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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장>

반야봉에 도착한 무영객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조복에게 맡겨놓고 내내 마음이 놓이진 않았지만 일이 이 지경으로까지 틀어질 줄은 몰랐다. 기껏해야 실패했습니다, 라는 보고나 아니면 싸늘한 주검으로 변해 있거나 정도를 예상했다.

그런데 일이 틀어져도 묘하게 틀어졌다. 금의위 위관에 사방이라는 직책으로 볼 때 무공이나 일처리 능력이 결코 허투루진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사실 그것은 객관적인 기준이기도 하다. 그런데 조복은 나무에 묶여 있고, 웬 늙은이는 부상을 당했는지 꼼짝 않고 누워 있다. 사태의 추이를 가늠해보니 늙은이는 어쩌면 담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담곤이 조복과 대결하다 부상을 입고 서생과 낭자만 먼저 떠났단 말인가.

무영객은 묶여 있는 조복의 앞에 섰다.

"영, 볼 낯짝이 없게 됐소."

조복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저 늙은이는?"

무영객이 담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준목규운 담곤이오."
"저 자가 왜 여기 있지?"
"먼저 포승부터 풀어주시오."

조복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협봉도가 그의 허리께를 스쳐지나갔다. 포승줄이 툭, 하고 땅에 떨어졌다. 조복은 굳은 몸을 풀면서 그동안의 경과를 얘기해 주었다.

"면목 없소이다."

조복이 다시 한 번 무안함을 표했다.

"무안해 할 것 없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그뿐이니. 우리에겐 저 늙은이가 있고, 그가 많은 것을 말해 줄 것이오."

무영객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이 자는 태어날 때 울지도 않았을 거야. 어떤 사태가 발생해도 감정이 실리지 않은 무영객의 무표정과 무덤덤을 보며 조복은 속으로 생각했다.

무영객은 담곤에게 가서 동여맨 천을 풀고는 상처를 살피고 맥을 짚었다. 그가 어떻게 부상당했는지는 조복에게서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진단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음, 상처가 보기보단 깊군. 동맥을 건드려 출혈이 심해. 이대로 두면 가망이 없겠는걸."

무영객은 담곤의 상처를 자세히 살폈다.

"자네 솜씬가?"
"그렇소."

"날은 깊으나 부위가 넓지 않다……. 들어올 때보다 나갈 때 힘을 주는 검법이군. 손목을 돌리지 않아 검을 빼기가 쉽진 않았을 텐데, 깔끔하게 나온 걸 보니. 팔 힘으로 뺀 게 아니라 상체와 검이 일치되는 섬퇴식이야. 중원의 검술이 아닌데?"

무영객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남방의 검술이요."

조복이 짧게 답했다.

무영객이 품에서 금창약을 꺼내더니 약초와 버무렸다.   

"의술을 알고 있소?"
"의술이라 해야 할지 활인술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그 비슷한 걸 배운 바는 있어."
무영객은 말을 하며 노인을 떠올렸으나 고개를 흔들어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일단 이곳부터 벗어나야 하는 것 아니오?"

조복이 말했다.

"그게 순리이긴 하지만 노인네 상태가 저러니 섣불리 움직일 순 없어. 일단 치료부터 해야 돼."

무영객은 조복에게 경어와 하대를 섞어서 말했다. 그러나 조복은 그다지 거슬리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무영객에게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복종심이 스멀스멀 자라기 시작했다. 

"부상당한 노인네를 놔두고 서생과 낭자가 떠났다는 건 일이 그만큼 급박하다는 걸 말해주고 있다고 봐야지. 우리로써는 노인네를 살려내 서생이 어디로 갔는지를 알아내는 게 급선무야."

무영객은 일어서서 주위를 둘러보더니 노루가 있던 곳으로 갔다. 잠시 후 그는 억새를 한 묶음 베어가지고 와서 담곤의 곁에 앉았다. 조복은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의아했으나 묻지 않았다. 무영객은 억새 줄기를 하나하나 살피며 여남은 개를 골라 가지런히 놓았다.

그 다음 품에서 단도를 꺼내 골라낸 억새의 마디를 잘라내고 끝을 다듬었다. 그는 억새의 마디와 마디 사이를 조심스럽게 끼우며 연결했다. 억새는 매끄러운 마디끼리 연결되어 석 자 남짓의 가느다란 관이 되었다.

