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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철아 잘가그래이.. 아부지는 할말이 없대이" 박 군 아버지의 목소리를 플래카드에 담아나온 6월 항쟁 당시 시위대
 ▲ "종철아 잘가그래이.. 아부지는 할말이 없대이" 박 군 아버지의 목소리를 플래카드에 담아나온 6월 항쟁 당시 시위대
ⓒ ⓒ 6월항쟁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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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에서 6월 29일은 뜻 깊은 날이다. 지금으로부터 29년 전인 1987년 6월 29일 당시 민정당 노태우 대표는 소위 6.29선언을 발표한다. 당시 노태우는 6.29 선언을 통해서 선제적으로 민주화 조치를 취하려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내용적으로 보면 대국민 항복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훗날 6.29 선언은 노태우의 결단이 아니라 전두환 정권의 각본에 의해서 나오게 된 고도의 정치적 이벤트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그래서 6.29 대신 속이구라는 말도 나오긴 했는데, 여하간 6.29을 통해서 한국은 민주화 이행의 가장 어려운 고비를 넘게 된다.

그동안 한국의 민주화 이행 과정에 대한 수많은 연구가 이뤄졌다. 그리고 1987년 6월 항쟁 전후 상황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일반적으로 한국의 민주화 이행을 '타협 및 협약을 통한 민주화'라는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

1987년 상황을 보면 박종철, 이한열 열사 등 여러 민주 열사들의 희생이 있었지만 권위주의 정권과 민주화 세력 사이의 대규모 유혈 충돌이 발생하지 않았다. 물론 전두환 정권과 민주화 세력 사이의 대결이 격화되어 대규모 유혈충돌이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극한 위기감이 감돌기는 했었다.

그러나 양 측 사이의 긴장이 최고조에 이른 시점에서 나온 6.29 선언 이후 평화적인 방식으로 개헌을 통한 민주화 이행에 돌입했기 때문에 한국의 민주화 과정을 '타협 및 협약을 통한 민주화 이행'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전혀 무리가 아니다.

그런데 필자는 이와 같은 해석에 이견을 갖고 있다. 물론 1987년 상황을 놓고 보면 '타협 및 협약을 통한 민주화 이행'이라는 해석은 옳다. 그리고 민주화 이행의 구체적인 성과가 도출된 시기도 1987년이다. 그런데 1987년 상황만을 근거로 하여 한국 민주화 과정, 이행 등 전반적인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무리다.

왜냐하면 1987년은 1979년 이후 한국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1987년의 결과(민주화 이행)을 1979년부터 이어진 것으로 본다면 한국의 민주화 이행을 '타협 및 협약을 통한 이행'으로 해석하는 것은 진실의 절반만을 말할 뿐이다. 왜 그런가?

1987년 6월 전두환이 군대를 투입하지 않은 이유는?

1987년에 대규모 유혈사태가 발생하지 않은 이유는 7년 전인 1980년 광주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피를 흘리며 죽었기 때문이다. 만약 1980년 광주항쟁이 발생하지 않았으면 그 이후에 분명 다른 형태의 유혈사태가 나타날 수 있었다고 판단할 수 있으며 그 때가 1987년 6월일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최근 국민일보가 미국 정부 기밀해제 문서를 단독으로 입수하여 1987년 당시 여러 비사들을 보도하고 있다. 물론 오버도퍼의 '두 개의 한국'과 같은 연구서적 그리고 여러 증언 등을 통해서 당시 상황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은 이미 다 알려진 바 있다.

이 내용을 보면 전두환 정권은 1987년 6월 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는 1980년 광주항쟁 때문이다. 전두환 신군부는 1980년 5월 광주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여 1979년 12.12부터 이어진 기나긴 쿠데타(혹자는 역사상 가장 긴 쿠데타라고도 한다)를 성공시켰다.

