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사전질문지) 읽고 나서 딱히 준비 안 했어요. 그냥 얘기하는 게 자연스럽고 좋을 것 같아서요."

아, 느껴진다. '쿨내'가. 아직 6월 5일의 여운이 남아 있어서일까(관련 기사 : 귀에서 떠나지 않는 윤도현·제이민의 크립, 또 들을 수 있을까). 작고 가녀린 체구의 배우이지만, 스물아홉 동갑내기 그녀에게는 뭔가 극존칭을 써야할 것만 같은 누님 '포스'가 있었다. 이츠학을 떠나보낸 그 자리, 홍익대 대학로아트센터 대극장에 그대로 그녀가 돌아왔다. 뮤지컬 <올슉업>의 나탈리로.

"나탈리랑은 되게 정신없이 인사했는데, 그 와중에도 잘 만나준 것 같아요. 나탈리는 굉장히 솔직하잖아요. 싫은 건 싫고, 좋은 건 좋고. 제 평상시 모습이랑 괴리된 게 별로 없어요."

제츠학(제이민+이츠학)에서 제탈리(제이민+나탈리)로 변신한 그녀. 비가 시원하게 쏟아지던 지난 1일, 서울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소나기처럼 쿨한 배우 제이민을 만났다. 팬심 탓에 발생한 울렁증 극복을 위해 맥주 한 잔 마시면서.

착실하게 쌓다 그리고 피다

 뮤지컬 <올슉업>에 출연 중인 배우 제이민의 연습실 및 프레스콜 현장 사진. 제이민은 <올슉업>에서 사랑을 위해 남장도 불사하는 적극적인 캐릭터 나탈리를 맡았다. <올슉업>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곡을 바탕으로 제작된 쥬크박스 뮤지컬로 쇼적인 요소가 강조된 신나는 작품이다.

지난 6월 1일, 뮤지컬 <올슉업> 연습실 현장 공개 당시 포토타임 때 촬영한 배우 제이민의 모습. 여장남자였던 이츠학에서 남장여자인 나탈리(에드)를 연기해야 했던 그녀. 연습실 현장에서, 다른 느낌의 캐릭터를 연기하는 데 어려움이 없느냐는 질문에 제이민은 씩씩하게 "괜찮다"고 답했었다. 그는 좋은 배우가 되어가고 있다. ⓒ 곽우신


나를 된통 치고 간 이 배우, 지금까지 어디서 뭐하다가 이제야 나타난 걸까? 제이민은 2012년 뮤지컬 <잭 더 리퍼>의 글로리아로 국내 데뷔했고 이후로 <삼총사> 콘스탄스 등을 맡으며 필모그래피를 쌓아 왔다. <인 더 하이츠>는 보지 않았지만, 분명 당시 시즌의 <잭 더 리퍼>와 <삼총사> 속 제이민을 봤다. 그런데 어떤 연기와 노래를 보여줬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캐릭터 분량 자체가 그리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름의 존재감을 보여줄 수 있었을 텐데.

"<잭 더 리퍼>는 사실 데뷔작이었고, <삼총사>까지도 약간은 무대가 편하지 않았어요. 이제 막 태어난 단계였기 때문에. <인 더 하이츠> 때 '나도 자신감을 가지고 해도 될까?'라는 생각을 갖게 되면서부터 조금씩 바뀌었어요. 지금은 굉장히 신나게 무대를 즐기고 있고요."

 배우 제이민의 필모그래피. 왼쪽부터 <잭 더 리퍼>의 글로리아, <삼총사>의 콘스탄스, <인 더 하이츠>의 바네사 그리고 <헤드윅>의 이츠학 프로필 이미지이다.

