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이 김선달 '조선 팔도를 뒤흔든 전설의 사기꾼이 온다!'라는 문구가 무색하다.

▲ 봉이 김선달 '조선 팔도를 뒤흔든 전설의 사기꾼이 온다!'라는 문구가 무색하다. ⓒ CJ 엔터테인먼트


한국 최강의 바둑기사 이세돌이 알파고에게 패한 지 어느덧 넉 달. 그 사이 인공지능은 패스트푸드점에서 직접 주문을 받고 요청에 따라 로고를 디자인하며 차주 대신 자동차를 운전하겠다고 나섰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까이 다가선 인공지능의 성취 가운데 지난달 필자의 이목을 사로잡은 소식이 하나 있었다.

올해 6월 9일 유튜브에 등록된 <선스프링(Sunspring)>은 실제 배우가 출연하는 9분짜리 단편영화다. 유튜브 게시 한 달 만에 60만이 넘는 조회수를 기록한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로봇이 썼다. 영화를 제작한 ARS테키나에 따르면 시나리오를 쓴 건 벤자민이라는 이름의 로봇으로 <X파일> <스타트랙> 등 SF드라마 수십편의 대본을 읽고 나서 내재된 알고리즘에 따라 이야기를 써내려갔다고 한다.

막상 완성된 영화는 대중들로부터 난해하고 비합리적인 부분으로 가득하다고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실상은 이 모두가 합리적 절차에 따라 생산된 결과물이란 것이다. 알파고가 둔 모든 수가 수많은 기보를 연구한 끝에 만들어진 알고리즘으로부터 나온 것과 마찬가지다. 어쩌면 인간은 빠르면 수년 후 인공지능이 쓴 이야기를 읽고 눈물을 흘리거나 박장대소를 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로봇은 로봇이다. <선스프링>을 본 사람이라면 적어도 예술의 영역에서만큼은 인간작가가 인공지능으로부터 얼마간 자유로울 수 있으리라는 데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는 인간 '작가'에 한정되는 말이다. 우리는 매년 수없이 쏟아지는 어떠한 새로움도 없는 작품을 작품이랍시고 마주하곤 하는데 이와 같은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수 년 내 <터미네이터> 못지 않은 디스토피아를 마주할 수도 있는 일이다.

이런 영화를 팔 생각을 하다니 제목값 하네

봉이 김선달 백주대낮에 왕의 별궁을 털고 이렇게 도망치는 장면을 찍을 수 있다는 게 놀랍다

▲ 봉이 김선달 백주대낮에 왕의 별궁을 털고 이렇게 도망치는 장면을 찍을 수 있다는 게 놀랍다 ⓒ CJ 엔터테인먼트


생각해보면 지금 극장에 걸려 나름대로 잘 팔리고 있는 <봉이 김선달>이 꼭 그런 영화다. 러닝타임이 지속되는 내내 기존의 전형만을 답습하는 무미건조한 상업영화니 말이다. 영화는 극도로 재미없고 지루해 도저히 볼 수 없는 수준인 건 아니지만, 누가 극본을 쓰고 누가 연출했는지 조금도 알고 싶지 않은 구성과 연출로 가득하다. 박대민 감독이 아니라 한국 영화판의 장삼이사가 만들었다 해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까지 든다.

영화는 조선조 효종시절 청나라 전쟁터에 끌려간 조선인들을 비추며 시작된다. 평안도 관찰사 성대련이 팔아넘긴 조선백성이 청나라 군대의 칼받이로 쓰이는데 이 아비규환의 장에서 인홍과 보원, 견이 세 명이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는다.

영화의 무대는 곧 조선땅으로 옮겨진다. 인홍은 보원과 짝을 이뤄 조선 최고의 도둑으로 활약하는데 급기야는 임금의 별궁에 침입해 금괴를 훔칠 만큼 대범한 범행을 이어간다. 수사당국이 즉각 추적에 나서지만 주인공들의 범행은 끝을 모르고 계속된다.

정통 범죄물이라기보다 코미디성이 짙은 작품이라 그럴까. 엉성하고 촌스러운 설정이 방치된 부분도 적지 않다. 왕이 머무는 별궁에서 인홍이 벌이는 범죄나 발각된 후 도망치는 과정 등이 모두 그렇다. 관군이 인홍을 붙잡았음에도 사헌부 수사관을 사칭한 보원에게 인홍을 넘겨주는 장면은 어이가 없어 웃기지도 않을 지경이다.

