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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8년 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 일행의 행렬도를 그린 그림이다. 부산문화재단 발간 <평화의 사절단 조선통신사>에 수록되어 있는 사진을 재촬영한 것이다.
 1748년 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 일행의 행렬도를 그린 그림이다. 부산문화재단 발간 <평화의 사절단 조선통신사>에 수록되어 있는 사진을 재촬영한 것이다.
ⓒ 부산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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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진지성(통칭 "자성대")의 동문과 서문 사이, 부산광역시 동구 자성로 99에 가면 보기드문 역사관을 관람할 수 있다. '조선통신사 역사관'이다. 이곳은 조선과 일본을 오간 통신사에 관한 하나의 주제만으로 세운 보기드문 역사관으로, 일본 시모카마가리(下蒲刈)의 '조선통신사 자료관'에 견줄 만한 특성있는 체험학습장이다.

조선통신사역사관을 운영하는 부산문화재단은 2013년 <평화의 사절단 조선통신사>를 발간했다. 이 책의 본문 첫 페이지는 '임진왜란 이후 단절된 국교를 회복하고자 일본 막부(幕府)의 요청에 의해 조선에서 일본으로 파견된 공식 사절단을 조선통신사라 한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본문은 이어 '통신이란 신의를 나눈다는 의미로, 조선통신사를 통한 교류는 신뢰를 기반으로 한 조선과 일본의 평화와 선린 우호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하고 말한다.

신뢰를 바탕으로 두 나라 사이 오간 조선통신사

조선통신사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약 200여 년간 12번에 걸쳐 도쿠가와(德川) 막부의 경사나 쇼군(將軍)의 계승이 있을 때마다 일본을 방문'했는데 '조선 국왕의 국서(國書)를 전달하고 도쿠가와 쇼군의 답서를 받아오는 것이 주 임무였다.' 요약하면, 조선통신사는 일본 군사 정부(1192-1868)를 방문하여 조선 국왕이 보낸 국가 문서를 전달하고, 막부 우두머리(쇼군)가 주는 답장을 받아오는 역할을 한, 조선과 일본 사이의 최고 외교 사절이었다.

조선통신사역사관 누리집의 '조선통신사란?'에 게재되어 있는 내용도 이와 대동소이하다. 누리집은 '1607년부터 1811년까지의 약 200여 년간 조선통신사는 일본을 12번에 걸쳐 방문하였다. 도쿠가와 바쿠후의 경사나 쇼군의 계승이 있을 때마다 방문하여, 조선 국왕의 국서를 전달하고 도쿠가와 쇼군의 답서를 받았다. 제 2회 방문은 교토(京都)의 후시미(伏見)에서, 제 12회 방문은 쓰시마(対馬)까지였으나, 그 외에는 모두 에도(현재의 도쿄)까지 왕복하였고 제 4회부터 제 6회까지는 닛코(日光)에도 방문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라고 소개한다.

<평화의 사절단 조선통신사>와 조선통신사역사관 누리집은 조선통신사의 활동 기간을 1607년부터 1811년까지로 소개하고 있는 점에서도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한 이용자가 누리집 '묻고 답하기'에 "15세기 초에도 통신사라는 이름으로 일본에 파견되었는데 왜 17세기의 통신사와 구분하는 건가요?" 하고 묻자 부산문화재단은 "임진왜란 전후의 15세기 통신사는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소규모로 파견했고, 17세기 조선통신사는 일본의 정세 및 문화교류를 위해 400~500명 사이의 대규모로 파견을 했습니다." 라고 답변한다. 임진왜란 이전의 통신사와 이후의 통신사는 파견 목적과 규모가 다르다는 말이다.

임진왜란 이전과 이후 통신사의 규모 차이

임진왜란 이전과 이후의 통신사는 실제로 그 규모가 크게 달랐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열두 차례 일본에 간 통신사는 평균 464명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사절단이었다.