무영객이 담곤의 상처에 양손을 얹고 살짝 누르자 피가 배어나왔다. 담곤은 통증에 반응을 하여 으음, 하는 신음을 뱉었으나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무영객은 엄지와 검지의 첫째 마디 사이에 담곤의 핏방울을 넣어 손가락을 떼었다 붙였다를 반복했다. 마치 피의 점도(粘度)를 가늠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무영객이 조복에게 말했다.

"자네 피 좀 줘."
"뭐, 뭐요?"

조복이 이해를 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이 늙은이에게는 피가 필요해. 피를 넣어주어야 살 수 있어. 근데 아무 피가 들어간다고 되는 건 아냐.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피가 맞아야 하지. 대개 서너 사람에 한 명 꼴로 맞아. 우선 자네 피부터 맞춰보자고. 손을 이리 내."

조복이 손을 내밀자 무영객이 품에서 가죽보를 꺼내 침을 하나 꺼냈다. 그는 조복의 손가락을 찔러 핏방울을 내더니 아까처럼 손가락 마디 사이에 넣고 점도를 측정했다.

"흠, 어쩌면 맞을지도 모르겠군."

무영객이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허리에서 수통을 꺼내 물을 손바닥에 조금 따랐다. 그러더니 담곤의 피와 조복의 피를 한 방울씩 떨어뜨렸다. 피는 서로 엉기면서 스며들었다. 그 과정을 무영객은 유심히 살폈다. 

"됐어!"

무영객은 낮게 소릴 질렀다. 그는 가죽보에서 짧고 굵은 침 두 개를 꺼냈다. 침을 들어 불빛에 대고 자세히 보고는 입에 대고 훅훅 불었다. 침에서 미세하게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죽은피를 빼는데 쓰는 삼릉사혈침이다. 무영객은 삼릉침을 갈대의 끝에 연결했다.

"팔을 줘."

조복이 팔을 내밀었다. 무영객은 조복의 팔오금의 불끈 솟은 혈관에 삼릉침을 꽂았다. 열을 세기도 전에 관의 반대쪽 끝에 피가 맺히더니 금세 방울져 떨어져 내렸다. 이를 본 무영객은 담곤의 어깨를 젖혀 운월(雲月)혈 부근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마침내 혈관을 찾은 듯 핏방울이 맺힌 삼릉침을 어깨에 깊숙이 꽂았다. 담곤이 움찔했다.

"손을 쥐었다 폈다 해."

조복이 무영객의 말대로 했다. 조복이 앉아 있고 담곤이 누워 있어 피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자연스레 이동하는데다 침이 꽂혀 있는 손을 쥐락펴락하자 왠지 피가 쏴하니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얼마 동안, 얼마나 빼내야 하오."

조복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시간은 세 식경 내외, 피의 양은 두 사발 정도 될 것 같군. 자네가 몸에는 하등의 지장이 없을 터이니 걱정할 것 없어. 실전에서 가볍게 한 칼 먹어도 그 정도 출혈은 있지 않나."

무영객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하지만 조복은 왠지 개운치 않았다. 이 늙은이를 자기 손으로 부상을 입히고 자기의 피로 살려내다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두 식경 정도 지나자 무영객의 말처럼 담곤의 핼쓱한 낯빛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됐어! 무영객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담곤의 어깨에서 침을 빼냈다. 조복도 팔오금에서 삼릉침을 뺐다.

"업어!"

무영객이 조복에게 명령조로 말했다. 조복은 무영객의 말에 고분고분 따르며 담곤을 업었다.

무영객과 조복은 담곤을 업고 자운헌의 반대쪽 능선을 따라 달렸다. 등에 업힌 담곤은 흔들리는 등판에서 약간씩 정신이 돌아오는지 얕은 신음을 간간히 내쉬었다.

그들은 동이 터올 때까지 달렸다. 대항산맥의 북쪽 능선을 따라 두 시진 반을 갔으니 동쪽 사면으로 산을 내려가면 초무현이나 그 북쪽인 작령현 쯤 나올 것으로 보았다.

초로(初老)의 초부(樵夫) 왕칠은 난데없는 벼락을 맞았다. 그 벼락이라는 게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고 사람에게서 나왔다는 것이 다를 뿐 왕칠의 일상을 느닷없이 구겨놓기는 이도저도 벼락임에 다를 바 없었다.

왕칠은 젊었을 적 낙양에서 대지주의 소작을 부치며 살았다. 말이 소작농이지 대갓집 머슴만도 못한 살림살이였다. 아들 둘 딸 둘을 낳고 그럭저럭 살아보려 애썼지만 맘대로 되지 않았다. 큰딸 첫애는 쌀독을 아무리 박박 긁어도 쌀 한 톨 담기지 않던 어느 가뭄에 제 입이라도 챙기라고 부잣집에 종으로 보냈다.

