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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나는 장애와 장애인의 삶을 이야기한 두 권의 책을 접하고 마음이 무거웠다. 장애학생을 가르치는 교사교육 분야에서 평생 교수 노릇해 온 나에게 '장애'는 간접경험이었고, 지식으로서 장애이자 장애인을 대상화한 특수교육이었다. 말하자면 나는 양지에서 음지의 그들 삶을 담론화하는 데에 익숙한 사람이다.

일전에 내가 읽은 책의 하나는 서울 노들장애인야학 이야기를 엮은 <노란들판의 꿈>(홍은전, 2016)이고 , 다른 하나는 발달장애인 자녀를 둔 어머니들의 이야기를 담은 <그래, 엄마야>(인권기록활동네트워크 '소리', 2016)라는 책이다.

노들장애인야학 20주년기념 '노란들판의 꿈'(2016)과 노들 교장 박경석(24세에 장애인이된 후)의 '지금이 나는 더 행복하다'(2013)는 책 표지
▲ 노들장애인야학 이야기 '노란들판의꿈'(2016)과 교장 박경석의 '지금이 나는 더 행복하다 노들장애인야학 20주년기념 '노란들판의 꿈'(2016)과 노들 교장 박경석(24세에 장애인이된 후)의 '지금이 나는 더 행복하다'(2013)는 책 표지
ⓒ 김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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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장애인야학 이야기는 야학 스무 해를 맞아 펴낸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업합시다>(2014)에 이어, 그 개정판으로 노들의 배움‧투쟁‧일상을 정리한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업합시다'라는 초판 책 제목은 그 자체가 노들장애인야학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 준다. 장애인 야학에서 수업과 거리투쟁 운동은 하나의 프락시스로 맞물려 있다.

수업이 우선이냐 운동이 우선이냐는 문제는 제때 학교교육을 받지 못한 장애인들이 세상을 향한 말 걸기와 문해(文解)를 위한 배움의 과정에서 내면적 갈등의 표출로 제기된 질문이다. 하지만 그들에겐 이제 그게 질문이 되질 않는다. 그들에게 읽고 쓰고 셈하기는 기초학력의 도구이자 삶의 방편이다. 하여 그들에게 앎은 삶이다.

노들야학 교사였던 홍은전 선생이 야학 스무 해를 그냥 넘기지 않고, 그와 일상을 함께한 장애인들 삶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겼다. 기록되지 않으면 역사가 되질 못한다. 이 책으로 인해 노들이 역사가 되었고, 홍은전 선생은 그 역사를 기록한 선생이 되었다. 선생 노릇 한 번 제대로 한 게다. 노들장애인야학 20년사 정리를 시작하는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언젠가부터 누군가가 우리의 교실로 들어와 우리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기록해 주길 바랐습니다. 다행히 우리는 무수히 취재되었고 고맙게도 연구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실의 온도와 습도, 냄새와 소란스러움 같은 일상의 맥락이 더해지지 않으면 아무리 잘 말해진 노들 이야기라도 음이 소거된 영상처럼 중요한 무언가 빠져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스스로 말하고 쓸 차례입니다.

장애 해방 인간 해방의 길에서
밑불이 되고 불씨가 되고 싶었던
작은 학교 노들의 스무 해 이야기는
아직 충분히 말해지지 않았으므로.


이렇게 기필된 노들 스무 해의 1교시는 '배움'(1993-2000년), 2교시는 '투쟁'(2001-2007년), 3교시는 '삶'(2008-2013년), 4교시는 '다시 일상', 그리고 5교시는 '뒤풀이'로 이어진다. 4교시 마치고 '쉬는 시간'에 고병권은 <존재염색, 노들에 물들다>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저는 이제 과거와 다른 색깔의 말을 합니다. 존재가 다른 색깔로 물든 겁니다. 말하는 이가 개입하는 것보다 더 깊은 곳에 말할 수 없는 이들이 개입한 것 같습니다. 이게 뭘까. 생각해 보고 또 생각해 봅니다. 노란 들판, 노들의 그 노란 물이 제게 어떻게 베어든 걸까요.

"장애인들을 바꾸려면 물리적 요법과 화학적 요법을 함께 써야 합니다. 집회장에 강제로라도 끌고 나오는 게 물리적 요법이라면 술 먹으면서 은근히 말려들게 하는 게 화학적 요법이지요." 언젠가 박경석(노들교장) 선생이 한 말인데 오늘 따라 '화학적 요법'이라는 그 말이 귓가에서 맴돕니다. ...(중략)존 재를 염색하고 변형시키는 어떤 화학이 노들에서 작동하는 것 같습니다.


