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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유산 진시황제릉
 유네스코 세계유산 진시황제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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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제릉과 병마용갱은 진시황제릉박물원(博物院) 안에 있다. 진시황제릉은 여산원(驪山園) 안에 있고, 병마용갱은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관광객에게 개방되고 있다. 우리는 먼저 진시황제릉을 찾아 여산원 안으로 들어간다. 입구에 진시황제릉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다. 진시황제릉은 병마용갱과 더불어 198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되었다. 이들은 어떤 기준에서 세계유산이 되었을까? 다음 네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인간의 창조성이 발현된 세계 유일의 걸작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진시황 병마용갱을 세계 8대 불가사의라 부른다. 둘째 독보적인 문화와 문명의 전통을 보여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진시황제는 중국을 통일한 최초의 황제고, 황제릉과 병마용갱은 황제의 사후세계 또는 지하세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산이다. 셋째 진나라 시대 건축과 토목사업의 전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넷째 중국의 통일, 사후세계에 대한 인식, 병마용의 예술성 등에서 동시대의 보편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진시황제릉
 진시황제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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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석에서 10분쯤 걸어 들어가면 왼쪽으로 나지막한 야산이 나타난다. 그것이 여산릉으로도 불리는 진시황제릉이다. 산릉 앞에는 1962년 3월 섬서성 문물관리위원회에서 세운 진시황제릉이라는 묘비가 서 있다. 그리고 그 앞에 넓은 마당이 조성되어 있다. 제례 등 행사 때 많은 사람이 모이기 때문에 만들어놓은 것 같다. 이 광장을 지나면 황제릉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우리는 위패 개념의 표지석으로 가 시황제에게 잠시 예를 표한다. 중국사람 중에는 그곳에서 큰절을 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위패 뒤로 난 길을 통해 두 개의 표지판 내용을 살펴본다. 하나는 봉토(封土)에 대한 설명이고 다른 하나는 지궁(地宮)에 대한 설명이다. 쉽게 말하면 진시황제릉의 외연을 형성하는 봉분은 어떤 모습이고, 땅 속에 있는 무덤의 내부는 어떻게 이루어졌나 하는 내용이다.

황제릉의 외연은 어떤 모습일까?

진시황릉 주변 지형도
 진시황릉 주변 지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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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산릉 봉분의 높이는 원래 50장(丈: 115m)이었다고 한다. 흙을 쌓아 단단하게 하는 토축(土築) 방식으로 만든 인공산이다. 그러므로 하단부는 직사각형이고 상단부로 올라갈수록 면적이 좁아지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당시 능의 하단부 길이는 남북이 515m, 동서가 485m였다고 한다. 그런데 2000년이 넘는 세월 속에 비바람에 깎이고 농토로 개간되는 등 시련을 겪어 봉분의 높이가 76m로 낮아졌다.

그리고 능의 하단부 길이도 남북이 350m, 동서가 345m로 줄어들었다. 그러므로 봉분의 둘레가 1390m 정도다. 이러한 봉분 안에 능묘가 조성되었는데, 현 능묘의 높이는 52.5m라고 한다. 이 봉분 주위에는 사방으로 성벽을 두 겹으로 둘러쌌다. 이들 성은 남북으로 긴 장방형이었다. 내성은 남북 길이 1335m, 동서 길이 580m, 외성은 남북 길이 2165m, 동서 길이 940m이었다고 한다.

여산을 배경으로 한 진시황릉
 여산을 배경으로 한 진시황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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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의 두께는 8m나 되었고, 사방에는 문을 설치했다고 한다. 문 위에는 문루가 있고, 성곽의 사방 모퉁이에는 각루를 만들어 능을 지키도록 했다. 이들 성 안에는 능을 관리하기 위한 건물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유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현재도 내성과 외성 사이 공간에는 일부 촌락이 남아 있다. 진시황릉은 기본적으로 남쪽에 여산을, 북쪽에 위하를 끼고 있는 배산임수 지형이다.

