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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궁정동에서 '해방의 대서사'를 화폭에 담다

이쾌대의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1948~49)
 이쾌대의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1948~49)
ⓒ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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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서 살펴 본 이여성의 동생 이쾌대 역시 해방 전후 격동기를 이곳 서촌에서 보냈다. 그는 역사와 미술에 조예가 깊은 형을 통해 일찍부터 미술에 관심을 가졌고, 1928년 휘문고보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미술을 시작했다.

휘문고보 재학시절인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여 화단에 데뷔하였고, 1934년부터 5년간 일본에서 공부하였다. 서구적 지성과 방법론이 바탕에 깔려 있었지만 그의 화풍은 지극히 향토적이고 민족적인 색채가 강했다.

귀국 후 조선미술전람회(선전) 등 관변전시회를 반대한 민족적 미술가들과 <신미술가협회>(1941)를 결성하여 활동하였으며 궁정동 그의 집(궁정동 16-3)은 연락사무소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그의 집은 1990년대 초 이곳에 도로가 나면서 완전 철거되어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일제강점기를 이렇게 보낸 뒤 해방을 맞이하여 여러 활동을 하였다. 그 가운데 1948년 봄 <성북회화연구소>를 열어 후학을 양성한 것은 그가 여전히 대한민국 화단에 영향을 끼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 하나의 역작을 남겼는데 당시 해방정국의 대서사를 인민들의 모습으로 형상한 '군상시리즈'다. 특히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1948년 6월 미 공군이 독도 인근에서 고기를 잡고 미역을 채취하던 인민들을 폭격해 수십 명이 몰사한 사건에 충격을 받아 그린 <군상Ⅳ>(1948)이다.

1948년 일반인들에 대한 미군 독도폭격을 형상한 《군상Ⅳ》(1948년 추정)
 1948년 일반인들에 대한 미군 독도폭격을 형상한 《군상Ⅳ》(1948년 추정)
ⓒ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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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완성된 군상시리즈는 1949년 제4회 미문협(조선미술문화협회)전을 통해 우리들 시야에 들어왔고, 이에 대해 김용준은 이쾌대를 "서구적 지성과 동양적 감성을 융화시킨 민족성을 앙의(昻意)하는 창작적 열의를 가진 화가"라고 추켜세웠다.

그가 해방을 맞이하고 이렇게 격정넘치는 그림을 화폭에 담을 수 있었던 시기도 잠깐이었다. 1950년 전쟁이 발발하면서 역사는 그에게 선택을 강요했다. 전쟁 발발 후 피난가지 못했던 그는 서울에 남았고 인민군 치하에서 3개월을 보낸 뒤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이 수복되기 1주일 전에 북으로 갈 것을 결심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희망일 뿐 북행길에서 체포되어 포로수용소에 수감되고 말았다

그래서 결국 1950년 11월 11일자로 그가 포로수용소에서 인편을 통해 아내 유갑봉에게 보낸 다음 편지가 우리에게 공식적으로 전해지는 그의 마지막 소식이 되고 말았다.

"한민 모(漢民母) 보오. 오래간만에 내 소식을 알리게 됩니다. … 나의 생사를 모르는 당신에게 이 글월을 보내게 되니…. 신병을 앓는 당신은 몇 배나 야위지 않았소. 안타깝기 한량 없소이다. 한민이, 한식이, 아침저녁으로 아버지께 뽀뽀하는 우리 귀여운 수생이, 그리고 꼬마 한우. 생각할수록 보고 싶소 그려. … 무엇보다 한 푼 없는 당신이 무엇으로 연명하는지. 내 자신이 밉살스럽기 한량 없습니다. … 나는 이 포로수용소에서 나를 두둔하는 친지들의 덕택으로 잘 있습니다. 이곳의 미인(美人) 수용소 소장이 미술을 이해하는 분인 까닭에 화용지와 색채도 구해주셨습니다. …아껴둔 나의 책은 처분할 수 있는 대로 처분하시오. 그리고 책, 책상, 헌 캔버스, 그림틀도 돈으로 바꾸어 아이들 주리지 않게 해주시오. 전운(戰雲)이 사라져서 우리 다시 만나면 그 때는 또 그때대로 생활설계를 새로 꾸며봅시다."

이후 전쟁은 끝났고 그는 민간인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전쟁포로로 취급되었고 정전협정에 따라 남과 북 그 어느 하나에 대한 선택을 강요받았으며, 이 과정에서 그는 북을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순간의 이별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결국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만 것이다.