작은딸은 방년이 될 무렵 고릿적 몇 대 조(祖)가 감투를 썼다는 대감댁에서 연통이 와서 소실로 보내고 말았다. 계집 팔자 뒤웅박 팔자, 모두 제 타고난 운명대로 갈 것이라고 그는 제풀에 체념했다.

그래도 아들놈만큼은 탈 없이 곁에 있기를 바랐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큰아들 놈은 변방에 변고가 일어났다며 나라에서 부역으로 끌고 가더니 십년 동안 감감 무소식였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생사라도 알았으면 덜 답답하겠다 싶어 문턱이 닳도록 관아를 드나들었지만, 소작농 아들 따위의 생사에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막내아들은 제법 종아리가 굵어질 무렵 나는 형처럼 되기 싫어, 이 한마디 남기고는 어느 새벽에 사라졌다. 그 새벽 왕칠은 부시럭거림에 선잠을 깼다. 막내의 길 떠남을 눈치 챘지만 굳이 말리지 않았다. 힘 있는 자의 횡포에 아들놈의 삶이 언제 어떻게 꼬일지 모르는 세상에서 말려본들 자칫하면 원망이나 듣기 십상이었다.

그래, 부디 이 애비 같은 삶은 살지 마라. 멀리 가서, 네 몸 하나 굳건히 건사하며 살아라. 왕칠은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베갯잇에 훔치려고 옆으로 눕는 순간 아내의 어깨가 가볍게 흔들리는 걸 보았다.

그로부터 삼년이 안 돼 왕칠 부부는 대항산 깊은 곳으로 도망쳐 화전을 일구었다. 소작이든 화전이든 끼니때마다 양식 걱정하기는 매한가지만 그저 관의 수탈과 지주의 착취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살맛이 났다. 무엇보다 제 손으로 일해 거둔 수확이 제 입에 온전히 가져갈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거친 땅을 일구고 조악한 집을 짓느라 몸은 더 고생스럽고 손은 갈퀴보다 더욱 억세졌지만 마음은 이리떼를 벗어난 염소처럼 맴맴했다. 왕칠은 화전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운부산의 질 좋은 나무를 숯으로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았다. 살림은 모기주둥이만큼 나아졌다.

어제였다. 그는 숯막에서 질 좋은 참나무숯을 한가마니 꺼내 등짐을 지고 집에 가면서 기분 좋은 상상을 했다. 내일이면 아내와 함께 작령장에 갈 참이다. 아내는 밭에서 일군 푸성귀를 머리에 얹고 자신은 참나무숯을 지게에 지고 사십 리 고갯길을 오르락내리락하겠지만, 가는 길은 오랜만에 대처 구경을 하는 설렘으로, 오는 길은 간만에 살림살이를 장만한 뿌듯함에 발걸음이 가벼우리라. 봄맞이 하고 처음 대처로 나가게 되니 아직 쭈르렁 할매까진 안됐지만 어느새 쪼글해진 마누라도 내심 들떠 있을 것이다.

그런 상상을 하며 초옥에 도착하니 해는 제가 먼저 짐을 풀어놓겠다는 듯 서산에 걸터앉아 열기를 거두고 있다. 일찍 해가 떨어지는 산골인지라 아무리 늦봄이라지만 한기가 설핏 들었다. 왕칠은 등짐을 내려놓고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이내 자신이 몸을 떨게 한 것이 한기 때문이 아니라는 걸 느꼈다. 왠지 모를 서늘함이 초옥을 감싸고 있었다. 그 정체를 알 수 없어 왕칠이 마당에 멍하게 서 있자, 방문이 벌컥 열리며 낯선 사내가 얼굴을 내밀었다.

이윽고 사내는 밖으로 나왔다. 체구가 거대했다. 허리에는 칼까지 차고 있다. 산적인가, 산적이라면 혼자 다니지 않는다. 더구나 이런 식으로 남의 집 방안에 들어가기도 않고, 무엇보다 가난한 화전민의 살림을 털지도 않는다. 왕칠은 더욱 멍해지다가 돌연 한 가지 걱정이 솟구쳤다. 아내, 아내는 어디 있지? 걱정도 잠시, 장대한 체격의 사내 뒤에서 아내의 조그만 체구가 따라 나왔다. 겁에 잔뜩 질린 표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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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월, 수, 금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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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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