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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정, ‘옥인동 윤씨가옥 사료조사 결과’, 서울시 문화재과, 2010, 45쪽 재인용(본 자료에서는 ‘자수궁터’를 ‘경우궁터’라고 잘못 표기되어 있어 이를 고쳤으며, 참고로 경우궁은 순조의 생모이자 정조의 후궁인 수빈박씨의 신위가 모셔졌던 종로구 계동 146-2에 위치했던 사당이다.
 김수정, ‘옥인동 윤씨가옥 사료조사 결과’, 서울시 문화재과, 2010, 45쪽 재인용(본 자료에서는 ‘자수궁터’를 ‘경우궁터’라고 잘못 표기되어 있어 이를 고쳤으며, 참고로 경우궁은 순조의 생모이자 정조의 후궁인 수빈박씨의 신위가 모셔졌던 종로구 계동 146-2에 위치했던 사당이다.
ⓒ 김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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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옥인동 일대는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이 시대의 변화 속에서 중첩적으로 거주하던 공간이다. 먼저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문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임금이 무안군(이방원에게 살해된 이복동생 방번)의 예전 집을 수리하도록 명하고 이름을 자수궁이라 하였으니, 장차 선왕(세종)의 후궁을 거처하도록 함이었다."

 조선 문종대 세종의 후궁을 위하여 건설한 자수궁이 있었던 자리로 현재 군인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조선 문종대 세종의 후궁을 위하여 건설한 자수궁이 있었던 자리로 현재 군인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 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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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세종의 후궁을 위하여 지어진 자수궁(慈壽宮)이 바로 이곳 <군인아파트>(옥인동 45번지)가 있는 자리다. 그리고 무안군은 왕자의 난(1398)으로 이방원에 의해 살해된 그의 이복동생 방번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곳은 방번의 집터이기도 한 셈이다. 세종은 소헌왕후 외에도 5명의 후궁을 두었으니 왕이 승하한 후 궁궐을 떠나야 하는 그들에게 마련해준 처소가 경복궁 바로 옆인 이곳이다. 그 후 성종 때 왕비이자 연산군의 어머니였던 윤씨가 빈으로 강등된 채 거처하였으며, 또 앞서 인왕산 치마바위에 대하여 살펴 본 중종 비 단경왕후도 궁에서 쫓겨난 뒤 이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이렇듯 여러 대의 후궁들이 머물렀는데 조선시대 후궁들은 왕이 죽으면 궐 밖에서 살았는데, 재혼을 할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인지 자수궁에 들어온 후궁들 중에는 머리를 깎고 불교에 귀의하거나 또는 여승과 함께 거주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런 자연스러운 변화 속에서 자수궁은 '자수원(慈壽院)'과 같은 사찰이름으로도 기록되고 있다. 그래서 결국 이곳은 한때 5천여 명의 여승을 수용하는 국내 최대의 승방으로 성장하기도 했다.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안장된 명나라 마지막 궁녀 굴씨. 묘지 안내판 뒤에 있는 묘가 그녀의 묘이다.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안장된 명나라 마지막 궁녀 굴씨. 묘지 안내판 뒤에 있는 묘가 그녀의 묘이다.
ⓒ 고양시청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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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명나라 황실의 궁녀였던 굴씨(屈氏)도 이곳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 그녀는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되었을 때 마침 병자호란으로 심양에 인질로 가있던 소현세자를 모시다 그가 귀국할 때 함께 조선에 들어왔다.

하지만 소현세자 사후 청나라의 환국명령에도 불구하고 돌아가기를 거부하고 조선으로 귀화했다. 그녀는 자신의 조국을 멸망시킨 청나라를 증오했다. 또 그녀는 비파를 잘 탔고, 손가락과 휘파람으로 인왕산의 새와 짐승을 불러내고 대화를 나누었다고 전해진다. 이런 뛰어난 재주로 새와 짐승을 길들이는 방법을 조선에 보급하기도 했다.

굴씨의 이런 재주 때문인지 조선인들의 관심은 남달랐고, 그녀에 대한 여러 글이 남겨져 전해 온다. 하지만 그녀가 비파를 잘 타고 짐승을 다룰 줄 아는 재주에 대한 매력도 있었겠지만 그가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 황후를 모셨던 궁녀에 대한 남다른 관심이 작용했을 것이다.

조선후기 사대부는 명나라에 대한 짙은 향수와 청나라에 대한 경멸이 공존했기 때문이다. 굴씨의 삶은 정조 24년(1800) 왕명에 따라 의례의 여러 사례를 모아 놓은 <존주휘편>에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한편 굴씨는 효종의 북벌계획을 알고 큰 기대를 가졌지만 결국 북벌을 보지 못한 채 70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그리고 그의 묘가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 산 65번지에 위치한 까닭은 다음과 같은 그의 유언에 따른 것이다.

"오랑캐는 나의 원수요. 내 생전에 오랑캐의 결말을 보지 못하고 죽게 되었지만 행여라도 북벌하러 가는 군대가 있다면 내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볼 것이니 내가 죽거든 서쪽 교외 길가에 묻어주오."

이렇게 수많은 궁궐의 여인들이 거쳐 간 이곳도 효종의 뒤를 이은 현종 대에 이르러 자수원을 혁파하고 이곳에 북학(北學)을 세웠다.

 도성전도(1834)에 표시된 ‘자수궁교’
 도성전도(1834)에 표시된 ‘자수궁교’
ⓒ 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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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수궁교 옛사진, <경성부사> 1권(1934년)
 ▲ 자수궁교 옛사진, <경성부사> 1권(1934년)
ⓒ 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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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곳과 경복궁 사이에 다리가 하나 있었다(사진 참조). 이 다리는 자수궁을 건설하면서 경복궁에서 이곳에 오기 위하여 만든 다리며, 그 명칭은 '자수궁교(慈壽宮橋)'인데, 약칭 '자수교' 또는 '자교'라고 불렸다.

그리하여 이 자수궁교가 있던 자리 바로 옆에 선교사 캠벨이 교회를 세우며 그 이름을 '자교교회'라 지은 것이다. 따라서 이 교회는 앞서 들른 종교교회와 자매교회인 셈이다. 1922년 자교교회가 이곳에 교회건물을 신축하기 전 1900년 배화여고 루이스 워커 예배당에서의 첫 예배가 종교교회와 자교교회의 모태가 된 것이다.

 배화여고, 종교교회 등과 함께 여선교사 캠벨에 의해 시작된 자교교회
 배화여고, 종교교회 등과 함께 여선교사 캠벨에 의해 시작된 자교교회
ⓒ 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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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앞서 보았듯이 종교교회가 종침교(琮琛橋)에서 그 이름을 차용하였지만 교회 명칭은 종교(宗橋)로 바꾸어 썼듯이, 이곳 자교교회 역시 자수궁교에서 그 이름을 차용하였지만 그 이름이 불교의 자취가 있기 때문인지 한자표기는 '慈橋'가 아닌 '紫橋'로 변형하여 표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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