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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17일 새벽 강남역 부근 남녀공용화장실에서 한 여성이 살해되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황망하게 죽은 여성에 대한 추모가 끝나기도 전에 우리 사회는 '과연 이것이 여성혐오 범죄인가'를 가지고 논쟁을 벌였습니다. 뜨거웠던 논쟁은 어느새 다른 이슈에 밀려났지만, 월간 <참여사회>는 여성들이 왜 이렇게 이 죽음에 공감하고 분노하는지, 이 사건 이후에 나타난 일련의 현상들이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인지 다함께 고민해보자는 취지에서 <강남역 10번 출구>를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기자말

18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지난 17일 새벽 노래방 화장실에서 발생한 '강남역 살인' 피해 여성을 추모하는 인파가 몰리고 있다. 추모를 위해 강남역을 찾은 시민들은 추모의 글을 적은 메모지를 붙히거나 헌화를 했다.
 18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지난 17일 새벽 노래방 화장실에서 발생한 '강남역 살인' 피해 여성을 추모하는 인파가 몰리고 있다. 추모를 위해 강남역을 찾은 시민들은 추모의 글을 적은 메모지를 붙히거나 헌화를 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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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일어난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을 사회적 이슈로 만든 건 여성들의 분노였다. 날로 증가하고 있는 강력범죄 중 한 건으로 묻힐 뻔한 이 사건은 강남역에 추모의 포스트잇이 붙기 시작하며 화제가 되었다.

사건이 일어난 다음 날인 18일 오후, 강남역 10번 출구는 수백 개의 포스트잇과 꽃다발로 뒤덮였다. 추모의 주체는 20~30대 젊은 여성들이었다. 그들은 '살아남았다', '여자라서 죽었다'며 여성이기 때문에 죽어야 하는 현실에 대해 공포와 함께 분노를 표출했다. 언론은 너나 할 것 없이 이 기현상을 집중 보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두 번째 분노의 물결이 쏟아졌다. "여자들이 자신을 무시해서" 죽였다는 피의자의 발언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에서 굳이 '여성혐오'라는 맥락을 지워버리려는 언론과 남성들의 반응 때문이었다.

'여자라서 살해당할까 봐 무섭다'는 공포에 찬 여성들의 외침에 대다수 남성은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모든 남자를 가해자로 만들지 말라'며 정색했다. 한 정신병자 개인이 일으킨 범죄인데 왜 모든 남자가 잠재적 가해자 취급을 받아야 하느냐는 것이다. 이런 반응은 보수·진보를 가리지 않고 모든 남초 커뮤니티를 넘어 언론, 그리고 경찰청장의 발표에 이르기까지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차별과 폭력의 기억을 자극한 강남역 사건

1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앞에서 '언론의 여성혐오 조장 보도실태'를 규탄하는 20대 여성들이 모여 '우리는 기자회견女다' 라는 주제로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1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앞에서 '언론의 여성혐오 조장 보도실태'를 규탄하는 20대 여성들이 모여 '우리는 기자회견女다' 라는 주제로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 최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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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이기 때문에 겪을 수밖에 없는 자신들의 공포를, 두려움을 알아주길 바랐던 여자들은 철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남성들의 반응에 격분했다. 남성들이 섣불리 자신들의 입장에서 사건을 재단하고 여자들의 심정을 무시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더욱더 이 일을 '자기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증언이 터져 나왔다. 자신이 '여자이기 때문에' 당해왔던 차별과 폭력의 경험들을 고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죽을 수 있었다', '밤길을 되찾자', '그래도 우리는 어디든 간다',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 를 외치며 강남역에서, 홍대에서, 수원에서, 대구에서, 부산에서 모여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여러 매체에서 분석했듯이 이는 단순히 이번 살인 사건만으로 빚어진 현상이 아니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미디어와 온라인상에서 그리고 일상에서 겪어야만 했던 차별과 폭력에 대한 분노가 이 사건을 기점으로 터져 나오게 된 것이다.