그러나 전두환의 쿠데타는 대규모 유혈진압이라는, 그들로서는 예상치 못한 고비를 넘긴 후에야 성공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집권 내내 크나큰 부담을 안고 있었다. 3저 호황 덕분에 전두환 집권기간 동안에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했음에도 6월 항쟁과 같은 전국민적 민중항쟁이 나타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1980년 광주 항쟁과 관련이 깊다.

이처럼 1980년 광주에서 유혈진압을 한 적이 있었음에도 또 다시 군대 투입을 고려할 정도로 당시 한국의 군사 권위주의 정권은 매우 경직되어 있었다. 그렇게 볼 때 1987년 6.29의 경우 권위주의 지배 엘리트 세력 내부에서 온건하고 타협적인 성향을 갖는 분파가 우세해서 나온 것이 아니다.

한국 민주화 이행이라는 역사적 시간을 길게 볼 경우 한국 군부 권위주의 정권은 1980년 광주 항쟁을 유혈 진압하여 정권탈환이라는 쿠데타의 단기적인 목적은 달성했지만, 결국 그 후유증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1987년 6월에 항복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79년부터 1987년까지의 역사적 과정을 함께 볼 필요가 있다

한국 군부 권위주의 정권의 속성을 볼 때 그들이 스스로 유연한 판단을 하여 평화적인 방식의 '타협을 통한 민주화 이행'을 선택할 가능성은 사실상 없었다. 1970년대 초반부터 한국 민주화 운동의 리더였던 김대중은 이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국의 민주화 이행을 위해서는 결국 민주화 세력의 희생이 불가피하다고 인식했었다.

김대중은 민주화 세력과 군사 정권과의 정면 대결이 불가피하다고 보았고, 군사 정권을 향해 비폭력 민중항쟁을 강조하였다. 그 과정에서 그는 민주화 세력의 희생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었다.

그래서 잠재된 대중들의 의식을 깨우치고 그들이 민주항쟁의 대열에 함께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선 우선 먼저 민주화 운동가(정치인, 지식인, 언론인, 종교인) 등이 나서야 하고 그 과정에서 희생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이에 굴복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었다.

이 때 그가 한 말이 바로 유명한 '행동하는 양심'이다. '행동하는 양심'은 민주화 운동가들에게 자기희생적 결단을 촉구하면서 나온 매우 비장한 정치 언어인 것이다. 김대중은 토마스 제퍼슨이 말한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를 종종 인용하곤 했었는데, 이 역시 이와 관련이 있다(참고로 김대중이 인용한 토마스 제퍼슨의 말은 나중에 독재 정권이 김대중의 폭력성, 과격성을 왜곡하는 데에 악용하기도 했다).

1979년부터의 상황을 보면 한국의 군부 권위주의 정권은 매우 경직되어 있었고, 1979년 부마항쟁에서 보듯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국민적 저항의식은 점차적으로 강화되는 상황이었다. 두 세력 사이의 충돌은 그 전과는 다른 형태의 비극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그 비극이 현실화된 것이 1980년 광주였던 것이다.

그리고 1987년 6월 항쟁은 1980년 광주의 경험으로부터 이어진 것이며, 전두환 정권 역시 1980년 광주를 유혈진압한 과오 때문에 1987년 6월에 군대를 투입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한국의 민주화 이행에 대해서 1987년 상황만을 놓고 '타협 및 협약을 통한 민주화 이행'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타당한지 상당히 의문이 든다. 이 이론에서는 군부 권위주의 엘리트의 선택에 대해서 실제보다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여지가 존재한다. 그런데 역사적 맥락을 보면 그렇지가 않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타협 및 협약을 통한 민주화 이행'이라는 해석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다만, 이에 대한 대안적 해석 및 규정에 대해서는 필자 나름의 대안을 아직 갖고 있지는 못하다. 이 점은 한계다. 그러나 6.29 29주년을 맞이하여 이에 대한 문제제기는 필요하다고 본다.


태그:#6월항쟁, #광주항쟁,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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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박사이며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에서 사료연구 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김대중에 대한 재평가를 목적으로 한 김대중연구서인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시대의창, 2021)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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