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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평생 마신 술의 양

발랑리 토굴 막사 앞에서 기자
 발랑리 토굴 막사 앞에서 기자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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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생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언젠가 아들이 내 주량을 말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가 평생 마신 술의 양은 아마 소주 한 박스도 안 될 겁니다."

내 삶을 곁에서 지켜본 아들의 말이라 틀리지 않을 것이다. 우선 나는 체질적으로 술이 맞지 않았다. 그래서 웬만하면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집에서 기제사를 지낸 다음 음복술은 냉장고에 저장되다가 아내의 조리에 쓰이거나 쉬어 버려지곤 했다.

이름난 문장가들은 대체로 술을 즐겼다는데 나는 애주가가 아니라서 아직도 좋은 글을 쓰지 못하고 있다. 아무튼 나는 술을 되도록 멀리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가까운 사람들은 이런 나의 습성을 잘 알고 있다.

나는 학훈단(현재 학군단, ROTC) 7기생으로 1969년부터 1971년까지 전방 보병부대에서 2년 남짓 초급장교로 근무했는데, 후반 1년은 주로 파견 캡(CAP) 소대장으로 보냈다. 그 무렵 파견소대의 사고 원인은 대체로 음주가 발단이었다. 특히 파견소대장의 상습적인 음주는 민폐 및 대민사고를 유발했다. 그런 사고가 나면 대대장이나 연대장은 술을 먹지 않은 초급장교를 물색했고, 그 결과 으레 내가 가장 먼저 발탁되곤 했다.

초급장교로 파견대장을 한다는 것은 거기에 책임도 따르지만, 파견부대만은 자기 소신대로 부대를 운영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의 군대생활 후반기 1년은 비교적 편하고 자유롭고 부대원들의 복지 향상에 최선을 다했다(이 부분은 내가 말할 문제는 아니고 부하 소대원들이 평가해야 할 테지만…).

산중 토굴 막사

1971년 초겨울 나는 상급부대의 명령으로 대대 직할소대 병력을 이끌고 경기도 파주군 광탄면 발랑리 인근의 금병산 길목을 지키는 산중 토굴 막사로 갔다. 막사에 도착하고 보니 산중 토굴 막사로 그 시설이 침통하기 짝이 없었다. 꼭 빨치산 근거지와 같은 컴컴한 토굴로 대낮에도 석유등불을 켜고 지내야 했다.

그때 우리 부대(1캡)의 주된 임무는 야간 무장공비들의 침투로를 경계하는 일로, 낮에는 잠을 자고 밤에는 올빼미처럼 침투 예상로에서 밤새 잠복 근무를 했다. 이튿날 아침 야간 잠복근무조가 철수하면 그제야 소대원들은 내무반 막사에서 잠을 잤다. 토굴 막사 안은 난로를 피웠기에 추위는 견딜만 했지만, 땅에서 솟아오르는 습기를 막고자 맨 바닥에는 짚을 깔고 지냈다. 그러다 보니 목이 아플 정도로 먼지 공해가 몹시 심했다.

그 며칠 후 나는 일일결산 시간 때 막사 환경 개선책으로 내무반장과 분대장에게 지시했다. 민간인 마을로 내려가 벼 짚을 얻어다가 그걸로 멍석을 짠 뒤 맨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매트리스를 깔라고. 그들은 일제히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일주일 쯤 지난 후 내무반 막사로 가자 바닥에 멍석이 깔려 있는 등, 먼지 공해가 거의 없었다. 그동안 소대원들은 멍석을 짠다고 법석을 떨지도 않았는데…. 내무반장에게 연유를 물었다.

"내무반장! 어떻게 된 거야?"

그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소대장님은 그냥 모른 척하세요."
"뭐라고?"

발랑리 시절 캡 소대원들과 함께(1971. 12. 기자는 뒷열 왼쪽에서 네번째다).
 발랑리 시절 캡 소대원들과 함께(1971. 12. 기자는 뒷열 왼쪽에서 네번째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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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석을 업어오다

내무반장이 그간의 경위를 얘기했다. 내가 마을에서 짚을 얻어 멍석을 짜라고 지시한 다음날 아침 소대원 세 사람이 마을로 가서 짚을 얻었지만, 미처 짚은 열 단도 구하지 못했다. 이미 추수가 끝난 뒤인지라, 마을사람들은 남은 짚은 소 먹일 것이라며 많은 짚을 주지 않더라고 했다.

