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이 김선달> 포스터.

<봉이 김선달> 포스터. ⓒ 엠픽처스·SNK픽처스


봉이 김선달은 4대강을 망치고 국민 혈세를 축내는 정도의 걸물은 아니다. '고작' 대동강 강물을 팔아먹은 정도의 '피라미'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는 앞으로도 오래도록 대중들의 애정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그의 사기 행각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대중의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청량제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봉이 김선달을 실존 인물로 볼 근거는 없다. 현재까지는 그렇다. 이번에 개봉된 유승호 주연의 영화 <봉이 김선달>에서는 김선달의 실명이 김인홍이었다고 했다. 이 이름은 1906년 <황성신문>에 연재된 <신단공안>이란 소설에서 최초로 거론된 것이다. 이 소설의 네 번째 시리즈인 봉이 김선달 편에서 그 이름이 처음으로 나왔다.

"인조 임금이 등극한 초기에 평안도 평양 등지에서 기이한 남자 하나가 태어나니, 성은 김이요 이름은 인홍이라."

광해군이 실각하고 인조가 등극한 시점에 김인홍이란 남자 아이가 태어났다는 이 구절을 읽으면, 봉이 김선달이 실존 인물인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소설에서 나온 이야기다. 현재로서는 그가 실존 인물이었다고 볼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  

김선달은 허구의 인물

실제로 대동강 강물을 팔아먹을 정도의 사기꾼이 등장했다면, 실록은 아니라도 민담류 서적에는 이름이 한번쯤 거론됐을 만도 하다. 그런 기록도 없는 것으로 보아, 김선달은 조선 후기 사람들이 만들어낸 창작물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실존인물이든 아니든 간에 중요한 것은, 조선 후기 사람들이 봉이 김선달이라는 존재에 깊이 매료됐다는 점이다. 지위가 높은 사람과 부유한 사람들을 절묘하게 골탕 먹이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대중이 열광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만약 조선 후기 사람들이 김선달에게 뜨거운 환호를 보내지 않았다면, 오늘날 우리는 그의 이야기를 접할 기회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계속해서 환호를 보냈기에, 그 이야기가 생명력을 유지하며 오늘날까지 전달된 것이다.

이것은 시대를 초월해 어느 시대건 간에 대중을 매료시킬 수 있는 요소가 김선달 이야기 속에 들어 있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특별히 조선 후기 대중을 매료시킬 만한 뭔가가 그 속에 함께 담겨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조선 후기 사람들이 특히 환호한 이유는 무엇일까?

<신단공안>이 발표되기 이전에 김선달 류의 이야기가 특히 유행한 지방은 평안도다.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여진족이 많이 살았던 이곳은 조선왕조 내내 차별을 가장 많이 받은 지역이었다.

대략적으로 볼 때, 평안도 출신의 과거 급제자는 문관인 경우는 정5품(중앙부서 과장급) 이상으로 승진하기 힘들었고, 무관인 경우는 정3품(국장급) 이상으로 올라가기 어려웠다. 평안도 사람이 장관(정2품)이나 차관(종2품)이 되는 일은 드물었던 것이다. 물론 모든 경우에 꼭 그랬다는 게 아니라, 대체적으로 그랬다는 이야기다.

이런 차별이 관직 승진뿐 아니라 제반 분야에 두루 존재했기 때문에 1811년 홍경래가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고, 평안도 사람들이 그런 울분을 공유했기 때문에 그들이 홍경래의 반란에 대해 뜨거운 지지를 보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신단공안>에서 김선달의 고향을 평안도 출신으로 설정한 것도 그런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신단공안> 속의 김선달은 재주는 비상하지만 백그라운드가 없었다. 집안도 한미한 데에다가 출신지마저 평안도였다. 정상적 방법으로는 도저히 출세할 수 없는 조건을 타고났던 것이다. 그는 금수저가 아니라 흙수저를 물고, 그것도 차별 받는 땅에서 태어난 것이다.

결국 김선달이 택한 것은 세상을 상대로 제대로 사기를 치는 것이었다. 영화 <봉이 김선달> 속의 김인홍은 권력자 성대련(조재현 분)의 농간으로 청나라 군대에 끌려갔다가 개죽음을 당할 뻔했던 일을 계기로 세상에 대한 복수를 결심하지만, 소설이나 설화 속의 김선달은 평안도 출신의 흙수저 인생이라는 점 때문에 사기 행각을 시작했다. 