이쾌대와 유갑봉
 이쾌대와 유갑봉
ⓒ 브런치(brun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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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그에게 붙여진 '월북작가'란 딱지는 그의 가족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합법화하며 참으로 오랜 세월을 괴롭혔다. 하지만 아내 유갑봉은 남편의 유품을 전혀 건드리지 않은 채 40여년을 너무도 깨끗이 보관해 놓았다.

유갑봉의 이러한 눈물 겨운 정성 속에 감추어졌던 이쾌대의 작품이 우리 앞에 나오게 된 것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일부 월북작가들에 대해 해금조치가 이뤄진 뒤였다. 이로써 그의 존재는 문서로 남은 기록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작품을 통하여 남쪽사회에 화려하게 나타난 것이다.

1991년 약 40년 동안 붉게 색칠된 채로 세상에 나오지 못했던 이쾌대의 그림이 냉전시대의 종말과 더불어 세상에 나타났다. 이는 오로지 그의 아내 유갑봉의 눈물겨운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한편 작품 속 여성모델의 상당수 역시 유갑봉 자신이라고 전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남편의 해금 소식도 듣지 못한 채 1981년 세상을 떠났다.

위와 같은 역사의 굴곡과 인간에 대한 사랑 속에서 지켜진 이쾌대의 그림이 세상에 나타나면서 우리 현대미술사의 공백이 아름답게 메워진 것이다.

독도폭격사건과 독도영유권의 상관관계

이쾌대의 대작인 군상시리즈 가운데 <군상Ⅳ>에 있어서 그 창작계기가 되었던 독도폭격은 단지 해방전후 과거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까지도 계속되는 한일간 논쟁이니 좀 더 깊게 알아보기로 하자.

미군의 독도폭격사건에 대한 보도(1948년 6월 19일자 경향신문)
 미군의 독도폭격사건에 대한 보도(1948년 6월 19일자 경향신문)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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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쾌대가 <군상Ⅳ>를 그린 시기는 1948년이다. 즉 전쟁도 나기 전이다. 그런데 그해 6월 독도는 미 공군 93폭격대대의 폭격기 B29 10대에 의해 폭격 당하여 수십 척 선박이 침몰했고, 최소 30~100여 명의 어민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독도는 미국이 폭격연습지로 지정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폭격연습이 아니었다. 어민들 증언에 의하면 저공비행하며 육안으로 식별가능한 거리에서 기총소사까지 하였던 것이다(관련기사 : 1948년 미공군 폭격연습 표적 "어민 150여명 무고한 희생").

이 독도폭격사건에 대하여 우리가 주의 깊게 봐야 할 것이 있다. 독도는 '기본적으로는 한일관계'의 문제이지만 '내용적으로는 한미일관계'의 문제이다. 따라서 독도를 한일관계로만 바라본다면 이 문제의 일면만을 보는 것이다.

일본이 연합국점령 하에 있던 1947년 9월 16일 미국은 독도를 폭격연습장으로 지정하며 그 사실을 일본정부에 알려주었고, 연습 이전에 주민들에게 통보할 것을 약속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런 사실을 알려주지도 않았고, 폭격연습 때도 통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독도는 일본이 연합국의 점령관리 하에 있던 1951년 7월에 또 다시 폭격연습장으로 지정되는데 이때도 마찬가지였다.

이 논리구조는 간단히 말해 '독도는 일본 국내시설 및 구역이므로 훈련구역에서 해제되면 당연히 일본으로 반환한다는 의미'다. 여기서 우리는 일본이 자기 나라도 아닌 오키나와를 미군기지로 조차시켜 놓아 훗날 자신의 영토로 환원시킨 사건을 기억해야 한다. 일본은 독도도 같은 방식으로 돌려받을 계획이었다.

미국무부는 대일강화조약(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1~5차까지의 초안에는 독도가 한국령으로 기술되어 있었다. 하지만 일본의 로비로 미국은 독도를 일본 영토로 포함시키려 했던 것이다.

이에 뉴질랜드와 영국이 미국의 수정에 반대하여 결국 독도는 일본과 한국 어느 영토조항에도 넣지 않고 아예 빼버린 것이다. 미국은 분명히 '독도는 일본령'이라고 일본을 지지했으며, 결코 '독도는 한국령'이라고 말한 바가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이다(관련기사 : 美, 독도문제 책임지고 '독도=한국영토' 입장 밝혀야).


태그:#이쾌대, #독도폭격사건, #유갑봉, #서촌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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