강남역 살인사건과 추모 열기를 다루는 사회 주류의 반응은 지금까지 여성들이 살아오며 몇 번이고 겪어왔던 레퍼토리였다. 여성이기 때문에 당해야만 했던 폭력, 그리고 그에 대한 사회의 몰이해와 방관, 이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여성들에 대한 혐오세력의 역공격. 사건이 일어난 후 2주 동안 여자들은 이것을 다시 한 번 압축적으로 경험하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 이 경험은 지금까지 여성들이 겪어왔던 차별과 폭력에 대한 기억을 자극했다. 이전까지 제대로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고 파편화되어 잠겨있던 기억들을 하나둘씩 꺼내놓는 자기 고백적인 글들이 SNS를 달궜다. 어린 시절 자신의 가슴을 더듬던 사촌 오빠의 손길, 길을 물으며 성기를 꺼내 보였던 아저씨, 학창시절 자신을 성추행한 담임, 자신을 폭행하고 죽이겠다 위협하던 남자친구, 매일 지하철과 길에서 마주하는 남자들의 끈적거리는 불쾌한 시선들.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당해야만 했던 폭력들, 그러나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고 아무도 중요하게 다뤄주지 않아서 한 번도 꺼내놓지 못했던 이야기들, 오히려 당한 사람이 부끄러워할 일, 덮고 넘어가야 할 일로만 여겨져 혼자만의 것으로 꽁꽁 묶어두었던 기억들, 또는 용기 있게 이야기했다가 오히려 손가락질당하고 속해있던 곳에서 고립되었던 경험들이 '여성'이라는 깃발 아래서 공유되며 공공의 사회적 기억으로 표출되었다.

여성혐오 구조가 만든 범죄

강남역 10번 출구에 남겨진 메시지들
 강남역 10번 출구에 남겨진 메시지들
ⓒ 최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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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합니다.'

경향신문이 5월 22일 밤까지 강남역 10번 출구 외벽에 붙어있던 추모 포스트잇 1004개를 모두 기록하며 분석한 키워드 중 상위 10개 안에 들어있던 문구이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이는 그 날 밤의 사건이 우발적이고 우연적인 사고가 아닌, 이 사회 구성원 전체에게 책임이 있는 사회문제의 발현이었다는 자각에서 비롯된 언설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여성을 향해 쏟아지던 혐오에 가만히 있지 않았더라면, 된장녀, 김치녀, 루저녀, 개똥녀, 김여사, 맘충이라고 혐오발언을 할 때 애초에 바득바득 막았더라면, 여자를 남자와 동등한 한 인격체가 아닌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사고가 보편적으로 만연해 있는 이 사회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면, 23세의 젊은 여성이 그날 밤 공중화장실에서 무참하게 칼에 찔려 죽는 일은 없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안타까움에서 비롯된 언설이다.

그러나 살인 사건의 범인이 잡혀서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지금까지,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경찰은 아직도 이 범죄에 여성혐오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번 사건에 대한 여성들의 반응을 과도한 히스테리로 취급하며 '남자혐오(남혐)'란 허구의 문제로 몰고 가는 여성혐오의 정동은 경찰의 진단을 등에 업고 기세등등하게 번져 나가고 있으며, 우리는 다시 한 번 한국 사회에서 여성혐오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에 대한 사회적인 합의를 이룰 기회를 놓쳤다.

여성의 고통에 대한 상상이 필요하다

아직도 왜 이번 사건이 여성혐오 사건인지, 여자들이 왜 이토록 거세게 분노하는지 연결고리를 잘 찾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럴 수 있다. 우리는 결코 타인의 고통을 내 것처럼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이 겪지 못했다고 해서 일어난 적 없는 일로 치부하고,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규정하는 행위는 얼마나 뻔뻔한 남성주체의 오만인가?

나도 그런 위협을 일상에서 겪었다고, 나도 죽을까 봐 두렵다고 소리 높여 외치는 수천의 당사자들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설명을 믿음직하지 않다는 이유로 깡그리 무시하는 일련의 '중립적'이고도 '객관적'인 판단과 규정은 얼마나 허망하고도 폭력적인가.

분노란 자신이 겪은 부당한 고통에 대한 반응이다. 더는 가만히 당하고 있지 않겠다는 자기 존중에서 비롯된 감정이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분노를 이해하기 위해선 우선 그가 겪어야만 했던 고통을 이해해야 한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섣불리 판단 내리기 전에 일단 당사자들의 외침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고통을 끊임없이 상상해보아야 한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상상 없이 우리는 결코 어떤 사건에 대해서도 정당한 윤리적 판단을 내릴 수 없다.

이에 타인의 고통에 대한 수전 손택의 말로 글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이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박예지님은 청년참여연대 성평등분과장입니다. 이 글은 월간<참여사회>7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태그:#강남역10번출구, #여성혐오, #여성, #살아남았다, #여자라서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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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가 1995년부터 발행한 시민사회 정론지입니다. 올바른 시민사회 여론 형성에 기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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