비장애인으로서 노들에 물든 그의 존재염색 고백이 놀랍다. 하지만 존재염색의 증인은 노들의 장애인 당사자 그들이다. 염색 상태가 어떤지 그들에게 물어봐야 한다. 그래서 장애인들은 "우리를 빼놓고 우리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지 말라"(Nothing About Us Without Us)고 했다. 대개 10명 중 한 명은 장애인이다. 어느 맘 여린 야학교사는 이렇게 자책한다.

"99를 가진 이들이 1을 가진 사람의 마지막 하나를 빼앗고 그를 버렸다. 그(S)를 보러 가는 길은 고역이다. 그의 힘없는 눈에 비친 나를 바라보는 것은 괴롭다. 나는 내가 아닐 이유가 전혀 없었던 어떤 삶을 버려두고 돌아온다. '1'들과 함께 싸우지만 어떤 '1'은 포기하는, '1'이 되지 못한 나는 여전히 안전한 '9'이다."

이게 뼈아픈 세상살이 모습이다. 과연 누구의 책임인가. 인디언의 기우제는 실패하는 법이 없다. 왜냐하면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노들장애인야학의 장애 해방 투쟁은 인디언의 기우제처럼 지난 20년간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기우제처럼 장애인들이 온몸으로 투쟁해온 끝에 이만큼이라도 장애인 편의시설과 이동권이 개선되었고, 활동보조원 지원이 도입되고, 장애인등급제도 완화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간 적잖은 장애인들이 이런저런 고통과 불평등의 질곡 속에 자의 혹은 타의로 목숨을 잃었다. 그들에게 기우제는 여전히 그 끝이 보이지 않는 현재진행형이다.

노들야학 교장 박경석은 "야학은 없어져야 할 존재"라 했다. 이 땅의 장애인들이 학령기에 빠짐없이 적절한 공교육을 받는 세상이라면, 굳이 야학이 무학이자 문맹인 장애인들의 기초교육을 위해 존재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게다. 따라서 모든 장애인 야학은 앞으로 품위 있는 평생교육센터로 그 정체성을 재정립해야 할 게다.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이계삼 선생은 노들 야학을 이렇게 평한다.

장작불 같은 학교, 먼저 붙은 토막이 불씨가 되고, 빨리 붙은 장작은 밑불이 되고 젖은 놈은 마른 놈 곁에 몸을 맞대어 활활 타올라 끝내 쇳덩이를 녹여 나가는 노들의 나날, 교육은 교육 바깥에서 희망이 되었다. 노들처럼 살고 노들처럼 투쟁하는 곳에 그 고색창연한 이름 '교육'이 있었다.

모든 장작은 불붙는 성질을 원래 지니고 있지만, 누군가 성냥을 그어 불을 댕겨주어야 탄다. 문제는 그 불씨가 꺼지지 않게 해야 한다. 꺼지지 않는 불씨 혹은 불쏘시개, 그게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공동체의 생명이다. 제도교육의 바깥에서 노들은 교육의 희망이 되었다. 그곳에 고색창연한 이름, '교육'이 존재한 게다.

<그래, 엄마야>
 <그래, 엄마야>
ⓒ 오월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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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고색창연한 교육의 이름은 약 2500년 전 <중용(中庸)> 첫 머리에서 커다랗게 내 걸었다. 즉, 하늘이 명령하는 것이 사람의 본래성이고(天命之謂性), 이 성에 따르는 게 사람이 가야 할 마땅한 길이고(率性之謂道), 이 길을 닦는 과정이 곧 교육(修道之謂敎)이라는 게다. 노들에서 '수업=운동=투쟁'은 하늘의 지엄한 명령에 의한 것이자 인간 해방의 과정이다.

이처럼 노들은 어렵게 교육의 불씨를 살려내고 있지만, 아직 교육다움에 근접하기조차 어려운 장애인들이 이 땅에는 약 20만 명이나 있다. 일컬어 발달장애인을 비롯한 지적장애인들이다. 그들에게 교육은 본래 안 되기 때문이라기보다 아예 안 된다고 포기하는 데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발달장애인의 경우에는 노들처럼 장애당사자들이 직접 나서서 세상을 향한 말 걸기도 어렵다. 하기에 그런 자녀를 둔 어머니들이 앞장서 발언하고 운동을 펼치는 게 현실이다.

<그래, 엄마야>(2016)라는 책은 발달장애인 자녀를 둔 어머니들의 생생한 삶의 이야기다. 그들 어머니들은 이렇게 호소한다.

