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앗! 여보 이거 보셔?"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밭일하고 있는 아내에게 내가 건넨 말이다. 아내는 무슨 큰일이 났나 싶어 내 쪽을 봤다. 내가 들고 있던 건 들깨가지였다.

"뭔일이시래?"

감동도 영혼도 없는 아내의 물음에 순간, 동일한 물건에 대한 느낌의 강도가 서로에겐 '서울과 부산쯤'이란 게 느껴졌다. 보라한 게 뭐였냐고? 물론 들깨가지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들깨가지 옆구리에 난 뿌리들이었다.

신기해하며 아내에게 보여준 들깨가지 옆구리에 난 뿌리들. 아내는 별다른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듯 했다. 전에도 본 모양이다. 나만 처음인가.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 가지 옆구리에 뿌리 신기해하며 아내에게 보여준 들깨가지 옆구리에 난 뿌리들. 아내는 별다른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듯 했다. 전에도 본 모양이다. 나만 처음인가.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 송상호

관련사진보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었을까. 생각해보니 답이 나왔다.

나와 아내가 풀을 낫질하다가 들깨가지를 잘라버렸다. 잘린 들깨가지는 자빠진 채로 하루를 보냈다. 이대로 죽나보다며 생을 포기하면서. 하지만, 하늘이 그를 도왔다. 다음 날 아침 하늘에서 비가 왔다. 반갑게 비를 맞다가, 비를 따라 약간 움직였다. 다행히 흙이 많이 쓸려 내려왔다. 비가 그친 뒤, 흙도 멈추고, 가지 옆구리도 흙에 묻혔다.

가지 끝은 허공에 있지만, 가지의 한 부분인 옆구리는 땅에 묻혔던 거다. 그렇다면, 이제 그가 할 일은? 그렇다. 옆구리에서 뿌리를 내는 일이다. 뿌리를 내려 자라게 하는 일이다. 그렇게 그 가지는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고 있었다.

사실, 이 가지는 더럽게 운이 없는 편이다. 그렇게라도 해서 잘 자라고 있었는데, 주인의 서투른 손길에 걸려 또 뽑혔으니 말이다. 주인 복이 지지리도 없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죽을 위기에 놓였다. 철없는 주인은 그걸 가지고 사진이나 찍어서 온 동네방네 알리고 다니니 복장 터질 노릇이다.

일하다가 두 번이나 잘리고 뽑힌 후, 다시 심겼지만, 잘 자라서 깨를 맺으려나 싶다. 참 인생 살기 고달프다. 아니지 참 '깨생' 살기 고달프다. 하하하하

이런 가지에 대해 나는 놀라서 초풍할 기세였지만, 아내는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러느냐는 눈초리다. 아내는 전에도 그런 걸 본 게 틀림없다. 바꿔 말하면 나는 생전 처음인 것.

사실 지난해에 아내가 내게 보여 준 뭔가가 머리에 떠올랐다. 바로 '벤자민'이다. 아내가 투명한 물컵에다 벤자민 가지를 담가놓았고, 며칠이 지난 후 그 컵에선 작은 기적이 생기고 있었다. 바로 벤자민 가지 끝에서 뿌리가 생기고 있었다. 뿌리 있는 가지만이 뿌리를 통해 물과 양분을 빨아들여 살아간다는 통념을 거기서 넘어서긴 했다.

사실 이건 벤자민과는 또 다른 문제다. 아무리 뿌리가 나중에 생겼더라도 '가지 끝의 뿌리'라는 통념을 건드리진 않았다. 뿌리가 없으면 뿌리를 만들어서라도 살아남는다는 생명의 법칙에는 충실한 거였다.

하지만, 이번엔 엄연히 방향이 다르다. 뿌리가 없으면 뿌리를 만들어서라도 살아남는다는 것이 놀라운데, 가지 끝이 아닌 가지 옆구리에서라도 뿌리를 만들어낸다는 거 아닌가. 가지 끝이 땅에 묻히지 않았다면, 그걸 포기하고, 또 다른 생명의 길을 만들어 낸다는 거다.

100평 텃밭을 빌려 텃밭을 한 지 4년이 되었다. 텃밭을 하지 않았으면 만나지 못했을 자연의 섭리들이 하나둘이 아니다. 그걸 모아 책을 내도 좋을 만큼 하나둘 쌓이고 있다. 메모하는 습관 때문에 그런 경험들을 하나둘 모으고 있다. 물론 이번 일도 큰 경험이 될 듯하다.

이날 수확한 고추다. 엄지손가락보다 굵고 큰 고추도 놀랍다. 옛날에 이런 큰 고추가 없었다. 물론 접붙여서 생긴 오이고추, 가지고추 덕분이다. 사실 검은 색 가지고추도 놀라운 일이다. 아직도 이 고추를 처음 보는 사람들이 많을 테니
▲ 손가락보다 굻은 고추 이날 수확한 고추다. 엄지손가락보다 굵고 큰 고추도 놀랍다. 옛날에 이런 큰 고추가 없었다. 물론 접붙여서 생긴 오이고추, 가지고추 덕분이다. 사실 검은 색 가지고추도 놀라운 일이다. 아직도 이 고추를 처음 보는 사람들이 많을 테니
ⓒ 송상호

관련사진보기


얼마 전 지인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다년간 수영을 배워 수영을 잘하는 아들과 함께 지인은 계곡에 놀러갔단다. 지인이 아들에게 "야, 아들 우리 계곡물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수영시합 한 번 해볼까" 했더니, 그 아들이 한다는 말, "아빠! 나 수영모 없이 한 번도 수영 안 해봐서 못해"라고 했단다.

결국 수영시합은 시작도 못해봤다며 혀를 차는 지인을 보며, 우리가 자연에서 배워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구나 싶었다. 만일 가족 중에 누군가 물에 빠졌을 때도, 수영모를 탓하며 '산 넘어 불구경' 하듯 했을까.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시골서 텃밭농사를 하니 철을 좀 알고, 철이 좀 드는 듯하다. '철학하는 농사꾼'이라는 거창한 말을 굳이 안 붙여도, 농사가 나에게 자연과 철학을 가르쳐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태그:#자연, #들깨, #텃밭, #농사, #송상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교회에서 목사질 하다가 재미없어 교회를 접고, 이젠 세상과 우주를 상대로 목회하는 목사로 산다. 안성 더아모의집 목사인 나는 삶과 책을 통해 목회를 한다. 그동안 지은 책으로는 [문명패러독스],[모든 종교는 구라다], [학교시대는 끝났다],[우리아이절대교회보내지마라],[예수의 콤플렉스],[욕도 못하는 세상 무슨 재민겨],[자녀독립만세] 등이 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