그 12회 중에는 477명으로 구성된 때가 3회나 되었고, 그리고 473명, 475명, 478명, 485명인 때가 각각 1회였다. 갈 때마다 인원이 대동소이했다는 것은 그만큼 통신사의 조직과 활동이 정례화되어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에 반해, 1413년부터 1479년 사이의 여섯 차례 통신사는 평균 인원이 50-100명에 불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인원 수가 파악되지 않는 4회를 제외하면, 1443년과 1460년 2회의 사절단은 각각 50명과 100명 안팎이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하지만 "조선 통신사" 하면 누구나 임진왜란 직전인 1590년에 일본을 방문한 황윤길과 김성일을 대뜸 연상한다. 1590년의 통신사 사절단은 몇 명으로 구성되었는지조차 아직 규명되지 않은 상태이지만, 일본의 침략 가능성에 대해 서인인 정사 황윤길과 동인인 부사 김성일이 서로 정반대의 예측을 한 일로 말미암아 너무나 유명해져 있기 때문이다.

황윤길과 김성일 두 사람이  '일본 통신사(日本通信使)'로 임명되었다는 사실은 <선조실록> 1589년 11월 18일자에 기록되어 있다. '황윤길과 김성일을 일본 통신사의 상사와 부사로, 허성을 서장관으로 차출하였다(黃允吉金誠一 差日本通信上副使 許筬差書狀官).'라는 문장이 그것이다. 

부산 자성대(부산진지성) 비탈에 건립되어 있는 조선통신사역사관. 사진의 왼쪽이 일본왜성 부산진지성이 있는 얕은 야산이고(정상에 진남대), 역사관 뒤로 조금 걸어가면 동문이 나오고, 이어서 최영 장군 사당이 나온다. 통신사들이 일본에 오갈 때 행사를 열고, 배가 출발하기 전 안전을 기원하며 해신제를 지낸 장소인 영가대는 역사관 바로 앞에 있다.
 부산 자성대(부산진지성) 비탈에 건립되어 있는 조선통신사역사관. 사진의 왼쪽이 일본왜성 부산진지성이 있는 얕은 야산이고(정상에 진남대), 역사관 뒤로 조금 걸어가면 동문이 나오고, 이어서 최영 장군 사당이 나온다. 통신사들이 일본에 오갈 때 행사를 열고, 배가 출발하기 전 안전을 기원하며 해신제를 지낸 장소인 영가대는 역사관 바로 앞에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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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그해 12월 3일자에는 '통신사' 황윤길이 일본 사신 현소(玄蘇)에게 '우리나라가 (파도와 해적 때문에) 귀국(일본)에 통신사를 보내지 못한 지 이미 오래(我國之不通信於貴國久矣)' 되었는데 이번에 '우리 전하께서 귀국 신왕(新王,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신의를 중하게 여기시고, 또 객사(客使, 현소)의 정성을 가상하게 여기어 특별히 통신사를 보내어 백년 동안 폐지되었던 일을 다시 실행하려 하시니, 이는 성대한 행사(修百年永廢之禮 此盛擧也)'라고 말한 내용도 실려 있다.

황윤길의 발언은 1590년보다 100년 전에도 조선과 일본 사이에 통신사가 오갔다는 사실을 증언해준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신편 한국사>도 '(황윤길과 김성일의 파견은) 세종 25년(1443) 통신사 변효문, (부사 윤인보,) 서장관 신숙주를 파견한 이래 약 150년만에 (통신사가 일본에 간) 처음 있는 일이었다.'라고 기술한다.

그런가 하면,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1460년(세조 6)에 정사 송처검(宋處儉)과 부사 이종실(李從實)이, 1479년(성종 10)에 정사 이형원(李亨元)과 부사 이계동(李季仝)이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왔다고 말한다. 어느 쪽이든 황윤길이 현소에게 '백 년 동안 폐지되었던' 통신사가 1590년에 재개되었다고 한 말은 사실이다.

'일본 침략' 정반대 의견 내놓은 황윤길과 김성일

통신사

조선 국왕이 일본의 막부 쇼군(군사 정부의 실권자)에게 보낸 공식 외교 사절을 흔히 '조선 통신사'라 부른다. 하지만 통신사가 오가던 당시 조선에서는 '조선 통신사'라는 호칭을 쓰지 않았다. '일본 통신사, 통신사, 신사' 등을 썼다. '조선 통신사'는 '조선 통사, 신사'와 더불어 일본인들이 사용한 호칭이었다.  

