모 사부님에게 배운 건 아니에요. 그렇다고 사부님과 전혀 관련이 없는 것도 아니고요. 잠깐 쉬었다 가죠? 그 얘기도 할 겸."

이마의 땀을 훔치며 그녀가 조그만 바위에 앉았다. 관조운은 맞은편에 앉았다.

5년 전 혁련지가 스승 모충연으로부터 부지런히 청학십삼검법을 배우던 때였다. 청학십삼검은 일식부터 칠식까지는 검식(劍式)이 복잡하고 힘든 동작이 많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오묘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강호의 명숙에서 흔히 고련하는 수준의 검술이었다. 혁련지는 특유의 재기(才器)로 칠식까지는 스승 모충연이 감탄할 만큼 빨리 끝냈다. 이대로라면, 하는 자만이 싹틀 무렵 그녀의 자만을 비웃듯 팔식부터는 도대체가 진전이 없었다.

그러나 스승 모충연은 이를 예상이나 했다는 듯 별다른 재촉이나 지도가 없었다.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이 혁련지에게 조급해하지 말 것을 주문했다. 이것이 오히려 혁련지의 오기를 자극했다. 그녀는 팔식 청학관형을 습득하기 위해 밤낮으로 노력했다.

그날도 혁련지가 마당에서 검을 가지고 청학관형을 수련하고 있었다. 한 발을 공중에 내딛듯 오금을 살짝 구부린 다음 다른 발로 얼굴 앞에서 원형을 그림과 동시에 검은 등 뒤로 돌아 상대의 허를 격하는 검식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동작이 자연스럽지 못했고 검을 쥔 손에 강약이 스며들지 못했다. 동작 자체만으로 볼 땐 어려운 자세가 아닌데 전반적으로 몸이 뻣뻣해지는 느낌이었다. 강약을 주려니 박자가 맞지 않고, 박자에 신경을 쓰려니 동작이 원활하지 못했다. 아직 몸에 배지 않아서 그런 거야, 백 번, 천 번, 안되면 만 번이라도. 몸이 자연스레 익힐 때까지 연습하는 수밖에 없어. 혁련지는 속으로 되뇌이며 검을 공중으로 쓱싹 휘둘렀다.

그때였다.

"허어. 검식만 알고, 검로(劍路)를 모르는군. 사부란 작자가 어찌 그 모양인고. 제자가 미우면 차라리 가리키질 말지. 왜 애먼 몸 고생만 시키는 거야!"

저택 현관 입구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혁련지는 흠칫 놀라 동작을 멈추었다.

현관 앞에 어떤 노인이 서 있다. 그런데 차림이 이상했다. 기다란 장포를 걸쳤는데 그 장포가 중원의 것과 달랐다. 불그스레한 색감도 낯설지만 무엇보다 몸에 착 붙는 윤곽이 기묘해 보였다. 노인은 하얀 수염이 가슴어림에 닿았고 얼굴은 붉은빛이 감돌았다. 눈은 작지만 깊은 우물 같았고, 코는 뭉툭하지만 미련하거나 사나워 보이지 않았다. 안면에 주름이 가득했지만 궁색해보이지 않고 일부러 그린 양 조화로워 보였다. 키는 보통이나 꼿꼿한 허리와 각이 진 어깨는 노인의 몸매라고 보기 어려웠다.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고 사람됨을 짐작하기는 더욱 어려웠다.

덧붙이는 글 | 무협소설 <무위도>는 매주 월, 수, 금요일 연재합니다. 77회는 편집자의 실수로 토요일에 게재합니다. 독자분들의 양해바랍니다. 다음회는 월요일(25일)에 정상 업로드됩니다.



태그:#무위도, #무협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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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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