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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자루를 타고 다닌다. 몰래 다른 마녀와의 회합에 참석하며, 악마의 하수인으로서 지령에 따른다. 가볍게는 사람들에게 불운을 선사하고 심하면 다른 사람을 저주로 죽이기까지 한다. 이것이 대중적으로 알려진 마녀의 모습이다. 근대 과학 혁명의 시기를 지난 오늘날의 시선으로 보면 이런 마녀의 이미지는 황당하기 짝이 없다. 이러한 마녀는 중세시대와 많은 연관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도 흔히 '중세의 마녀사냥'이란 표현을 자주 쓰니까.

그러나 사실 대다수의 마녀가 발견되고 마녀사냥이 활발히 행해진 때는 중세가 아니다. 중세 시대는 암흑 시대(Dark Age)라는 악평을 듣기도 하고 근대적인 학문 체계가 없는 무지한 시대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마녀로 몰고 지금 보면 황당한 이유를 들어서 사람을 고문하고 죽인 시대는 중세가 아니라 근대 초다. 17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계몽주의의 꽃이 피고 과학이 발전하는 동안 마녀가 발견되고 마녀사냥을 위한 고문과 엉터리 재판이 벌어지곤 했다.

학문이 미발달하고 제도가 미비하던 시절이 아닌, 학문 체계가 정립되고 근대 국가가 출현하는 와중에 마녀가 등장한 것이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책 <마녀>는 이런 마녀의 등장과 마녀 사냥의 규격화를 깊이 있게 고찰한 역사 서적이다.

주경철, <마녀>
 주경철, <마녀>
ⓒ 생각의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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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는 페르낭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의 번역자이자 <문명과 바다>, <모험과 교류의 문명사>와 같은 양질의 교양서를 쓴 바 있는 서울대 서양사학과 주경철 교수가 집필했다.

저자는 마녀사냥 현상이 단순한 무지나 집단 광기가 아닌, 재판 제도와 사회적 권위를 빌려서 행해진 복잡한 현상임에 주목한다.

물론 마녀사냥 과정에서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을 마녀로 몰아 집단 광기가 형성된 경우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를 지원하는 학설과 재판 매뉴얼의 존재는 마녀사냥이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학문체계 아래서 정립되었음을 보인다.

저자에 따르면, 중세에 기독교 사상이 전 유럽에 보급되었음에도 농민들이 가지고 있는 원시적인 수준의 자연 사상은 모두 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주술적인 민중 신앙과 마술은 여전히 농촌 사회에 남아 있었다. 이런 이야기들은 민속 설화나 민중 신앙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교회와 국가의 관계가 정립되고 권력 체계가 구성되면서, 기독교 교리에 어긋나는 사상은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선한 기독교와 다른 사상은 악한 것으로 규정된 것이다. 교회 학자들은 <개미 나라>, <말레우스 말레피카룸>과 같은 악마론 서적을 저술하고, 법학자들은 마녀 혐의자를 재판하는 재판 매뉴얼을 개발해서 실무에 적용시켰다.

교회와 국가는 자신의 정체성을 명료하게 정립하고 신민에 대한 지배력을 탄탄히 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이 올바르고 무엇이 그른가, 선과 악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중요했다. 선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그 반대인 악을 억눌러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유럽 문명은 악을 필요로 했고, 악을 구현하는 존재로 마녀를 발명한 셈이다. -306P

물론 유럽의 엘리트들만이 마녀 사냥에 나선 것은 아니다. 농촌 공동체 내의 민중들은 위기 상황에서 이웃을 고발하면서 민중 테러를 이끌었다.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늙은 여자들이 주된 마녀 혐의자들로 몰려 비참한 고문 끝에 죽어갔다.

독일과 스위스처럼 근대적 국가 권력이 자리잡지 못한 곳에서는 더욱 극단적인 마녀사냥이 발생했다. 국가 차원의 정당성과 합리성이 보장되고 사법 절차가 정비된 곳에서는 마녀의 발견도, 마녀사냥도 점차 사라져갔다.

책의 본문에는 터무니없고 엉터리로 진행되는 재판에 대한 언급이 많다. 마녀 혐의자를 고문하는 방법에 대한 묘사나, 마녀 혐의자에게 자백하면 살려주겠다고 약속한 뒤 약속한 판사가 아닌 다른 판사가 와서 사형을 언도하면 약속을 깬 것이 아니라는 조언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어떤 증거나 현상 앞에서도 혐의자가 유죄에 기울도록 해석하는 이론도 엽기적이다. 마녀는 눈물을 흘리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우는 여자는 위장이라고 여기는 판사의 이야기도 있다. 마녀의 존재 자체도 황당하지만 마녀를 재판하는 과정은 더욱 엉망진창이었다.

마녀사냥을 단순히 옛날에 일어난 헛소동으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마녀에 관한 교리 확립과 제도적 지원은 당대 최고의 엘리트 계층인 성직자와 학자에 의해서 이루어졌음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극단적인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만들어 내고, 가상의 범죄에 대해 유죄를 내리는 모습은 절차와 합리성에 대해 숙고하게 한다.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자신의 정당성을 위해 악을 필요로 하는 현상은 초역사적으로 존재했으며, 현대까지도 이어진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 나치가 유대인을 악한 존재로 규정했듯이 말이다. 근대 유럽 문명은 문자 그대로 악마의 사주를 받은 마녀를 창안했다. 현대 대한민국을 사는 우리 곁에는 마녀가 없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마녀 - 서구 문명은 왜 마녀를 필요로 했는가

주경철 지음, 생각의힘(2016)


태그:#마녀, #마녀사냥, #중세, #근대, #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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