속아줘야 하나, 고민하게 하는 엉성한 사기극

봉이 김선달 하다 못해 <조선 명탐정>시리즈의 콤비라도 참고했다면 이렇게 평이하고 특색없는 짝패는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 봉이 김선달 하다 못해 <조선 명탐정>시리즈의 콤비라도 참고했다면 이렇게 평이하고 특색없는 짝패는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 CJ 엔터테인먼트


문제는 인홍과 보원, 두 짝패가 벌이는 사기극이 엉성하다는 데 있다. 사기극이 엉성하다는 건 필연적으로 사기에 속아넘어가는 상대방을 어수룩하게 만든다. 그 정도가 심하면 영화 전체의 분위기까지 망친다. 이 영화가 꼭 그렇다. 꾸준히 상대를 속여넘기고 거액을 훔치는 일당의 범행에서 최소한의 긴장감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건 심각한 문제다.

인홍과 보원이 담배판매상을 터는 과정은 잘 짜인 사기극이라기보다 고민 없이 만든 질 낮은 코미디에 가깝다. 성대련의 조카로 사실상 악당의 행동대장급인 성종익과 그 수하들을 둘은 국밥에 설사약을 타고 담배종이에 수면제를 묻히는 방법으로 속여넘긴다. 섬 가운데 숨겨진 대량의 담배를 터는 과정의 묘사가 어수룩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이어진 사기극은 더욱 어처구니 없다. 인홍과 보원은 대동강에서 금이 난다고 속여 악당 성대련에 강을 팔아넘기는 작업을 시작하는데 성대련이 이들을 믿게 되는 과정이 정통적인 사기극보다는 허술한 코미디에 가깝게 연출된다. 잘 짜인 시나리오로 돌파해야 할 부분을 엉성한 코미디에 기대어 풀어나가다보니 영화 전체의 긴장감과 설득력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액션에도 특색이 없다. 허술하기 짝이 없던 첫 전투신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막상 본 줄거리가 시작된 후 이어지는 칼질 등에선 어떠한 기백도 느껴지지 않는다. '덤으로 얻은 목숨이니 즐기며 살겠다'던 주인공의 말이 '덤으로 얻은 목숨이니 죽거나 말거나 대충 살겠다'로 느껴진 건 나뿐일까. 간절함이 느껴지지 않는 액션은 가뜩이나 허술한 이야기를 허약하게 만들었다.

개그조차도 실망스럽다. 사기극이 시종 단조롭고 액션도 무디다면 개그라도 날이 서 있어야 할 텐데 영화는 고창석이란 조연배우의 개인적 역량에 기댈 뿐 어떤 준비된 웃음코드도 갖추고 있지 못하다. 고창석과 라미란 등이 가진 고유의 캐릭터를 고민없이 활용한 이 영화의 선택에 어떠한 고민이 있었는지를 묻고 싶다.

더욱이 유승호라는 아직 영화판에서 검증되지 않은 배우를 시종일관 멋을 부리게 만들면서도 영화 전체는 그와 전혀 다른 느슨한 코미디로 전개된 점도 아쉽다. 이는 유승호라는 배우를 마치 정장을 입고 소풍가는 중학생처럼 우스꽝스럽게 보이게 만들었다. 제대로 된 영화라면 이렇게 주연배우가 따로 놀도록 방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반적으로 <봉이 김선달>은 때 되면 나오는 상업영화의 전형과도 같았다. 특히 흔한 소재와 수법으로 관객의 높은 기준을 돌파하려는 일말의 치열함도 보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매너리즘으로 가득한 작품이라 생각한다. 만약 로봇이 영화를 만들게 되면 이런 작품을 만드는 사람은 버텨내지 못할 것이다.

봉이 김선달 청나라 전쟁터서 살아돌아온 세 조선인을 연기한 시우민과 유승호, 고창석

▲ 봉이 김선달 청나라 전쟁터서 살아돌아온 세 조선인을 연기한 시우민과 유승호, 고창석 ⓒ CJ 엔터테인먼트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봉이 김선달 CJ 엔터테인먼트 박대민 유승호 김성호의 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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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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