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종류의 이야기든 대중의 호응을 얻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말이 돼야 합니다. 주요 인물들의 결정적인 선택, 그리고 그로 인해 벌어지는 사건들의 연쇄가 현실 세계의 논리에 비춰 봤을 때 크게 무리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죠. 관객들이 '나라면 저렇게 안 할 거야, 보니깐 다른 방법도 있는 거 같은데 왜 굳이 저런 선택을 해야 하지?' 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이야기에 대한 흥미는 반감되고 말 것이니까요.

간단해 보이는 원칙이지만 이걸 해내는 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은 끊임없이 자신의 주관적 시점에서 벗어나 독자 혹은 관객의 입장에서 작품을 바라보고 체크해야 합니다. 뛰어난 내러티브 예술가들이란 이런 '객관화'를 손쉽게 해내는 사람들을 뜻하죠. 만약 보통 수준의 재능을 갖고 있는 작가라면 시간을 더 많이 투자해서 노력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굿바이 싱글>은 올해 개봉된 한국 영화 중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전개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국민 진상 여배우가 가짜 임신 소동을 벌인다'는 다소 비현실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모든 사건과 주인공의 선택은 필연적이며 확실한 이유를 갖고 있거든요. 거기에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요소들까지 고루 갖추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7월 한 달 동안은 박스오피스 상위권에 머물면서 꽤 쏠쏠한 흥행 성적을 거둘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올해 개봉작 중 가장 설득력 있어

 영화 <굿바이 싱글>의 한 장면. 국민 진상 독거 스타 고주연(김혜수)는 소속사 식구들을 모아 놓고 자기의 임신 계획을 발표한다.

영화 <굿바이 싱글>의 한 장면. 국민 진상 독거 스타 고주연(김혜수)는 소속사 식구들을 모아 놓고 자기의 임신 계획을 발표한다. ⓒ 쇼박스(주)미디어플렉스


영화 초반, 자기 객관화 못하고 본인 위주로만 생각하는 인간의 전형인 고주연(김혜수)의 모습에 배꼽을 잡으면서도 궁금했던 것은, 과연 이 캐릭터를 어떻게 중학생 미혼모 단지(김현수)와 엮이게 만들 것인가 였습니다. 아무리 코미디 영화라고 하지만 이 부분이 설득력 없으면 이야기 전체가 망가질 테니까요.

다행히 아주 기발하진 않지만 큰 무리없는 방식으로 설정하기 때문에, 이후에 이어지는 장면들도 딱히 걸리는 부분 없이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중반부에 주연이 공식적으로 임신 발표를 하기까지의 과정과, 후반부에서 위기를 겪으면서 클라이맥스로 이어지는 전개 역시 크게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인물이 그렇게 행동하게 된 이유를 차근차근 분명하게 제시해 주고 있으니까요.

다만 전체적으로 리듬감이 부족한 것은 흠입니다. 컷의 타이밍이나 지속 시간이 거의 비슷비슷하기 때문에 중반부가 넘어가면 살짝 지루해 집니다. 계속 똑같은 박자만 치는 타악기 연주를 듣는 것같은 기분이 들지요. 감독이 제작, 각본으로 참여했던 독립영화 <족구왕>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있었는데, 앞으로 더 개선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가 폭넓은 공감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교과서적으로 잘 만든 성장담이라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성장 플롯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화 시대부터 내려온, 보편적이고 강력한 서사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성장의 기억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에 쉽게 공감할 수 있습니다. 늘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온 고주연이, 단지의 편이 돼 주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불리함을 감수하겠다고 나설 때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몇몇 평론가들은 이 영화에 대한 비판적인 코멘트들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대안 가족 얘기를 새롭게 할 수 있었는데 아쉽다', '왜 미혼모 캐릭터가 평면적인가', '웃기다가 울리는 전형적인 한국 코미디' 등등. 하지만 모두 초점이 안 맞는 얘기들입니다. 메인 플롯이 고주연의 성장 이야기니까 대안 가족 혹은 미혼모 문제에 대한 얘기는 상대적으로 적게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고, 엔딩이 주는 감동 역시 고주연의 진정한 성장 과정을 따라간 끝에 나오는 것이지 상투적인 한국 코미디 영화의 방식을 쫓은 결과가 아니니까요.

상투적이지 않다, 따뜻하다

 영화 <굿바이 싱글>의 한 장면. 김혜수는 이기적이고 철딱서니 없는 40대 여배우의 성장을 다룬 이 영화에서 과감하고 진솔한 연기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영화 <굿바이 싱글>의 한 장면. 김혜수는 이기적이고 철딱서니 없는 40대 여배우의 성장을 다룬 이 영화에서 과감하고 진솔한 연기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 쇼박스(주)미디어플렉스


배우들의 연기는 이 영화의 호감도를 상승시키는 원동력입니다. 고주연이란 인물을 매력적으로 연기하며 극을 이끌어 가는 김혜수를 보는 일은 그 자체로 즐거운 일입니다. 수 십 벌의 의상을 갈아입으면서 기존에 가지고 있던 독립적인 여성 이미지와는 다른 매력을 발산하는 것도 그렇지만, 다양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 인물의 감정을 누구보다도 생생하게 전달하는 능력이 아주 돋보입니다.

단지 역할을 맡은 김현수 역시 대선배의 카리스마에 조금도 주눅들지 않고 자연스런 감정 표현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연기를 해 냈습니다. 여성 투톱 영화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죠. 한국 영화계는 또 한 명의 걸출한 젊은 배우를 얻게 된 것 같습니다.

임신과 출산을 영화 소재로 다루면서도 그것을 결혼과 결부시키지 않는 것도 이 영화의 큰 장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혼을 전제로 하지 않는 임신을 불온하게 여기고 비혼 여성을 삐딱하게 보는, 한국 사회의 고루한 선입견에 숨막혀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해방감을 선사하니까요. 결혼 제도를 통하지 않고도, 여성의 주체적인 연대와 선택으로 얼마든지 아이를 키우고 가족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이 영화의 결말 역시 비슷한 쾌감을 줍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머니가 된다는 것에 크게 의미 부여를 하지 않고 무덤덤하게 지나가는 이 영화의 태도를 문제 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미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은 오랜 시간 동안 인간이란 종이 반복해서 해온 일일 뿐, 딱히 특별한 자격이 필요한 것도 아니니까요. 모성을 신화화하고 너무 떠받드는 것은 여성에게 기존의 성 역할을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하고 자유로운 사회 활동을 방해하는 기제로 작용하기 쉽습니다.

최근의 한국 영화 흥행을 보면, 암울한 사회 현실을 반영하듯 어둡고 자극적인 소재를 다룬 영화들이 많았습니다. 현실에서 느낀 울분을 스크린을 통해 해소하려는 심리 때문이었을까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 영화 <굿바이 싱글>처럼 사람들 사이의 연대, 혹은 진실한 감정 교류의 문제를 다룬 따뜻한 영화들은 대중적인 상업 영화로 잘 만들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 영화를 보고 싶어하는 수요가 분명히 있는데도 말이죠. 이 영화의 흥행이 한국 영화가 다루는 소재와 장르의 폭을 더 넓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영화 <굿바이 싱글>의 포스터. 김혜수의 선택은 옳았다.

영화 <굿바이 싱글>의 포스터. 김혜수의 선택은 옳았다. ⓒ 쇼박스(주)미디어플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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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권오윤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cinekwon.wordpres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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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에 관심 많은 영화인. 두 아이의 아빠. 주말 핫케익 담당.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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