내가 오롯이 짊어지는 이 짐을 사회가 나눠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나도, 우리 아이도 한결 숨 쉬기 편할 겁니다. 내가 이 손을 놓고 멀리 떠난다 해도 우리 아이가 엄마의 손길을 이 사회 속에서 여전히 받아가며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아이와 어미인 저는 이번 생을 그렇게 같이 살다 가려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어미가 그렇듯, 이 아이로 인해서 나는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발달장애 자녀를 둔 엄마들의 사회를 향한 호소와 절규, 그리고 어미로서 소명이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이 대목에서 '장애' 그것은 누구의 책임인가를 엄중히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장애는 개인의 실존적 문제이지만, 개인의 비극으로 환원지울 수 없다. 왜냐하면 장애는 개인의 병리적 문제라기보다는 근원적으로 사회의 병리적 문제기 때문이다. 장애인 당사자의 생존권과 인권을 중시하는 장애학(disability studies)에 의하면, 장애는 당대 사회가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교육적으로 구성한 문제다.

이를테면, 편의시설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에 신체장애인들이 대중교통수단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다면, 그것은 교통약자의 접근권을 제한한 당대 사회의 책임인가 장애인 당사자의 책임인가? 장애학생이 적절한 공교육 기회로부터 제외된다면 그게 당사자가 감내해야 할 문제인가 공교육이 책임져야 할 문제인가? 응당 질문이 되질 않는 문제지만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그래서 발달장애인 어머니들은 아직도 "내가 오롯이 짊어지는 이 짐을 사회가 나눠 들어 주길" 호소한다.

근데 그들 엄마는 아직도 '장애'를 질병과 같은 것으로 착각한다. 하여 '재활'이라는 말에 과잉 기대를 건다. 어느 어머니는 고백하길 "저는 정신지체는 낫는 병이 아니라 평생을 안고 가야 한다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남편한테도 그랬어요. 여보, 좋아질 뿐 낫는 게 아니래. 평생을 간대요. 우리가 평생 이 이이를 돌봐야 될 거예요." 어머니에게 '평생을 간다'는 대목은 종신형처럼 들린다. 사람들은 엄마가 아이의 행동 패턴이나 성향을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니다. 다만 긴 시간을 함께 부대끼고 살면서 비로소 조금씩 파악할 수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방학 때는 집에서 단추 잠그기를 했는데 중학교 가서 교복 와이셔츠를 혼자 입고 벗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죠. 남들은 '그걸 두 방학에 걸쳐 했다고?' 그러겠지만 우리 아이들에게는 오랜 연습이 필요하답니다. 큰 단추로 시작해서 작은 단추가 달린, 집에 있는 옷들을 순서대로 꺼내 연습했죠. 성공하면 온가족이 칭찬해주고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죠." 

이런 일상이 지적장애아의 교육과정이다. 양육과정에서 대개의 엄마들은 선배 부모들만큼 풍부한 정보를 주는 이도 없다는 결론에 이르지만, 의외로 장애를 '아픈' 거라고 말하는 어머니들이 아직도 많단다. 이게 우리네 현실이다. 하지만 아이와 부대끼며 살아온 엄마는 경험으로 안다. '재활치료'는 완쾌가 아니란 걸, 재활은 치료라기보다 장애아동 특성에 맞춰 제공되는 '교육과정'이란 걸. 하여 장애/비장애를 가르지 않고 모든 아이들에게 꼭 맞는 교육과 그런 세상을 열어가는 '과정'(process)이 중요한 게다. 일하는 어머니에게 장애자녀를 위한 사회적 지원은 큰 용기를 준다.

"정말 운 좋게 수연이는 통합어린이집에 다니게 됐어요. 그 어린이집에서 보낸 2년 동안 부모의 시름이 백이라면 오십으로 확 떨어졌어요. 그리고 활동보조인 서비스는 정말 획기적인 거예요. 단순히 국가에서 비용을 대준다, 서비스를 지원한다가 아니라 부모가 아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주더라고요. 부모의 사회진출도 돕고, 저는 그게 수연이 초등학교 입학할 때 만들어져서 그 덕을 많이 봤어요. 운이 좋았죠."

이처럼 발달장애인과 그 가족의 삶이 '운'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는 건 결국 장애인을 지원하는 사회시스템이 제대로 설계‧작동되지 않았다는 걸 반증한다. 학교폭력 사례의 처리과정에서도 장애학생은 이중의 피해를 받는다. 정은이 엄마 이야기를 직접 들어 보자.

