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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규는 일반 고등학교에 다닙니다. 날마다 해야 하는 보충수업과 야자, 두 달 반 동안 고민한 제규는 담임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정규수업 끝나면 집에 가서 밥을 하고 싶다고요. 고등학교 1학년 봄부터 식구들 저녁밥을 짓는 제규는 지금 2학년입니다. 이 글은 입시공부 바깥에서 삶을 찾아가는 고등학생의 이야기입니다.  -기자 말 

제규가 만든 파스타.
 제규가 만든 파스타.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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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차남은 여덟 살, 몸에 열이 많다. 잘 때는 머리카락이 젖도록 땀을 흘린다. 아토피가 조금 있어서 다리를 긁느라 쉽게 잠들지 못 하는 날도 있다. 날씨가 후텁지근해지면, 꽃차남이 자는 방에 에어컨부터 켠다. 1시간쯤 지난 뒤, 나는 방에 들어가 본다. 아이의 고른 숨소리를 확인하고는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연다. 7월 15일, 금요일 밤도 그랬다.

잠자리는 뽀송뽀송했다. 그러나 꽃차남 베개는 축축했다. 숨소리도 고르지 않았다. 자는 척, 숨죽인 것 같았다. 나는 "우리 꽃아기, 아직 안 자네?"라고 겨우 말했다. 꽃차남은 흐느꼈다. 내 품으로 파고들면서 "엄마가 죽을까 봐"라고 했다. 꽃차남은 할아버지 장례식을 통해서 알고 있다. 다시 만날 수 없고, 마음 속에만 남는 게 죽음이라는 것을.   

그날 나는 아랫니의 양쪽 어금니 4개를 뺀 자리에 임플란트 수술을 했다. 말할 기운도 없었다. 입꼬리는 찢어지고, 얼굴은 퉁퉁 붓는 중이었다. 얼음 팩을 양 볼에 대고는 손수건으로 동여맸다. 어릴 때 만화영화 <톰 소여의 모험>에서 본 적 있는 모습, 고자질쟁이 동생 시드가 열이 나면 폴리 이모는 이렇게 싸매줬었지. 한 마디로 밉상이었다.

금, 토, 일 중에서 가장 재밌는 일을 골라 쓰겠다던 꽃차남은 엄마가 수술한 얘기를 썼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알게 된 한 가지. 사람은 죽으면 다시 못 만나고 사람들 가슴 속에만 남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엄마 죽을까 봐 걱정했다.
▲ 초등 1학년, 꽃차남이 쓴 일기 금, 토, 일 중에서 가장 재밌는 일을 골라 쓰겠다던 꽃차남은 엄마가 수술한 얘기를 썼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알게 된 한 가지. 사람은 죽으면 다시 못 만나고 사람들 가슴 속에만 남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엄마 죽을까 봐 걱정했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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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규야! 미안한데, 아빠는 일 있어서 나가야 하거든. 네가 엄마랑 있으면 안 돼?"

토요일 오전 8시, 죽을 끓이고 난 남편이 말했다. 주말마다 나가서 노는 제규는 난처한 얼굴로 "지금 밖에서 주형이(친구) 기다려요"라고 했다. 1분쯤 지났나. "알았어요. 못 간다고 할게요"라고 하면서도 거울을 보고 옷을 입었다. 자식에게 짐이 되다니, 절대 원하는 바가 아니다. 나는 최대한 명랑한 목소리로 괜찮으니까 놀다 오라고 했다.

꽃차남은 친구 시후네집 가고, 나는 동생 지현을 만나서 치과에 갔다. 선생님은 뾰족한 걸로 내 입술과 턱을 찌르면서 아프냐고 물었다. 어금니 수술은 신경과 연결되어 있어서 묻는 절차라고 했다. 아팠다. 찢어진 입술도 아팠고, 드릴(또는 망치)로 뭔가를 박아놓은 어금니 자리도 아팠다. 선생님은 인상을 못 펴는 내게 "수술 잘 됐어요"라고 했다.