진시황릉의 내부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과거 서안을 방문했을 땐 진시황릉 본분 정상엘 올라갈 수 있었다. 사과밭 사이로 난 계단을 따라 올라갔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제는 능상에 올라갈 수가 없다. 더더구나 황제릉 내부에 들어가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그것은 내부에 대한 발굴이나 조사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1960년대 고고학자들을 중심으로 지표조사를 했고, 내부에 대한 보링 탐사를 한 적이 있다.

진시황릉 앞쪽의 모습
 진시황릉 앞쪽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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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02, 2003년 현대적인 기법을 동원한 탐사를 통해 내부 모습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진시황릉 내부 지하궁전의 모습이 사마천의 <사기(史記)> <진시황 본기> 내용과 거의 일치하더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사마천이라는 사가의 진실성과 정확성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사마천이 <사기>를 쓴 것은 한나라 무제 때인 기원전 100년 전후다. 진시황이 기원전 210년에 죽었으니 100년 이상이 지난 후다. 사마천의 <사기><진시황 본기>에 보면, 진시황은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여산 기슭에 자신의 능묘를 건설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38년간 70만 명의 노동자를 동원해 그가 죽은 지 1년 후인 209년경 여산릉이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지하궁전 안내판
 지하궁전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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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황은 즉위한 지 얼마 안 되어 능묘 건조에 착수했다. 전국을 통일한 후에는 70여만 명의 죄수를 그곳에 보내 노역에 종사케 했다. 묘혈은 3층 샘물 이하로 깊이 파서 구리로 주조한 후 관을 안치했다. 그리고 현실(玄室) 안에 별궁을 건설하고, 묘실 안에는 진귀한 보물을 가득 수장했다. 또 장인들을 시켜 불시에 화살을 발사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 누구든 도굴하러 들어왔다가는 그 화살에 맞아죽도록 했다. 

현실 안 천장에는 일월성신(星辰)을 장식하고 바닥에는 9주(州) 5악(岳)을 배치했다. 인어의 기름으로 초를 만들어 아주 오랫동안 불이 켜져 있도록 했다. 2세 황제는 시황제의 후궁과 비빈 중 자식을 낳은 적이 없고 궁중에 남겨두기 마땅치 않은 여자는 모두 순장하도록 했다. […] 장례를 마친 후에는 현실 안의 연도(羨道)를 봉쇄하고, 이어 현실 밖의 연도까지 완전 봉쇄해 장인들이 하나도 살아나오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는 무덤 위에 초목을 심어 산처럼 보이게 했다."

동거마용
 동거마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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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적 탐사를 통해 확인한 바로는, 진시황릉 주변에 여러 개의 부장용 갱과 무덤이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동거마용갱(銅車馬俑坑), 금수갱(禽獸坑), 마구갱(馬廐坑), 병마용갱(兵馬俑坑)이다. 동거마용갱은 진시황이 사후 세계에서 타고 다닐 마차를 부장한 갱이다. 금수갱은 진시황이 사냥을 할 수렵장 개념으로 만든 동물용(動物俑) 갱이다. 마구갱은 황실의 마구간을 모방해 만들었다. 병마용갱은 황제의 호위군인 병마용을 배치한 갱으로, 내부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갱이다.

병마용갱은 모두 5개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중 3개가 발굴되어 관람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1974년 가장 먼저 발굴된 1호갱은 동서 230m, 남북 62m 크기의 장방형 지하갱이다. 이곳에는 6000여기의 병마용이 있다. 1976년 발굴된 2, 3호갱은 1호갱보다는 규모가 작은 편이다. 2호갱에 1300여기의 병마용이, 3호갱에 66기의 병마용이 있다.

진시황, 그는 누구인가?

진시황제
 진시황제
ⓒ 퍼블릭 도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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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은 전국시대 7웅 중 하나인 진(秦)나라 사람이다. 그는 왕족으로 성이 영(嬴)이고 이름이 정(政)이다. 그러나 그는 진나라가 아니고 조(趙)나라 수도 한단(邯鄲)에서 기원전 259년 태어났다. 그것은 영정의 아버지 영자초(嬴子楚, 기원전 281~247)가 외교적 볼모로 한단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당시 영자초는 진소양왕(秦昭襄王)의 손자로 왕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이때 영자초는 한단에서 크게 장사를 하는 여불위(呂不韋)를 만난다.