▲ 짠단단짠 2007년에서 일본에서 데뷔했던 제이민은, 2012년 여러 드라마의 OST에 참여하면서 국내 데뷔를 준비한다. 그리고 뮤지컬 <잭 더 리퍼>에 합류하면서 국내 무대에 첫발을 내디딘다. 왼쪽부터 <잭 더 리퍼>의 글로리아, <삼총사>의 콘스탄스, <인 더 하이츠>의 바네사 그리고 <헤드윅>의 이츠학 프로필 이미지이다. ⓒ 엠뮤지컬아트·SM컬처앤콘텐츠·쇼노트

제이민이라는 배우가 국내 뮤지컬 마니아 사이에서 강렬하게 각인된 건, 역시 <헤드윅>의 이츠학을 맡으면서다. 그때부터 생긴 그의 별명, 제츠학. 때로 어떤 배우들은 이처럼 '인생 캐릭터'를 만나 평생의 별명을 갖는다. 배우 김소현은 무슨 작품을 하든 영원한 크리스틴(<오페라의 유령>)이고, 배우 김보경이 킴(<미스 사이공>)으로 불리는 것처럼. 다른 역을 맡고 있음에도 여전히 제츠학으로 불리는 게 부담스럽지는 않을까.

"전 너무 좋아요. 굉장히 힘들게…. 힘들게 왔던 길이기 때문에요. 결과적으로 무척 행복했고요. 그래서 제츠학이라고 불러주셨을 때 정말 기쁘고 감사했어요. 어떤 분들은 '제츠학을 보러 <올슉업> 보러 가야겠다'고까지 말씀해주시더라고요. 계속 작품을 하다가 그 캐릭터로 별명이 또 생기면, 그게 또 '인생캐'인 거잖아요. 캐릭터로 별명이 계속 바뀐다면 정말 더할 나위 없이 좋겠죠."

 뮤지컬 <올슉업>에 출연 중인 배우 제이민의 연습실 및 프레스콜 현장 사진. 제이민은 <올슉업>에서 사랑을 위해 남장도 불사하는 적극적인 캐릭터 나탈리를 맡았다. <올슉업>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곡을 바탕으로 제작된 쥬크박스 뮤지컬로 쇼적인 요소가 강조된 신나는 작품이다.

▲ 로레인, 데니스, 나탈리 지난 6월 1일, 뮤지컬 <올슉업> 연습실 현장 공개 당시 촬영한 사진. 제일 왼쪽에서 로레인을 연기하는 배우가 바로 조윤영이다. 제이민과 조윤영 모두 <삼총사>의 콘스탄스 출신이다. 어느새 누군가로부터는 '선배' 소리를 듣게 된 제이민. 선배로서의 자격을 갖춰 나간다는 건 그녀에게 또 어떤 의미일까. ⓒ 곽우신


그렇게 첫 인생캐를 만났고, 국내 뮤지컬 경력 5년 차에 드디어 돋보이기 시작했다. 아직 20대인 그녀가 어느새 '선배' 소리를 듣는 위치가 되어 버리기도 했고. 이제 막 제자리를 찾은 것 같은 차에 벌써 선배라니, 얼마나 얼떨떨할까.

"처음 <올슉업> 상견례날에 조윤영 배우가 와서 먼저 인사를 하더라고요. '선배님, 저 <삼총사>에서 콘스탄스하고 있습니다'라고. 되게 느낌이 묘했어요. 아, 내가 이런 소리를 듣다니! 직속인 거잖아요. 제가 김아선 선배에게 느꼈던 감정이 생각났어요. 글로리아랑 콘스탄스 모두 하셨고, 또 '김아선 배우'라고 적혀 있는 옷을 물려받아 입었거든요. 아, 조윤영 배우가 느끼는 감정도 그런 건가? (웃음)"

솔직, 확실, 호불호

 뮤지컬 <올슉업>에 나탈리로 출연 중인 배우 제이민의 이미지.

▲ 제탈리 뮤지컬 <올슉업>에 나탈리로 출연 중인 배우 제이민의 프로필 이미지. 긴 머리로 촬영한 사진이지만, 실제로 무대 위에서는 짧은 머리를 하고 올라온다. 그녀에게는 보이쉬한 매력이 있다. 그런데 이 매력을 '보이쉬'로 정의해도 괜찮은 걸까? 긴 머리가 여성성의 상징처럼 되는 게 고민이었다는 그녀처럼, 그 반대의 매력을 '보이쉬'라고 정의하는 것도 어폐가 있는 것일지 모른다. ⓒ 스토리피

<올슉업> 속 나탈리는 적극적인 인물이다. 엘비스에게 첫눈에 반하지만, 엘비스가 자신을 바라봐주지 않자 남장까지 하면서 친해지려고 노력한다. 콘스탄스와 나탈리의 밝은 분위기가 비슷하다고 했더니, 그녀는 전혀 다른 캐릭터라고 선을 긋는다.