구시대의 산물인 통금 시간. 우리 집에는 있다. 토요일에는 오후 6시 전에 들어와서 저녁밥을 먹어야 한다. 식구는 달랑 네 명, 그 중에서 성별이 다른 한 사람은 <무한도전> 열성팬. 본방 할 때 밥상 차리면 단식을 해버리기 일쑤다. 제규와 남편은 보통 통금 시간 직전에 온다. 그날 제규는 오후 3시에 왔다. 연두부와 바지락을 사들고서.

"엄마,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없는데."
"뭐라도 먹어야죠. 먹기 싫다고 안 먹으면 어떡해요?"
   
우리 엄마 조팔뚝 여사도 임플란트를 했다. 엄마는 수술 끝나고 곧바로 집에 와서 큼지막한 상추쌈을 먹었다고 한다. 그런 괴력의 식성을 가진 사람의 딸로 태어난 나는 끄덕 하면 입맛을 잃었다. 가마솥 뚜껑을 열자마자 풍기는 밥 냄새가 싫다고, 돼지고기 누린내가 싫다고, 장마철 냄새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고, 갖은 핑계를 대고는 안 먹었다.

제규도 어릴 때는 까다롭고 입이 짧았다. 나는 "크면, 어차피 혼자서 먹잖아"라며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밥을 먹여주었다. 남편은 숟가락이 비행기인 것처럼 "위이잉" 효과음을 내면서 떠먹였다. 그러니 제규는 젓가락질도 제대로 못 했다. 스스로 밥 하면서부터 거짓말처럼 젓가락질이 발라졌다. 무슨 음식이든 가리지 않고 잘 먹는 청소년이 되었다.    

제규가 만들어준 연두부. 임플란트 수술한 나에게는 딱 맞는 음식이었다.
 제규가 만들어준 연두부. 임플란트 수술한 나에게는 딱 맞는 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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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앞에서 성숙한 태도를 취하는 제규는 부엌으로 갔다. 김치를 꺼내서 자디잘게 썰었다. 참기름을 두른 연 두부에 김치를 올렸다. 내 앞에 쓱 내려놓으면서 "먹을 만 할 거예요"라고 했다. 맛있는 냄새가 났다. 한 숟가락을 먹었다. 씹을 필요가 없었다. 부드럽게 넘어갔다. 접시를 깨끗하게 비웠다. 제규는 먹고 싶은 거 있느냐고 물었다.

"응, 파스타."

자고로 소녀(여자)들은 달달하거나 느끼한 음식을 먹어줘야 한다. 생리할 때, 또는 우울하거나 힘든 일이 있을 때. 그때 먹는 파스타가 정통 이탈리아식이면 곤란하다. <박찬일의 파스타 이야기>를 보면, 파스타에 소스가 '묻어' 있기만 한 게 진짜 이탈리아 파스타. 그러나 여성 호르몬의 지배를 받을 때 먹는 파스타는 소스에 푹 파묻혀 있어야 한다.  

제규는 "파스타는 좀 어려워요"라고 했다. 하긴, 요리를 시작하고는 소스를 산 적 없다. 직접 만든다. 면도 맛있게 삶는 법을 연구한다. 라면도 설익었을 때 먹는 걸 좋아하니까 파스타 면도 살짝 덜 익은 '알 덴데'를 선호한다. 제규에게 파스타 만들기의 어려움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몇 개 밖에 없는 접시 중에서 근사한 걸 고르느라 애먹는다. 

"제규야! <내 식탁 위의 책들>(정은지 저) 읽었지? 그 책 쓴 작가는 1년 내내 파스타를 먹으면서도 돈 주고 사 먹는 일은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잖아. 그런데 추천사를 쓴 박찬일 셰프는 이탈리아 음식을 하잖아. 파스타 안 사 먹는다는 세계관을 인정하잖아. 경의를 표한다고 써 놨고. 너는 어떻게 생각해?"