조선은 1403년(태종 3) 명의 책봉을 받는다. 그런데 그 이듬해 일본의 아시카가(足利義滿) 쇼군(將軍)도 책봉을 받는다. (1192년부터 1868년까지 일본에서는 천황은 상징적 존재에 지나지 않았고 실권은 막부 쇼군이 장악했다. 그래서 막부 쇼군은 '일본국왕'으로 칭해졌다.) 결국 조선과 일본은 중국에는 사대(事大)를 하고, 서로는 교린(交隣)을 해야 하는 입장에 놓였다. 이에 양국 사이에는 사절이 오가게 되었다.

조선 국왕이 일본에 보내는 사절은 흔히 통신사, 막부쇼군이 조선에 보내는 사절은 보통 일본 국왕사(日本國王使)라 불렀다. 통신사(通信使)는 국가 사이에 신의(信義)로 통(通)하는 사절(使節)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조선 국왕이 일본에 보낸 사절을 모두 통신사라 부르지는 않았고, 실제로 막부쇼군에게 간 것도 여덟 차례뿐이었다. (조선 전기에 일본으로 파견된 사절은 18회, 일본이 조선에 파견한 사절은 71회였다.) 특히 임진왜란 직후인 1607년, 1617년, 1624년에는 사절단을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라 불렀다. 도쿠가와(德川) 막부를 신뢰할 만한 통신국(通信國)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통신사 명칭은 1636년에 회복되었다.

통신사 명칭이 처음 사용된 것은 1375년(고려 우왕 1)이다. 이때 우왕은 무로마치(室町) 막부의 쇼군에게 왜구 금지를 요청하는 사절을 파견했다. 하지만 이름만 통신사였고, 조선 시대의 통신사와는 내용이 전혀 다른 사절단이었다. 조선 시대의 통신사는 국왕이 일본 국왕의 길사 축하와 흉사 조문 및 두 나라 사이의 긴급 현안을 해결하고자 하는 목적 아래 일본 쇼군(일본 국왕)에게 파견한 국왕사(國王使)로서, 중앙의 높은 관리들로 구성된 삼사(三使) 등은 조선 국왕의 국서(國書)와 예단(禮單)을 지참했다.

이런 통신사가 조선 시대 들어 처음 조직된 것은 1413년(태종 13)이었다. 하지만 일본으로 가던 중 정사 박분(朴賁)이 큰 병을 얻어 귀국함으로써 통신사가 실제로 오간 것은 아니었고, 1428년(세종 10) 정사 박서생(朴瑞生) 이하의 사절단이 최초의 통신사 임무를 수행했다. 그 이후 통신사는 양국의 우호와 교린을 상징하게 되었고, 조선 시대 전체에 걸쳐 총 20회(조선 전기 8회, 조선 후기 12회) 이루어졌다.

통신사 일행이 지나가면 일본인들은 글씨나 그림을 얻기 위해 앞다투어 접근했다. 사진은 1711년 일본인이 글씨를 부탁하자 조선인 소동(통신사 일행 중에는 기예 능력을 갖춘 아이들도 있었다)이 그의 원을 들어주는 장면을 그린 일본인의 그림으로, 부산문화재단 발간 <평화의 사절단 조선통신사>에 수록되어 있는 것을 재촬영한 것이다.
 통신사 일행이 지나가면 일본인들은 글씨나 그림을 얻기 위해 앞다투어 접근했다. 사진은 1711년 일본인이 글씨를 부탁하자 조선인 소동(통신사 일행 중에는 기예 능력을 갖춘 아이들도 있었다)이 그의 원을 들어주는 장면을 그린 일본인의 그림으로, 부산문화재단 발간 <평화의 사절단 조선통신사>에 수록되어 있는 것을 재촬영한 것이다.
ⓒ 부산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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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임진왜란 전에는 왜구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통신사 파견의 주된 목적을 두었다. 일본은 구리를 조선으로 가져가서 쌀, 콩, 목면 등 생필품을 가져가거나, 선종(禪宗)의 유행에 따라 대장경과 범종을 가져가는 경제적, 문화적 목적을 추구했다. 조선의 통신사는 임금의 국서와 함께 인삼, 비단, 호랑이가죽, 매, 문방사우를 쇼군에게 전달했고, 쇼군은 갑옷, 큰칼, 병풍, 서랍장 등의 답례품과 함께 답서를 통신사에게 주었다.

