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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이라는 전쟁 영화 한 편이 개봉 전부터 연일 화제다. 제작사는 물론 각종 언론, 그리고 인천시까지 나서 홍보마케팅에 열을 올리고 있다. 헐리우드 톱스타 리암 니슨은 그가 맡은 배역으로 벌써 영웅으로 미화되고 있다. 물론 영화의 스토리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는지 아직 알 수 없다.

영화의 성공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인천상륙작전'이라는 말만으로도 치가 떨리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인천월미도원주민귀향대책위' 주민들이다. 이들은 1998년 이후 국방부와 인천시 등에 민원을 제기하면서 진상규명을 위해 천막 속에서 20여 년을 보냈지만 해결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미군이 투하한 네이팜탄의 불바다 속에서 가족을 잃고 집을 빼앗긴 채 떠돌이 신세로 전락한 이들의 속사정을 꺼내 놓으려 한다. 기자는 2012년~2014년까지 문병호 의원실 국회 정책보좌진으로 근무하면서 대책위 대표와 주민들을 만나며 이들의 속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참고 자료는 '월미도사건 진상규명 및 피해자 보상에 관한 특별법' 제정에 관한 토론회 보고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결과보고서를 인용했다. -기자말

 1950년 9월 10일 월미도 폭격 당시 상공에서 바라 본 불바다 전경
 1950년 9월 10일 월미도 폭격 당시 상공에서 바라 본 불바다 전경
ⓒ 진실화해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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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8년 3월 13일 진실화해위원회는 '월미도 미군 폭격 사건'을 입증하는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한국전쟁 중인 1950년 9월 10일, 미 해병대 소속 항공기가 인천 월미도를 집중 폭격하여 월미도 거주 민간인들이 집단희생(제노사이드)됐다는 내용이다.

당시 미군은 95개의 네이팜탄을 월미도 동쪽 지역에 대량 투하하고 로켓포와 기관포를 무작위로 사격했다. 이 집중 폭격으로 건물, 숲 등과 함께 민간인 거주 지역이 완전 파괴됐다. 사건의 희생자는 약 100여 명에 이른다. 대책위 주장에 따르면 미군이 임시 매장된 시체마저 불도저로 밀어버려 신원조차 알 수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런 이유로 진실화해위에서 희생자로 인정된 사람은 10여 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신청인들은 억울하게 희생된 가족들의 진실규명도 못 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인덕 대책위 대표는 "월미도 주민들은 전쟁의 혹독한 피해를 보고도 그 후에 지역이 군사기지가 되면서 유족과 원주민은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신세로 전락했다"고 전했다.(관련 기사 : "은폐된 월미도 사건, 전쟁범죄로 국가 배상해야")

월미도 거주민 제노사이드, 인천상륙작전의 '민낯'

 네이팜탄 투하로 폐허가 된 월미도 전경
 네이팜탄 투하로 폐허가 된 월미도 전경
ⓒ 진실화해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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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군 본부는 민가와 300m 떨어진 곳에 요새화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미군은 민가를 조준해 무차별 폭격했다. 새벽 6시경 네이팜탄이 투하됐다. 잠자다 속옷 바람으로 대피했다. 대피한 사람들은 미군의 기총소사를 피하려고 온몸에 진흙을 발라 위장할 정도였다. 다음날 집집이 시체를 임시 매장했다. 그러나 폭격이 다시 시작돼 결국 집을 떠나야 했다." (당시 월미도 주민이었던 유경례씨 목격 진술)

"폭탄이 떨어지자 온 동네가 불바다가 되었다. 폭격 당일 아침에 사방에 불이 붙자 서로 껴안고 타죽었다... 함포 파편이 동생 복부에 박혔고 결굴 과다출혈로 죽었다... 아버지와 할머니, 사촌여동생이 갯벌로 뛰는데 비행기가 날아와 무차별 기총소사를 했다고 한다." (진실화해위 목격자 진술 목록)

진실화해위 보고서에 따르면 '월미도 미군 폭격 사건'의 주요 쟁점은 미군의 무차별한 제노사이드였다. 이 사건은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에 앞서 월미도를 점령하려는 작전에서 발생했다. 맥아더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유엔군은 상륙작전을 통해 북한의 점령 상황을 뒤집으려했다. 당시 월미도는 북한 인민군이 주둔했던 인천의 관문으로 반드시 무력화해야 할 전략적 위치에 있었다.

중요한 점은 미군이 대량 폭격 당시 월미도 민간인 거주시설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는 의혹이다. 조사관은 "미군은 상륙작전에서 인민군의 예상치 못한 반격으로 인한 자국 군인의 피해를 예상해 모든 불확실성을 없애려는 작전을 세운 것으로 추정한다"며 "당시 전쟁 상황상 군사적 필요와 전략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더라도 폭격 중 식별할 수 있었던 민간인 희생을 줄이려는 조치가 필요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민간인 희생을 줄이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도 없이 월미도 전체를 무차별 집중 폭격하고 육안으로 식별 가능한 고도에서 주민에게 기총소사까지 한 것은 국제인도법, 전쟁법의 민간인 면제규범에 의한 민간인 구별의 원칙, 비례의 원칙에 위반된 작전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미합동참모본부는 반대했다

 1950년 9월 10일 미군의 공군 공격상황 명령 기밀문서
 1950년 9월 10일 미군의 공군 공격상황 명령 기밀문서
ⓒ 진실화해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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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위 보고서는 말미에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애초에 무모한 작전이었음을 언급했다. 조사관은 "맥아더가 상륙장소로 인천을 선택하자 미합동참모본부가 이에 대해 작전 실행 직전까지 계속 반대했던 일은 잘 알려져 있다"며 "본부는 '작전 성공의 불확실성에 대한 염려' 때문에 반대했는데 그 요인 중 하나가 월미도였다"고 설명했다.

이런 이유로 맥아더 장군은 월미도 전체에 은폐된 인민군의 방호시설을 없애려 무차별 폭격을 감행했다고 보고서는 밝혔다. 조사관은 "9월 10일~12일 네이팜탄으로 섬 전체를 소각하고 13일~14일에는 함포지원부대로 포격, 15일 아침에도 상륙지원사격을 하도록 계획해 기습을 포기했다"고 파악했다.

조사관은 보고서 '소결'에 부치며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과 월미도 폭격작전의 군사적 필요성이 인정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런데도 "월미도 동쪽에 민간인 500여 명이 거주하고 있음을 사전에 알고 있었던 가능성이 높음에도 이 지역에 집중적으로 폭격을 감행했다면 이는 결코 정당화하기 어렵다"고 단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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