"내가 뭐라고 말 할 자격이 있는 건 아니잖아요. 진짜 주방에 서서 일해 본 적도 없고요. 근데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도 파스타는 못 사 먹어요. 돈 없잖아요. 엄마가 레스토랑 데려가서 사 줘야 먹는 음식이에요." 

나는 주로 동생 지현과 둘이 파스타를 먹으러 간다. SNS를 하지 않지만, 음식이 나오면 사진을 찍는다. 집에 돌아오면, 저녁밥상에서 파스타 사진을 보여준다. 제규는 그대로 따라해 본다. 그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건 '청양크림 파스타'. 크림에 파묻힌 파스타 위에는 칼칼한 청양고추가 있다. 느끼하고 알싸해서 더할 나위 없이 개운한 파스타였다.   

청양크림 파스타. 느끼한 크림 소스에 매운 청양고추. 먹고 나면 뒷맛이 깔끔하다. 제규는 레스토랑에 가서 먹어본 적은 없다. 내가 먹으러 가서 찍은 사진을 보고는 따라 만들었다.
 청양크림 파스타. 느끼한 크림 소스에 매운 청양고추. 먹고 나면 뒷맛이 깔끔하다. 제규는 레스토랑에 가서 먹어본 적은 없다. 내가 먹으러 가서 찍은 사진을 보고는 따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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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규는 할머니 집에서 가져온 오이로 피클을 담갔다. 완전 맛있었다. 우리는 저 많은 걸 한번에 싹 먹었다.^^;;
▲ 피클! 제규는 할머니 집에서 가져온 오이로 피클을 담갔다. 완전 맛있었다. 우리는 저 많은 걸 한번에 싹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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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규는 피클도 직접 담갔다. 김치도 담가봤으니까 두려움은 없었다. 마침 집에는 할머니의 텃밭에서 따온 싱싱한 오이가 있었다. 바질이랑 월계수 잎을 넣고 물을 끓였다. 거기에 소금과 설탕을 넣으면 물이 바르르 끓는 지점이 온다. 그때 식초를 넣었다. 오이도 미리 소금에 바락바락 씻어서 적당한 크기로 잘라 놨다. 팔팔 끓인 물을 오이에 부으면 피클 완성!

"엄마, 원래 피클 담글 때는 피클링 스파이스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 집에는 없잖아요. 그냥 빼고 했거든요. 근데 내 인생 최고의 요리였어요. 완전 맛있게 됐어. 나중에 피클 장사 할까요? 요리 배우러 호주 갈 자신도 없어졌는데. 영어도 못 하고요. 돈 모아서 푸드 트럭이라도 먼저 해보고 싶어요. 근데 누가 안 사 먹겠지?"

어른이 된 제규가 우리 동네에 같이 산다면 좋을 것 같다. 자기 앞가림을 하며 사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뿌듯함 그 자체겠지. 푸드 트럭을 하든, 작은 식당을 하든, 제규가 만드는 음식이라면, 날마다 사 먹으러 갈 거다. 그러나 한국의 주방에서 일한다는 건 참고 견뎌야 할 것들 투성이. 외국인 노동자보다 노동 시간이 길고, 하대 받는 것도 일상이라는데.

다행이라면, 제규는 앞날을 생각하며 근심 걱정에 휩싸이지 않는다. 하루하루를 산다. 학교에 가면 반드시 하는 세 가지 일. 첫째는 틈틈이 졸기. 둘째는 저녁 메뉴 정해서 장 볼 식품 정하기. 셋째는 전날 한 음식 사진을 프린트해가서 레시피 노트 쓰기. 세 가지를 마치고도 시간이 남을 때는 어떡할까. 가끔씩은 충실한 자세로 수업을 들을 때도 있겠지.