조선 후기에는 전쟁 종결을 위한 강화 교섭, 외국에서 떠돌고 있는 피로인(被擄人)들을 다시 국내로 데리고 오는 쇄환(刷還), 정세 탐문 등에 통신사 파견의 목적을 두었다. 물론 어느 시기이든 형식적으로는 막부쇼군의 습직 축하 등 정치적, 외교적 목적을 표방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일본 국왕사의 조선 파견은 조선 조정이 허락하지 않았다. 일본 국왕사가 부산에서 한양까지 오간 길이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이동 경로가 되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 대신 막부쇼군에 관한 일은 차왜(差倭, 대마도가 파견한 임시 사신)가 대신했다.

통신사는 19세기 중반 소멸되었다. 서구 제국주의가 동양으로 진출하면서 조선과 일본은 서로 다른 길을 갔다. 두 나라는 통신사 교류를 통한 우호와 교린의 구축에 애쓸 겨를도 없었고, 상반된 대외 인식을 바탕으로 독자 노선을 추구했다. 조선은 쇄국정책을 썼고, 일본은 서구에 나라를 개방했다. 일본은 서구와 더불어 조선을 침략하는 데 골몰했던 것이다.

이윽고 황윤길 등은 '일본 통신사' 자격으로 바다를 건너간다. <선조실록> 1590년 3월 6일자는 '일본 통신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서장관 허성이 출발했다(日本通信使黃允吉 副使金誠一 書狀官許筬發行).'라고 말한다.

그런데 <선조수정실록> 1590년 3월 1일자에는 '황윤길을 통신사(通信使)로, 김성일을 부사로, 허성을 종사관으로 삼아 일본에 사신을 보냈는데, 왜사(倭使) 평의지(平義智) 등과 함께 동시에 서울에서 출발했다.'라는 기사가 있다. 따라서 실록의 3월 6일은 적어도 도성을 떠난 날짜는 아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591년 3월 1일자 <수정선조실록>에는 황윤길 등 통신사가 귀국하여 일본의 침략 가능성 여부에 대해 보고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기사는 '통신사 황윤길 등이 일본에서 돌아왔는데 왜사 평조신(平調信) 등과 함께 왔다.'면서, 부산으로 돌아온 황윤길이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것입니다(必有兵禍)!" 하는 내용의 보고서부터 황급히 써서 임금에게 '치계(馳啓, 임금에게 보내는 보고서)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후 조정에 도착하여 임금 앞에 선 정사 황윤길은 '전일의 치계 내용과 같은 의견'을 선조에게 아뢴다. 하지만 부사 김성일은 "(황윤길이 말하는 것과 같은 일본의 침략) 낌새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을 동요시키니 이는 옳지 못합니다." 하고 반박한다. 이 부분은 지금도 독자를 혼란스럽게 한다. 함께 일본에 다녀온 통신사의 정사와 부사가 어떻게 이렇듯 정반대로 다른 의견을 내놓을 수 있단 말인가.

실록을 기록한 사관도 기이한 느낌을 받았던 모양이다. 사관은 기사 본문 안에 '일본에 갔을 때 황윤길 등이 겁에 질려 (풍신수길이 답서를 내놓지 않았는데도 억류될까 두려워 미리 바닷가까지 나와 있는 등) 체신를 잃는 행동을 한 데에 분개한 김성일이 말마다 이렇게 (황윤길의 의견과) 서로 다르게 발언한 것'이라는 자신의 견해를 노출시키고 있다. 사관의 말이 사실이라면, 황윤길 등에 대한 평가와 일본의 침략 가능성에 대한 판단은 전혀 다른 사안이라는 점에서 김성일은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겠다.