그런데, 어느 한 집 뒤꼍에 멍석이 네 개나 가로로 묶여 있더란다. 그래서 그날 밤에 그 가운데 하나를 업어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무반장은 멍석 하나 짜는데 짚도 엄청 들뿐만 아니라, 최소한 두어 사람이 열흘은 바짝 달려 매이어야 하나 짤 수 있다는 얘기를 했다.

나는 그의 '모르는 척하라'는 건의에 더 이상 입을 닫았다. 그해 겨울을 그 산중 막사에서 지냈다. 이듬해 봄 한밤중에 관할 수색중대장에게 일일보고를 끝내자 곧 상급부대 명령을 전달했다.

"박 중위! 명일 아침 10:00에 1캡을 떠나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비암리 막사로 부대 이동하시오."

부대 이동 명령은 꼭 하루 전 한밤중에, 그것도 이튿날 오전 내로 이동 완료토록 명령했다. 다음날 아침 잠복근무자 철수 후 나는 군장검사 겸 일조점호를 마친 뒤 부대원들에게 이동준비를 시켰다. 부대원들은 다소 갑작스러운 이동 명령에 놀라더니 곧 체념한 채 배낭을 꾸렸다. 그러면서 그네들이 흔히 하는 말, "X퉁소를 불어도 세월은 간다"라는 말로 푸념을 하면서…. 나는 내무반장에게 말했다.

"멍석 주인에게 돌려주고 '그동안 잘 썼다'는 인사도 하고 오라."

그는 이 바쁜데 그만 다음 부대에게 인계하고 가자고 했다.

"안 돼! 즉시 갖다 줘."

그는 그 멍석을 업어온 두 부대원을 불러낸 뒤 가져올 때처럼 등에 메고서 산 아래 마을로 내려갔다.

비암리 시절 소대원들과 함께(1972. 3. 뒷열 모자 쓴 이가 기자)
 비암리 시절 소대원들과 함께(1972. 3. 뒷열 모자 쓴 이가 기자)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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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양심적인 부대(?)

우리 1캡은 비암리 막사로 이동한 뒤 다시 새살림을 꾸렸다. 막사 안이 발랑리 막사와 마찬가지라 나는 이번에는 멍석 대신에 산에서 나무를 베어오게 한 다음 그것을 막사 바닥에 침대처럼 엮은 뒤 그 위에 매트리스를 깔게 했다.

그 며칠 후 관할 수색중대장이 시찰 한 뒤 나무 침대를 우수사례로 사단 전 캡소대에 권장사항으로 전달했다. 당시 캡소대는 경계가 가장 큰 임무라 아래 민간마을에 첩보전화가 가설돼 있었다. 나는 그 전화 점검 겸 전화가 놓인 리장 집에 인사를 가자 주인이 대단히 반겨 맞았다.

"이번 부대는 발랑리에서 왔소?"
"그렇습니다."
"매우 양심적인 부대라고 그 마을에 사는 우리 사돈이 칭찬하더만요."
"네?"

이장은 사돈의 이야기를 전했다. 지난 초겨울 군인들이 발랑리 사돈 집에 와 짚을 한 짐 달라고 해 두어 단밖에 주지 않았더니 이튿날 뒤꼍의 멍석이 없더란다. 사돈은 뒷산 군인들의 소행으로 지레 짐작하고 부대로 올려가려고 하다가 군인들이 얼마나 추웠으면 그랬을까 하고 포기했단다. 그런데 까마득히 잊었던 그 멍석을 얼마 전 부대 이동 날 아침에 그 바쁜 와중에도 돌려주고 가더란다. 그 부대가 이번 자기 마을에 온 부대가 아니냐고 물었다.

"맞습니다."

나는 대답을 하고는 겸연쩍어 뒤통수를 긁적였다.

나는 1972년 6월말 그 캡소대에서 전역했다. 내가 그 부대에 근무하는 동안 대민지원사업을 많이 했다. 특히 그해 비암리 마을 모내기는 우리 부대원들이 많이 도와주었다.

그새 45년의 세월이 지났다. 몇 해 전, 그때가 그리워 그곳 일대를 둘러봤더니 그새 상전벽해가 돼 있었다. 우리 부대원들이 밤을 지키던 산기슭은 이제는 골프장이 되거나 유원지로, 눈을 몇 번이나 비벼도 옛 모습을 다시 찾아볼 수 없었다.

그때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전우들이 그립다. 그들도 이제는 모두 일흔 안팎의 늙은이가 되었으리라. 지나가 버리면 모두가 아름답다. 설사 아픈 추억조차도.


태그:#군대생활, #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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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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