그때쯤 다른 학교에서 피해를 받고 이 학교로 전학 온 장애학생이 있었어요. 피해를 당한 장애학생을 학교에서 전학 보내는 거예요. 정은이도 전학을 권고 당했어요. 장애아이들이 익숙하게 살아온 환경을 바꾸는 것은 매우 힘든 거예요. 부모도 그렇고. 제가 왜 피해자인 정은이가 전학을 가야 하느냐고 따져 물었어요. 그 때 황당했던 게 뭐냐면 선생님이 가해 학생들 이름은 다 아는데 우리 애는 그냥 '장애학생'이라고만 하는 거예요. 우리 애들 이름을 모르는구나. 우리 애들은 이름이 '장애학생'이구나. 이름도 없이 우리 애는 차별받는구나.


이름이 없는 아이. '장애'라는 명칭 붙임만 덩그러니 남아 있고. 이런 게 학교문화의 현실이라면, 그런 학교에서 뭘 가르치고 배운단 말인가. 그래도 교육만이 희망이랬던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다.

자녀가 계속 고등학생으로 지낼 수 있게 해달라는, 이상한 바람을 갖는 사람들. 바로 성인기 발달장애인 자녀를 둔 어머니들이다. 발달장애인은 고3이 되면 전공과를 가든지, 단순 노동이라도 일을 하거나 그냥 집에 머물든지 세 가지 중 하나다. 하지만 특수학교 전공과 진학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전공과도 장애가 심하면 안 받아요. 통학버스도 운영하지 않으니까 애가 혼자서 통학을 못하면 부모가 출퇴근 시켜야 해요. 결국 기능이 되는 애들만 가게 되는 거지. 장애학생이라고 모두 갈 수 있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전공과에 들어가 봤자 2~3년 후면 대개 집으로 다시 돌아온다. 집으로 유턴하지 않고 직진을 고집하는 엄마들은 아직도 고군분투 중이다. 성년기 발달장애인을 둔 어머니들의 고민은 자녀가 세상 속으로 나아가 세상과 마주할 힘을 키우는 일이다. 이정현씨에게 아들의 그룹 홈 생활은 용기가 필요한 결정이었다.

"애를 왜 그런 데서 살게 하냐고 엄마들은 못 믿는 거죠. 나도 그랬지만 엄마들은 자기가 애한테 제일 잘하는 줄 알고 있어요. 근데 나중에 보니까 애들이 그룹 홈 선생님을 무척 좋아했어요."

장애인 그룹 홈은 4, 5명 정도 장애인이 한 집에 모여 사는 공동생활 형태로, 사회복지사 등 담당자가 장애인 신변과 안전을 돌보며 생활한다. 공동생활이라는 한계는 있지만 장애인 자립생활의 한 모델로 권장된다.

"그룹 홈을 시작하고 얼마 안 돼서 어느 날 애들을 길에서 봤는데 글쎄 모른 척을 하더라고요. 그때 '어머, 제가 저런 애였나' 싶으면서도 '애들이 저기가 좋구나' 생각했어요. 아주 색다른 체험이었다니까요."

성인이 되면 누구나 독립하고 싶어 한다. 더디고 힘들더라도 독립하고 자립하는 경험이나 기회를 자꾸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래야 아주 조금씩 홀로 선다. 자녀의 미래를 위해서는 온몸을 부딪쳐온 엄마들이지만, 그래도 마주하고 싶지 않다고 입을 모으는 순간이 있다.

"아기를 낳는다고 하면, 그것만큼은 힘들 거 같아요. 승윤이가 애를 갖는.... 그 부분에서 저는 막혀요." 성인기 발달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들에게 자녀가 아이를 갖는 일은 '사건'이 된다. "될 수도 없고, 되지도 않을 일"이라고 잘라 말하는 엄마도 있다. 20년, 30년 이상 자식을 위해 살아온 엄마들. 가족관계도 사회관계도 자녀 중심으로 흘러온 세월. 근데 앞으로도 끝나지 않을 '돌봄'이라니! 엄마들의 침묵에 끝  모를 고통이 묻어난다. 그녀들에게 엄마 아닌, '나, 사람'은 점점 사라지는 게다. 성인 장애인들의 평생교육기관으로 다시 노들이 등장한다.

