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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성대 성터에는 곳곳에 왜성의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 왜성의 특징 중 한 가지는 성벽이 지면에서 수직이 아니라 비스듬하게 쌓여진다는 점이다.
 자성대 성터에는 곳곳에 왜성의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 왜성의 특징 중 한 가지는 성벽이 지면에서 수직이 아니라 비스듬하게 쌓여진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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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자성대"라고 부르는 부산진지성(釜山鎭支城)은 부산광역시 기념물 7호로 지정되어 있는 문화유산이다. 그런데 이 성터는 우리나라 안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문화재가 아니다. 성을 쌓은 사람들이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들이기 때문이다. 왜성(倭城)이라는 말이다.

서문 앞 안내판은 '지금 (이곳에) 남아 있는 성지(城址, 성터)는 임진왜란 중인 1593년(선조 26) 일본군이 주둔할 때 모리휘원(毛利輝元, 모리 테루모토)이 부산진의 지성(支城, 성 밖에 별도로 축성한 작은 성)으로 쌓은 일본식 성'이라고 해설한다. '부산진성을 모성(母城)으로 볼 때 그 자식의 성이라는 뜻에서 자성대(子城臺)라고도 부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냥 '자성'이라고 하지 않고 '대(臺)'를 붙여 '자성대'라고 하였을까? 안내판은 그에 대해서도 해설해준다. '산 정상에 자성(子城)을 만들고 장대(將臺)로 사용했다는 데서 (자성대라는 호칭이) 나왔다고 한다.'라는 문장이 그것이다. 또 안내판은 '그러나 원래 이곳에는 (일본인들이 왜성을 쌓은 것이 축성의 시초가 아니라) 우리나라 부산진성의 외성이 있었다고도 한다.'라는 부연 설명도 덧붙인다.

부산진지성의 서문.
 부산진지성의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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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끝난 뒤 조선은 왜성인 이곳 부산진지성을 부수어버렸을까? 안내판에 따르면, 부산진지성은 '임진왜란 뒤에 다시 수축하여 부산진첨사영(부산진첨사가 지휘하는 군대의 본부 군영)으로 사용되었다.' 일본군 철수 후 조선군이 왜성을 고치고 더 쌓아 군대 주둔지로 계속 활용했다는 뜻이다.

이 대목은 '(부산진지성의) 성벽은 비스듬히 경사져 있고,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올라가며 나사 모양으로 감돌며 좁혀 올렸다. 일본식 성의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라는 해설과 더불어 부산진지성 성터가 어째서 문화재로 지정되었는지 증언해준다. 요약하면, 왜성은 성벽이 비스듬하게 쌓이고, 위로 올라가며 나사 형태로 감돌며 좁아지는데, 뒷날 조선에서도 일본인들의 성 쌓는 기법을 축성에 일부 활용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 남아 있는 부산진지성이 임진왜란 당시, 또는 조선 후기의 축성 모습을 온전히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안내판은 '일제 때 시가지 정비 계획에 따라 성은 철거되었으며, 이때 자성대 일대의 해명(바다)이 매축(물을 메워 뭍을 만듦)되어 옛모습이 없어졌다.'라고 말한다. 오늘날 답사자들이 보는 진동문(동문), 금루관(서문), 진남대(장대)는 1974년에 복원된 것이다.

왜성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군들은 전쟁 초기부터 왜성을 축조했다. 1592년(선조 25) 4월 14일과 15일에 부산진성, 동래성, 다대포진성을 점령한 일본군들이 곧장 왜성 축성에 착수한 것은 전선에 병력과 물자를 보급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한성(漢城)의 남산과 평양 등지에도 왜성을 축조했다.

일본군의 왜성 축성이 더욱 본격화된 것은 이순신을 비롯한 조선 수군과 전국 각지에서 창의한 의병군의 대활약, 그리고 명군의 참전에 밀려 한강 이남으로 철수한 뒤부터였다. 그들은 임진왜란 기간(1592~1596) 중에 울산 서생포 왜성, 부산 기장군 장안읍 임랑포 왜성, 기장군 죽성리 왜성, 동래 왜성, 부산 왜성, 자성대 왜성, 동삼동 왜성, 구포 왜성, 강서구 죽림동 죽도 왜성, 가덕도 왜성, 안골포 왜성, 웅천 왜성, 거제 영등포 왜성, 장문포 왜성 등을 쌓았다. 그리고 정유재란(1597~1598) 때에도 그들은 울산 왜성, 양산 왜성, 창원 왜성, 거제 왜성동 왜성, 고성 왜성, 사천 왜성, 남해 왜성, 순천 왜성 등을 신축하였다.