또 사관은 '(서인인) 조헌(趙憲)이 일본과 평화롭게 지내자는 주장을 극력 공격하면서(力攻和議策) "적은 반드시 쳐들어 온다(倭必來)" 하고 주장했었기 때문에 (서인인) 황윤길의 의견에 동조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세력을 잃은 서인들이 (동인이 집권하고 있는 조정을 흔들려는 속셈에서) 인심을 어지럽게 하려는 것(搖亂人心)"이라고 배척하였으므로 (일본이 쳐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도) 조정에서 감히 말을 하지 못했다(廷中不敢言).'라는 자기 생각을 덧붙였다.

이 대목 또한 후세인들의 마음을 답답하게 한다. 실록에는 황윤길과 김성일의 상반된 보고에 대해 임금과 조정 대신들이 토론을 하는 장면이 없다. 일본이 쳐들어 올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 하는 국가 중대사를 눈앞에 두고도 모두들 입을 꾹 다물고 있다.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가는 서인 추종 세력으로 몰려 불이익을 받을까 봐, 동인 세력의 눈치를 보느라고 침묵하고 있다. 이른바 당론(黨論)만 있고 개인 의견은 실종되었다. '전쟁이야 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고, 권력 실세들에게 찍혀서는 안 된다' 식의 처세술로 무장한 중앙정부 고위 관리들의 조선이 무슨 수로 전쟁을 제대로 대비할 수 있을 것인가.

게다가 사관은 어전 회의에 참석했던 류성룡이 김성일과 나눈 대화도 기록했다. 류성룡이 "그대가 황윤길과 고의로 다르게 말하는데(君言故與黃異), 만일 전쟁이 일어나면 장차 어쩌려고 그러시오(萬一有兵禍 將奈何)?" 하고 묻고, 김성일이 "나도 왜적이 절대 쳐들어오지 않는다고 단정하는 것은 아닙니다(吾亦豈能必倭不來). 다만 온 나라가 놀라고 의심할까 두려워 그것을 풀어주려 했을 뿐입니다(但恐中外驚惑 故解之耳)." 하고 대답하는 장면이다.

대화에 두 사람만 등장하는 점, 그리고 내용으로 볼 때 이 부분은 회의 종료 후 퇴장 직전에 류성룡과 김성일이 사적으로 주고받은 말을 사관이 슬그머니 본문에 끼워넣은 듯 느껴진다. 이 대목 역시 후세의 독자들을 답답하게 한다. 이런 내용은 류성룡과 김성일이 사적으로 주고받을 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은 당연히 어전 회의에 안건으로 상정되고, 진지한 토론 끝에 최상의 결론을 도출해야 할 국과 과제이다. 하지만 나라 안의 중요 고관들인 류성룡과 김성일은 조정 바깥으로 퇴장하는 지점, 즉 임금과 다른 대신들 귀에는 들리지 않고 그저 사관 혼자만 알아들을 수 있는 곳에 와서 이런 대화를 나눈다. 짐작하자면, 사관은 조정 고관 대작들의 황당한 언행을 역사에 남기겠다는 의도에서 회의 내용도 아닌 이 부분을 실록에 올린 것이 아닐까?    

그런데 <선조수정실록>은 인조반정(1623년)으로 집권한 서인들이 1643년(인조 21)부터 1657년(효종 8)에 걸쳐 편찬했다. 서인들은 기자헌 등 북인들이 같은 북인인 이산해, 이이첨 등은 성인군자처럼 묘사하고, 서인인 이이, 성혼, 정철 등과 남인인 류성룡 등은 허위 사실까지 만들어가며 헐뜯은 <선조실록>을 새로 썼다. (그렇다고 <선조실록>을 없애버린 것은 아니다.) 회의 내용도 아닌 류성룡과 김성일의 대화 부분이 실록에 수록된 것은 <선조수정실록>의 편찬을 주도한 이식 등이 류성룡에 대해 우호적으로 기술하는 과정에서 '부적절하게' 삽입한 에피소드로 여겨진다는 뜻이다.