"노들에서 발달장애인 프로그램을 시작하는 걸 보고 옳다구나 하고 찾아 간 거예요. 소민이가 좋아하는 목공수업이랑 방송 댄스도 있어요. 또 집회에 나가는 현장학습도 있고. 저는 소민이가 그런 걸 경험하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비장애인을 위한 평생교육 프로그램은 넘쳐난다. 지자체마다 장애인들이 즐겁게 참여할 수 있는 평생교육기관이 하나씩이라도 늘어났으면 하는 게 이들 엄마의 바람이다. 이런 바람을 담아 발달장애인권리보장법이 어렵게 제정되었고, 이제 그 권리 실현의 지렛대로 기대를 모은다.

발달장애인의 참여 기회를 만드는 것은 그 '어떤' 사람의 능력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함께 키워야할 힘이자 품위다. 뭣보다 발달장애인도 관리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 권리를 당당히 주장하는 권리의 주체로 우뚝 서게 해야 한다. <중용>에 이런 말이 나온다.

행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행할진대 독실하지 못하거든 도중에 포기하지 마십시오. 남이 한 번에 능하거든 나는 백 번을 하며, 남이 열 번에 능하거든 나는 천 번을 하십시오. 과연 호학역행(好學力行)의 도(道)에 능하게만 되면, 비록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반드시 현명해지며, 비록 유약한 자라도 반드시 강건하게 될 것입니다(<중용>, 제20장).


<중용>에서 이 말은 바로 발달장애인의 교육과 재활을 향한 경구(警句)다. 나는 지금부터 약 15년 전 일본에서 개최된 아시아지적장애국제회의에 참석하던 중 참으로 신선한 경험을 했다. 어느 날 전체 발표장에서 뉴질랜드에서 온 로버트 마틴(R. Martin)이라는 사람의 발표 내용이 신통하게 내 귀에 잘 들어 왔다. 그 내용이 좋아서 두루 소개하였는데, 그의 연설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여러분, 왜 저의 인생은 여러분과 이토록 달라야 합니까?
지적장애로 불리는 우리를 이토록 다르게 만드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왜 우리는 별로 가치 없는 그런 사람으로 여겨지는 겁니까?

왜 우리들 중 많은 이들이 친구도 아닌 낯선 사람과 침실까지 함께 사용하면서 살아야 합니까?
왜 우리는 형제자매와 같은 학교에 다닐 수 없습니까?
왜 우리는 일할 능력이 있음에도 일자리를 얻는데 늘 마지막이어야 합니까? 왜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까? 왜 우리는 결혼해서 배우자와 함께 살지 못합니까? ...(중략)
왜 정부와 유엔은 우리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법률이나 선언문을 논하는 자리에 조차 우리를 포함시키지 않습니까?"

그는 지적장애인 당사자로 뉴질랜드에서 자기권리주장(즉, People First)운동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근데 마틴은 최근 마침내 자기권리주장의 일부를 스스로 유엔에까지 관철 시켰다. 유엔 장애인권리협약 제9차 총회(2016.06.14)에서 지적장애인 당사자인 마틴(59)을 새로 선출된 위원회의 위원 9명 중 한 사람으로 선출한 게다. 유엔 장애인권리협약은 장애인의 존엄과 권리보장을 위해 2006년 유엔 총회에서 채택되어 2008년부터 발효된 유엔 인권협약이다. 마틴은 여기 위원으로 선출된 후 "이제부터 힘든 임무가 시작된다"(한겨레, 2016.6.16)고 했다.

뉴질랜드에서 마틴은 되는데 왜 우리나라에서는 안 되는가. 어쩜 이건 무책임한 질문이다. 그것은 당대를 사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지 그들(장애인 당사자)의 책임이 아니다. 발달장애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당히 일어설 수 있게 우리 모두 관용과 사랑의 힘을 보태야 한다. 그게 진정 품위 있는 민주사회의 푯대다. 이제 두 책을 덮으면서 남은 나의 바람은 발달장애인 스스로가 그들의 삶을 당당히 이야기하고, 그것을 말글로 엮은 책을 보고 싶다. 그날을 고대한다.

덧붙이는 글 | 일전에 노들장애인야학의 기록과 발달장애인 자녀를 둔 엄마들의 이야기를 읽고, 평생을 특수교육 분야 교수노릇하며 양지에서 살아온 내 자신이 음지의 장애인들에게 많은 빚짐의 삶이었다는 걸 참회하는 의미에서 기필했다.



노란들판의 꿈 - 그들의 배움, 그들의 투쟁, 그들의 일상

홍은전 지음, 노들장애인야학, 봄날의책(2016)


태그:#장애, 누구 책임인가, #장애는 사회적 병리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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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둥이로 태어나 지금은 명예교수로 그냥 읽고 쓰기와 산책을 즐긴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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