"만약 나탈리가 콘스탄스였다면, 마지막에 감옥을 부수고 먼저 나왔을 걸요? 나탈리는 훨씬 더 주체적인 인물이에요. 굉장히 진취적이죠. 상처를 받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사랑을 얻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요. '어, 그래? 그럼 내가 너를 유혹해버리겠어'라면서. 그런 모습들이 참 마음에 들어요. 마치 <달려라 하니> 속 하니 같아요."

같이 합을 맞추고 있는 휘성·성규·최우혁의 엘비스. 느낌이 모두 다른 이 세 엘비스를 열렬히 사랑하는 나탈리인데, 셋 중 누가 가장 제이민의 실제 이상형에 가까운 지 물었다. 단박에 답이 돌아온다. "셋 다 아닌데?"라고. 이 언니의 호불호, 역시 확실하다.

"엘비스 자체가 별로 제 이상형이 아니에요. 그래서 처음에는 나탈리가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있었어요. 연습실에서 언니들(박정아·안시하)하고 웃으면서 얘기한 적도 있어요. '아니, 저게 멋있단 말이야? 저게?' 그래서 대사 뉘앙스를 살짝 바꿨죠. '그래~ 너, 멋~있다'라는 식으로. 엘비스는 제 취향이 아닌 걸로. (웃음)"

그럼 그녀가 갈구하는 사랑은 어떤 걸까. 첫눈에 반하는 사랑은 믿지만, 동시에 짝사랑은 하지 않는단다. 자기가 좋아하는데 자신한테 관심이 없다면, 그냥 인연이 아닌 거라고 생각하고 '쿨'하게 포기한다. 갑자기 나탈리를 짝사랑하는 데니스가 너무 불쌍해졌다. 그래도 나탈리가 아닌 제이민은 "엘비스보다는 데니스"가 좋단다.

 뮤지컬 <올슉업>에 출연 중인 배우 제이민의 연습실 및 프레스콜 현장 사진. 제이민은 <올슉업>에서 사랑을 위해 남장도 불사하는 적극적인 캐릭터 나탈리를 맡았다. <올슉업>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곡을 바탕으로 제작된 쥬크박스 뮤지컬로 쇼적인 요소가 강조된 신나는 작품이다.

▲ 나탈리와 데니스 작품 속 데니스는 나탈리를 오래 전부터 짝사랑한 캐릭터이다. 하지만 엘비스를 바라보는 나탈리는, 데니스가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제이민은? "소네트에 감동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답했다. ⓒ 곽우신


나탈리처럼, 제이민도 참 쿨했다. 그녀의 이런 매력에는 헤어스타일도 일정 부분 작용할 것이다. 포스터에도, 프로필 이미지에도 긴 머리로 등장하지만 실제 무대 위에서는 세 나탈리 중 유일하게 짧은 머리를 유지하고 있다. <헤드윅> 때 "의지의 표현"으로 자른 머리를 계속 하는 이유는 뭘까.

"사실은 가발을 쓸까말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편하게 연기하기에는 숏 컷트가 좋을 것 같았죠. 마지막에 모자를 벗고 긴 머리를 보여주는 그 한 장면을 위해서 가발을 쓸 필요가 있을지 생각했어요. 특히, 긴 머리가 꼭 여성성의 상징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어요. 그래서 연출께 말씀을 드렸고, 연출께서 '편할 대로 하라'고 하셔서 숏 컷트로 연기하고 있어요. 많은 분이 예상외로 숏 컷트를 엄청 사랑해주셔서 계속 유지할지는 고민이네요. (웃음)"

나탈리의 꿈, 제이민의 꿈


 뮤지컬 <올슉업>에 출연 중인 배우 제이민의 연습실 및 프레스콜 현장 사진. 제이민은 <올슉업>에서 사랑을 위해 남장도 불사하는 적극적인 캐릭터 나탈리를 맡았다. <올슉업>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곡을 바탕으로 제작된 쥬크박스 뮤지컬로 쇼적인 요소가 강조된 신나는 작품이다.