시금치 파스타. 원래 이탈리아 사람들이 먹는 파스타에는 소스가 '묻어' 있기만 한단다. 그러나 나는 파스타 면이 소스에 풍덩 빠져 있는 게 좋다. 제규가 엄마 취향을 저격해서 만들었다.
 시금치 파스타. 원래 이탈리아 사람들이 먹는 파스타에는 소스가 '묻어' 있기만 한단다. 그러나 나는 파스타 면이 소스에 풍덩 빠져 있는 게 좋다. 제규가 엄마 취향을 저격해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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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집 텃밭에서 따온 가지를 얇게 썰어서 올리브유에 구워서 꽃처럼 말았다고 한다. 어금니 없는 나한테 딱 맞는 요리. 맛있었다.
▲ 가지 시금치 샐러드 할머니 집 텃밭에서 따온 가지를 얇게 썰어서 올리브유에 구워서 꽃처럼 말았다고 한다. 어금니 없는 나한테 딱 맞는 요리.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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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임플란트 수술 하기 전날에는 시금치 파스타를 먹었다. 제규는 먼저 시금치를 데쳤다. 채소 육수에 올리브유, 우유, 시금치 등을 넣어서 믹서기에 갈았다. 파스타 면을 삶기 위해서 소금 한 숟가락을 넣고 물을 끓였다. 그 틈에 할머니네 텃밭에서 따온 가지를 얇게 썰어서는 올리브유에 구웠다. 꽃처럼 말았다. 그래서 만든 게 시금치 파스타와 샐러드.

"우와! 시금치 샐러드 안에 들어있는 가지 맛있다. 어금니가 없는 엄마 먹으라고 만든 거야? 감동했다야."
"그냥 한 건데요. 어차피 내일 수술하면 어금니 생기잖아요."

제규는 오이 피클을 끝내주게 담글 줄 알고, 파스타도 여러 종류를 요리한다. 그래도 모르는 게 있다. 임플란트 수술 끝나면 바로 새 이가 생기는 게 아니다. 그날 나는 파스타를 한 입 밖에 못 먹었다. 잇몸이 너무 아팠으니까. 내 속도 모르는 제규는 매콤하게 바지락을 끓였다. 다진 새우와 달걀, 야채로 반죽하고 모양내서 찜기에 찐 어묵을 내왔다.

남편은 <무한도전>할 때, 집에 왔다. 나는 여전히 <톰 소여의 모험>의 고자질쟁이 시드처럼 양 볼에 얼음 팩을 대고 손수건을 동여맨 상태. 남편은 제규한테 "엄마한테 저녁 뭐 해줬어?"라고 물었다. 철근도 씹어 먹을 수 있는 건강한 치아를 가진 열여덟 살 소년은, 임플란트 수술한 다음 날의 고통을 알지 못한다. 그저 해맑았다.

"<무한도전> 하기 전까지요, 엄마한테 네 가지 요리 해드렸어요. 연 두부하고 파스타 했고요. 얼큰한 바지락 국물도 하고 어묵도 직접 만들었어요."    

알리오 올리오 파스타. 임플란트 수술한 다음 날에 먹기에는 무리. 한입 먹고는 아파서 못 먹었다.
 알리오 올리오 파스타. 임플란트 수술한 다음 날에 먹기에는 무리. 한입 먹고는 아파서 못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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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걀말이 같지만, 제규가 직접 만든 어묵. 제규는 이날 한꺼번에 네 가지 요리를 했다. 그 중 마지막이 어묵. 아들이 한 거니까 먹긴 먹었다. 그치만 속으로 울었다. 임플란트 수술한 자리가 아팠다.
▲ 어묵 달걀말이 같지만, 제규가 직접 만든 어묵. 제규는 이날 한꺼번에 네 가지 요리를 했다. 그 중 마지막이 어묵. 아들이 한 거니까 먹긴 먹었다. 그치만 속으로 울었다. 임플란트 수술한 자리가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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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이탈리아 파스타는 소스 별로 없어요, #임플란트 수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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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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