그들은 전함의 출입이 용이한 강이나 바다 인근의 높은 지대에 성을 쌓았다. 기본적으로 산꼭대기나 산허리에 본성(本城)을 쌓고, 해안 또는 평지까지 이르는 외곽부 성벽을 설치했다. 성벽은 우리 성처럼 지면에서 수직으로 쌓은 것이 아니라 60~70° 경사지게 축조했다. 또 성벽에 각을 주어 굴곡을 많이 형성시킴으로써 측면 방어에 유리하게 했다. 현재 남아 있는 왜성 중 가장 볼 만한 것은 울산 서생포 왜성이다.


서문 앞에서 보는 부산진지성 안내도를 동선에 맞춰 새로 번호를 붙여 제작했다.
 서문 앞에서 보는 부산진지성 안내도를 동선에 맞춰 새로 번호를 붙여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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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진지성은 서문에서부터 답사를 시작하는 것이 좋다. 진남대는 성에서 가장 높은 지점에 있고, 북문은 복원이 되어 있지 않은 상태인 탓에 출발 지점으로는 애당초 부적절하다. 그렇다면 동문과 서문이 남는데, 동문보다는 서문이 주차하기 쉽고 동선 짜기에 좋다는 점에서 훨씬 추천할 만하다.

부산진지성의 성터가 2단으로 조성되어 있다. 이 특성을 고려할 때에도 서문은 최고의 출발점이다. 서문은 유난히 지대가 낮은 곳에 있어서 만약 동문에서 답사를 시작하면 서문 일대에 왔을 때 내리막으로 갔다가 다시 오르막을 올라야 한다. 동선이 길고 힘들어진다는 말이다. 게다가 서문 밖에 특이한 돌기둥이 있는데, 이를 성 안에서 나오면서 보아서는 생생한 실감을 느끼기에 적합하지 않다.

결국 서문 앞 '부산진지성 안내도'에 매겨져 있는 번호와는 전혀 다르게 답사 순서를 잡아야 한다. 실제로도 안내도의 번호는 답사할 차례를 정한 숫자가 아니다. 서문과 서문 우주석을 나란히 배치하지 않고 그 사이에 동문을 끼워둔 것이나, 서문과 동문 사이에 있는 영가대와 조선통신사 역사관을 동문과 북문 사이에 넣어둔 것만 보아도 그렇다. 안내도에는 부산진지성의 내부가 '(1)서문 (2)동문 (3)서문 우주석 (4)진남대 (5)최영장군 비각 (6)조선통신사 역사관 (7)영가대 (8)북문 (9)배드민턴장 (10)체육시설 (11)화장실' 식으로 소개되어 있다.

서문 좌우에는 '이곳은 나라의 목구멍과 같은 곳이라 서문은 나라의 자물쇠와 같다'라는 글을 새긴 돌기둥이 서 있다.
 서문 좌우에는 '이곳은 나라의 목구멍과 같은 곳이라 서문은 나라의 자물쇠와 같다'라는 글을 새긴 돌기둥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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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1)서문 (2)서문 우주석 (3)영가대 (4)조선통신사 역사관 (5)동문 (6)최영장군 비각 (7)진남대 (8)천장군기념비'의 답사 순서가 짜여진다. 이 여정을 따르면 '부산진지성 서문 및 성곽 우주석(隅柱石)'을 가장 먼저 보게 된다. 부산광역시 기념물 19호인 이 문화유산의 핵심은 우주석, 즉 돌기둥이다. 성문과 성곽은 우리나라 축성 유적에서 흔히 보는 것이지만, 이곳의 것과 같은 돌기둥이 성문 좌우에 설치되어 있는 경우는 희귀하다. 그래서 부산진지성 전체가 기념물 7호인데도 성 내에 있는 '서문 및 성곽 우주석'이 별도로 기념물 19호로 재차 문화재 지정을 받은 것이다. 

이 돌기둥은 부산진지성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돌기둥을 세운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대략 임진왜란 후 부산진지성을 새로 축성할 때 입석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이곳은 나라의 목에 해당하는 남쪽 국경으로, 서문은 나라의 자물쇠와 같다'라는 뜻의 '남요인후(南徼咽喉)'와 '서문쇄약(西門鎖鑰)' 여덟 글자가 두 개의 돌기둥에 각각 네 자씩 새겨져 있는 것이 그렇게 추정하는 단서가 된다. 임진왜란 발발 이전에 두 돌기둥이 세워졌다면 일본군들이 가만히 두었을 리 없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서문과 우주석을 본 후 성터를 오른쪽으로 돌면 이내 영가대(永嘉臺)와 조선통신사 역사관이 나타난다. 영가대는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오갈 때 머물렀던 역사의 현장으로, 먼 항해에 배가 무사하기를 비는 해신제(海神祭)도 이곳에서 지냈다. 따라서 영가대 바로 옆에 조선통신사 역사관을 세운 것은 역사적 의의로 보아 아주 적절한 입지 선정이라 하겠다.