▲ 오토바이 정비사 드레스를 걸레로 쓰는 나탈리. 그녀 앞에 엘비스가 등장한 후, 나탈리는 난생 처음 드레스도 입어 보고 스스로를 꾸민다. 하지만 남자 앞에서 '여성스럽게' 변하는 모습이 나탈리의 전부가 아니다. 그녀가 엘비스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은, 남자에게 수동적으로 휘둘리는 다른 작품 속 캐릭터와 나탈리를 차별화한다. ⓒ 곽우신


<올슉업>의 나탈리는 꿈을 이뤘다. 하얀 가죽재킷을 입고 오토바이를 타며 자유를 만끽한다. 그 옆에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엘비스도 함께 있다. <올슉업>의 엔딩 이후, 나탈리의 삶은 어떨까.

"나탈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맥락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잖아요. 일단 정비사 일을 하고는 있지만, 할리우드에 가서 갑자기 신문기자가 될 수도, 사진사가 될 수도 있어요. '너랑 노래해보니 노래가 좋더라'하면 가수가 될 수도 있죠. 뭐든지 할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에, 나탈리의 길에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게 아닐까요."

가능성으로 충만한 나탈리처럼, 뮤지컬 배우 제이민도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궁금했다. 엘비스가 나탈리가 아닌 배우 제이민에게 꿈을 묻는다면, 그녀는 뭐라고 답할지.

"믿고 볼 수 있는 배우가 되는 게 꿈이에요. '믿보배'가 되는 게 사실 엄청 어려운 거잖아요. 최근에 이츠학 하면서 그런 소리 들을 때 정말정말 감사했거든요. '내가 흘린 땀이 헛된 땀이 아니구나, 내가 흘렸던 눈물들이 다 여기 밑거름이 되어서 사랑으로 돌아오는구나'라는 걸 느꼈어요. 그때 결심했죠. 계속 작품을 해야겠다고. 언젠가 믿고 보는 배우가 되어서, 다양한 역할을 다 소화하고 싶어요."

"나탈리처럼 자아가 '확실한' 캐릭터가 '확실히' 매력적이다"는 그녀는 앞으로 어떤 역을 맡는 배우가 될까. 삼십대의 문턱 앞에서 그녀는 자신 있게 "못하는 건 없다, 안 하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못하는 게 없는, '믿보배'가 되고자 하는 그녀는 분명 많이 성장했고 지금도 성장하고 있다. 나탈리가 에드라는 옷을 입고, 이전에 발견하지 못했던 자신을 발견해 성장하는 것처럼. 밑거름을 충분히 갖춘 지금, 이제 만개할 일만 남았다.

제이민은 오는 8월 말까지 뮤지컬 <올슉업>에 출연한 이후, <인 더 하이츠> 일본 공연을 위해 잠시 자리를 뜬다. 그러니까 이번 기회를 놓치면, 언제 다시 국내 무대에서 그녀를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다는 얘기이다. 트리플 캐스팅된 나탈리가 다 다르지만, 제이민의 나탈리는 제이민만이 뿜어내는 밝은 아우라가 있다. 그 기운, 얻어 가자.

"(제가) 좀 더 말괄량이 같고, 좀 더 어린 나탈리잖아요. 아직은 20대이기 때문에. (웃음)"

 뮤지컬 <올슉업>에 출연 중인 배우 제이민의 연습실 및 프레스콜 현장 사진. 제이민은 <올슉업>에서 사랑을 위해 남장도 불사하는 적극적인 캐릭터 나탈리를 맡았다. <올슉업>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곡을 바탕으로 제작된 쥬크박스 뮤지컬로 쇼적인 요소가 강조된 신나는 작품이다.

▲ 제이민의 나탈리 뮤지컬 <올슉업> 프레스콜 현장의 포토타임 때 촬영한 사진. 나탈리와 이별할 때쯤, 제이민이라는 배우는 분명 한 뼘 더 커져 있을 것이다. 발랄한 이미지와 동시에 진중하고 생각이 많은 그녀. 그 깊은 고민이, 그녀를 더 높이 날아오를 수 있게 할 것이라 믿는다. ⓒ 곽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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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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