김성일 체포해서 고문하라던 선조, 금세 생각 바꿔 중책 맡겨

<선조수정실록> 1592년 4월 14일자에는 선조의 황당한 언행도 나온다. 선조는 전쟁이 터지자 '경상우병사 김성일을 체포하여 국문하라고 명했다가 (그가)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석방시켜 본도(경상우도)의 초유사(招諭使)로 삼는다.' 선조는 김성일에게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적은 절대 침략해 오지 않는다(賊必不能來寇)." 하고 주장하여 인심을 해이하게 하고 국사를 그르친(懈人心 誤國事)' 죄를 물었다.

그러나 류성룡이 "김성일의 충절은 믿을 수 있다(誠一忠節可恃)."면서 말리자 선조는 금세 화를 푼다. 그리고는 전쟁 등 위급한 상황에 임금을 대신해서 경상우도 지역의 관군을 독려하고 의병을 일으키는 초유사의 중책을 맡긴다. 오락가락하는 선조의 가벼움도 가관이지만, 일본군의 침략에 대비하지 못한 것을 김성일 혼자의 책임으로 몰고가는 논리가 더욱 큰 문제이다. 전쟁 준비를 제대로 못한 책임은 당연히 결정권을 가진 임금과 조정 대신들이 져야 한다. 그 책임을 김성일에게 미루고, 의병장들에게 미루고, 일선의 장수들에게 미루고...... 

조선통신사 일행이 일본으로 출발할 때, 또 돌아왔을 때 행사를 열었던 영가대
 조선통신사 일행이 일본으로 출발할 때, 또 돌아왔을 때 행사를 열었던 영가대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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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역사관은 그 이름답게 통신사에 대한 모든 것을 말해준다. 제1 전시관은 조선통신사에 대한 정의를 내린 다음, 임진왜란 이후 일본과의 국교 회복 과정을 애니메이션을 통해 실감나게 설명해준다. 통신사를 파견하는 절차, 통신사의 여정, 통신사 관련 주요 인물, 한일 외교의 중심지들, 일본인들이 머물렀던 왜관에 대한 자세한 안내문과 그림들도 게시되어 있다. 영상실에서는 어린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제작된 3D입체영상도 보여준다.

제2 전시관은 조선통신사 일행이 타고 갔던 판옥선의 모형을 보여준다. 일본까지 가는 동안 겪어야 했던 험난한 뱃길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해주는 영상과, 에도(현 도쿄) 성으로 들어가는 통신사 행렬을 재현한 생생한 8면 영상도 보여준다. 통신사의 주요 행로를 알게 해주는 모형 지도도 있고, 말을 탄 채 엄청난 묘기를 뽐냈던 마상재(馬上才)에 대한 특별 전시 공간도 볼 수 있다.

한양에서 부산까지 가는 데도 두 달이나 걸렸다

통신사 파견이 결정되면 조선 조정은 정사, 부사, 서장관을 임명하고 300~500명으로 사절단을 편성했다. 통신사 일행은 한양에서 부산까지 가는 데에만 두 달이나 걸렸다. 사절단에게는 중도 곳곳에서 잔치를 베풀어 주었는데, 처음에는 충주, 안동, 경주, 부산 네 곳에서 펼쳐졌지만 후기에는 지역에 끼치는 경제적 부담 때문에 부산 한 곳에서만 실시되었다.

통신사 일행은 일본으로 출발하는 당일 새벽 1시에서 2시 사이에 해신제(海神祭)를 지냈다. 해신제는 바다의 신에게 일본을 오가는 항해의 무사안전을 비는 제사로, 영가대(永嘉臺)에서 진행되었다. 통신사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을 때에도 사절단 일행과 동래부사(현재의 부산광역시장에 해당)는 이곳 영가대에서 의식을 가졌다.