흙수저 인생에 비관해 사기행각

 구한말의 평양성 모습. 서울 성균관대학교 복도에서 찍은 사진.

구한말의 평양성 모습. 서울 성균관대학교 복도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사실, 김선달의 고향 평안도만 차별을 받은 것은 아니다. 정도는 좀 덜했지만, 함경도·황해도·강원도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랫동안 탐라왕국이란 독립국가였다가 조선시대에 들어 전라도에 편입된 제주섬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선의 경제적 중심지인 전라도나 경상도 같은 곡창지대에서도 차별은 존재했다. 농업 수확을 가장 많이 올리고 땀을 가장 많이 흘리는 지역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이 지역에 대한 차별은 지주층보다는 소작인층에 집중된 것이었다.

평안도·함경도·강원도·제주도·전라도는 그렇다 치더라도, 경상도까지 차별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얼른 믿기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조선 후기 사람들한테는 별로 이상할 게 없는 이야기였다.

조선 시대 당쟁은 16세기 후반에 동인당과 서인당의 대립에서 비롯됐다. 동인당의 핵심적 지역 기반은 경상도였고, 서인당의 지역 기반은 한양·경기·충청도였다.

동인당은 북인당과 남인당으로 갈라졌다. 광해군(재위 1608~1623년) 때 정권을 잡은 북인당은 경상도 서부를 핵심 기반으로 했다. 그런데 1623년 인조 쿠데타(인조반정)로 북인당은 몰락했고, 이에 따라 경상도 서부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소외되지 않을 수 없었다.  

장희빈과 인현왕후가 활약한 숙종(재위 1674~1720년) 때 일시적으로 정권을 잡은 남인당은 경상도 동부를 핵심 기반으로 했다. 그런데 남인당은 자파 출신 왕비인 장희빈의 몰락과 함께 정계에서 밀려났다. 이로 인해 경상도 동부도 차별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래서 17세기 후반 혹은 18세기 초반부터는 경상도 전체에 대한 차별이 시작되었다.

이런 분위기는 1746년 지금의 경북 구미에서 출생한 노상추라는 무관이 평생을 두고 써내려간 일기장에서도 확인된다. <노상추 일기>라 불리는 이 일기장에는, 정부의 인사 발표가 날 때마다 승진자 명단에서 경상도 출신을 찾아보는 노상추의 초조함이 자주 드러난다.

노상추는 경상도 출신이 승진을 많이 해야 자기도 혜택을 입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았다. 그래서 승진자 명단을 뚫어져라 쳐다봤던 것이다. 그가 관료 생활을 한 시기는 비교적 진보적인 정조시대(1776~1800년)였다. 이런 시대에도 경상도에 대한 차별이 심했던 것이다.

개·돼지로 전락한 99%, 김선달에 호응

구한말인 1880년대 초반, 고종이 미국에 시장을 개방하려 하자, 경상도 선비 1만 명 정도가 뭉쳐 <영남만인소>라는 상소문을 제출하며 격렬히 반대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의 밑바닥에는 시방개방에 대한 두려움과 더불어, 이 지역에 오랫동안 존재했던 반정부 정서도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지역에 대한 차별이 그런 정서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조선왕조 5백년이 경과하는 동안에, 평안·함경도는 물론이고 황해·강원도에 이어 전라·경상도까지 차별 받는 땅으로 전락했다. 이런 과정에서 왕조의 권력은 한양·경기·충청에 거점을 둔 서인당으로 집중됐고, 나중에는 서인당의 분파인 노론당으로만 집중됐다.

이것도 모자라 19세기 초반에는 노론당의 몇몇 가문으로 권력이 집중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안동 김씨, 경주 김씨,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가 출현한 것이다. 이로 인해 이들 몇몇 가문을 제외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떤 형태로든 차별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차별이 온 나라 전체의 일이 된 것이다.

이렇게 조선은 99%의 백성이 '개·돼지'로 전락하고 1%의 특권층만이 '인간'답게 사는 기형적 사회로 변해 갔다. 이렇게 양극화가 극심해지고 차별이 보편화되다 보니, 대표적 차별 지역인 평안도에서 태어나 세상을 상대로 통 큰 사기 행각을 벌인 김선달 이야기가 대중의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봉이 김선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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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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