부산진지성 중 동쪽 산허리에서 보는 최영 장군 비각
 부산진지성 중 동쪽 산허리에서 보는 최영 장군 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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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 역사관을 둘러본 다음 앞으로 나아가면 금세 동문이 나타난다. 동문 자리는 서문에 견줘 터도 좁을 뿐더러 바로 앞에 주택들이 난립해 있어 온전한 성문 사진을 한 장 찍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이다. 물론 서문 양 옆에 세워져 있던 것과 같은 의미 깊은 우주석도 없다. 동문이 볼 만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서문이 그만큼 빛나는 존재라는 뜻이다.

동문에서 산책로를 따라 약간 오르막으로 걸으면 왼쪽에 최영 장군 비각이 있다는 이정표가 나타난다. 최영은 임진왜란 당시의 일본군과는 직접적 관련이 없는 인물이다. 하지만 고려 말에 창궐한 왜구를 격퇴하는 데 큰 업적을 남긴 장군이다. 즉, 이곳에서 조우해도 그리 어색할 일은 없다. 이는 수영성에서 안정복 사당과 마주친 것이나 대략 비슷한 경험이다.

최영 장군 사당을 등진 채 앞으로 나아가면 부산진지성에서 가장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는 왜성 흔적들이 나타난다. 돌을 지면에서 수직으로 쌓지 않고 비스듬하게 경사를 두고 축성한 것이 왜성의 특징 중 한 가지라는 사실이 비전문가의 눈에도 고스란히 확인된다. 보통 왜성은 먼 곳에 있어서 구경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고들 생각하는데, 이곳 부산진지성은 부산광역시 중심부에서 일본성 유적을 생생하게 보여주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생각해 보면, 부산을 중심으로 동해 남부와 남해 동부는 임진왜란 7년 내내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었던 '식민지'였다. 그래서 이렇듯 왜성이 대도시 복판에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다.

부산진지성의 장대(將臺, 대장 지휘소) 진남대. 이 성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들이 부산진의 지성(支城)으로 쌓은 왜성으로, 그래서 부산진성을 모성(母城)으로 보고 흔히 이 성을 자성대(子城臺)라 부르기도 한다. 진남대 옆에는 명나라 장수 천만덕의 후손들이 세운 천장군기념비가 있다.
 부산진지성의 장대(將臺, 대장 지휘소) 진남대. 이 성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들이 부산진의 지성(支城)으로 쌓은 왜성으로, 그래서 부산진성을 모성(母城)으로 보고 흔히 이 성을 자성대(子城臺)라 부르기도 한다. 진남대 옆에는 명나라 장수 천만덕의 후손들이 세운 천장군기념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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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성 흔적은 진남대(鎭南臺)로 올라가는 계단 좌우에도 뚜렷하게 남아 있다. 장군의 지휘소를 가리키는 '진남'은 본래 부산진지성 남문의 이름이다. 이곳은 장대(將臺, 성주의 지휘소)였으므로 성내에서 가장 높은 곳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진남대는 서문 우주석과 더불어 성내에서 가장 볼 만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문화재 지정을 받지는 못했다. 정면 5칸, 측면 4칸, 2층 팔작지붕의 이 누대는 1974년 부산진지성을 정비할 때 새로 지은 건물이기 때문이다.

진남대 옆에는 천장군기념비(千將軍記念碑)가 있다. 명나라 장수였던 천만리는 임진왜란 때 이여송 휘하의 총독으로 5군 대장이 되어 아들과 함께 조선에 출정했다. 그는 평양, 곽산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고,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에도 울산 싸움에 참전하여 큰 업적을 이루었다. 하지만 명군이 회군할 때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귀화했다. 조선 조정은 그를 화산군에 봉했고, 사후에는 충장공이라는 시호도 내렸다. 천장군기념비는 일제강점기 때 철거되지만 광복 후인 1947년에 다시 세워졌다. 역시 나라는 '주권'을 가진 독립국이어야 한다.

중국 장수 천만리(千萬里)의 후손들이 진남대 바로 옆에 세운 천장군기념비
 중국 장수 천만리(千萬里)의 후손들이 진남대 바로 옆에 세운 천장군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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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자성대, #부산진지성, #왜성, #모리휘원, #천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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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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