여불위는 영자초의 사람됨을 보고는, 그를 도우면 진나라의 왕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애첩인 조희(趙姬)를 영자초에게 바치고, 경제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여불위는 영자초와 함께 진나라로 돌아가게 되었고, 자초의 아버지인 안국군(安國君)을 소양왕의 정비인 화양부인(華陽夫人)의 양자로 삼아 태자를 만든다. 안국군은 기원전 250년 52세의 나이로 효문왕(孝文王)에 등극한다. 그는 자초를 태자로 임명하고, 왕이 된지 단 3일 만에 세상을 떠난다. 

전국 7웅 지도
 전국 7웅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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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자초는 장양왕(莊襄王)으로 등극한다. 그러나 그도 역시 3년 후인 기원전 247년 세상을 떠난다. 그러므로 영정이 13세의 나이로 진나라 왕이 된다. 처음에 그는 여불위를 재상으로 삼고 조태후의 총애를 받는 노독(嫪毐)의 도움을 받아 국정을 운영한다. 그러나 22살이 되면서 친정을 펴고, 이사(李斯), 위료(尉繚) 등을 중용한다. 그리고 법치주의와 중농주의 정책을 시행했다.

이를 통해 국력을 강화한 진시황은 기원전 230년부터 통일대업을 이루기 위한 정책을 실시한다. 군사적으로 원교근공, 분심이간, 각개격파 전술을 사용하면서 한(韓), 조(趙), 연(燕), 위(魏), 초(楚), 제(齊)의 6개 나라를 차례로 멸망시킨다. 그는 기원전 221년 통일대업을 이룩하고 진이라는 제국을 건설한다. 그리고 봉건제도를 타파하고, 중앙집권제인 군현제(郡縣制)를 시행했으며, 자신을 황제라 칭한다.

황제의 칙령이 새겨진 철권: 도량형 통일에 사용
 황제의 칙령이 새겨진 철권: 도량형 통일에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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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중국 전체를 36개 군으로 나누고, 그 아래 현, 향(鄕), 정(亭), 리(里)를 설치했다. 중앙 정부는 3공 9경 제도를 채택해 국정은 승상이, 군무는 태위가, 감찰은 어사대부가 맡아하도록 했다. 9경은 궁중 사무를 맡아보는 자리로 낭중령(郎中令), 봉상(奉常) 등 9개 직책이 있었다. 그리고 법률을 국가통치의 중요수단으로 삼는 법치주의를 채택했다.

진시황은 또한 도량형, 문자, 화폐 세 가지를 통일, 중국을 진정한 통일국가로 만들었다. 그는 중농주의를 채택해 황하에 관개시설을 설치하고, 농지를 개간하도록 했다. 그는 도로를 정비해 전국을 순방했으며, 이를 통해 교통과 통신의 획기적 발전을 가능케 했다. 그는 또한 몽염(蒙恬) 장군을 북방에 파견해 흉노를 물리치고 만리장성을 축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만리장성 건설이라는 대규모 토목사업이 민심을 이반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더욱이 그는 함양궁, 장락궁, 아방궁 등을 지으며 국고를 낭비했고, 자신이 사후 들어갈 여산릉을 짓는 데 너무나 많은 사람을 동원했다. 그는 또한 법치주의라는 이름으로 유가를 탄압해 분서갱유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만들기도 했다. 가혹한 정치, 도를 넘는 인력 동원과 경제적인 착취, 진시황 사후 왕위 계승의 잘못 등으로 인해, 진나라는 그가 죽은 지 3년 만에 망하고 말았다.

2002년에 방문했던 아방궁(복원)
 2002년에 방문했던 아방궁(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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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진시황제릉, #여산릉, #《사기(史記)》〈진시황 본기〉, #동거마용, #병마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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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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