영가대는 임진왜란 뒤인 1614년(광해군 6)에 처음 세워졌다. 당시 부산진성 근처 해안이 얕고 좁아 새로 선착장을 만드는 호수 조성 공사가 벌어졌는데, 그 과정에서 파올린 흙이 쌓여 언덕이 생겨났다. 경상도 순찰사 권반(權盼)은 호수에 전함을 보관하여 임진왜란의 교훈을 되새기는 계기로 삼았는데, 지금의 부산진시장 뒤쪽 범일초등학교 서쪽 경부선 철로변자리에 언덕이 생기자 그곳에 정자를 건립했다. 하지만 권반은 정자에 이름을 붙이지는 않았다.

1617년(광해군 9) 회답겸쇄환사(임진왜란 직후에 쓰인 통신사의 별칭) 오윤겸이 영가대에서 처음으로 일본행 배를 출발시켰다. 그는 영가대에서 해신제를 지냈고, 귀국했을 때에도 영가대에 올랐다. 1624년(인조 2) 선위사 이민구가 일본 사신을 접대하기 위해 이 정자에 왔다가 권반의 고향 안동의 옛이름이 영가인 데 착안, 정자에 영가대라는 이름을 붙였다. 일제 강점기 때 소실된 영가대를 현재 위치에 복원한 것은 2003년의 일이다.

조선통신사역사관에서 본 영가대
 조선통신사역사관에서 본 영가대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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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는 부산부터는 대마도주(島主)의 안내를 받아 바닷길로 대마도와 시모노세키(下關)를 통과, 오사카(大阪)의 요도우라(淀浦)까지 갔다. 오사카에서 교토로 갈 때에는 막부가 제공한 가와고자부네(川御座船)을 타고 요도 강을 거슬러 항해했다. 가와고자부네는 황금으로 장식된 최고 수준의 화려한 2층 선박이었다.

막부의 통신사에 대한 지극정성은 그뿐이 아니었다. 통신사는 천황이 있는 교토에 갈 때 쇼군이 사용하는 전용 도로로 이동했다. 막부는 그 길에 '조선인가도(朝鮮人街道)'라는 비석까지 세워 통신사의 권위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뒤를 이어 권력을 장악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막부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조선과의 국교 회복이 절실했고, 그 상징인 통신사의 왕래를 적극 지원했던 것이다.

쇼군만 다닐 수 있는 전용 도로를 이용한 통신사 일행

조선 전기에는 막부 최고 권력자인 쇼군(將軍)이 교토(京都)에 있었기 때문에 교토가 통신사의 종착지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쇼군이 도쿄(東京)에 있었으므로 목적지가 도쿄로 바뀌었다. 통신사는 조선의 수도 한양에서 일본의 수도 에도(江戸, 도쿄)까지 왕복 3천㎞를 대략 1년 동안 오가면서 무수한 일본 지식인들과 필담을 나누고 노래와 술잔을 주고받았다. 문화 선진국 조선에서 온 통신사 행렬은 일본 민중들로부터도 열광적 환영을 받았다.

일본에 통신사로 가는 것은 매우 힘들고 위험한 일이었다. 임무를 수행한 정사, 부사, 서장관, 그리고 수행한 관료들과 일반 백성들에게는 승진과 상이 주어졌다. 그런데 일본 막부는 통신사 일행에 특정 직업인들이 포함되기를 바랐는데, 대표적으로 의원(의사), 영원(화가), 마상재인(馬上才人) 등이었다. 의원들과 예조 도화서 소속 화원인 영원들을 통해 일본은 의술과 미술의 발전에 큰 도움을 얻었다. 1680년부터 파견이 정례화된 마상재인은 말 위에서 재주를 부리는 무예 기능 보유자들이었다.

조선통신사역사관 내부의 일부 모습. 통신사 행렬이 에도 성으로 들어서는 광경을 그린 그림이다. 작은 사진에서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그림을 자세히 보면 소동(小童)들이 더러 있다. 이 소동들은 통신사 일행을 수행하면서 견문을 넓혔는데, 춤이나 노래 등으로 일행의 무료함을 달래주기도 하였다. 춤과 노래에도 능한 소동들을 통신사의 일원으로 뽑았던 것이다.
 조선통신사역사관 내부의 일부 모습. 통신사 행렬이 에도 성으로 들어서는 광경을 그린 그림이다. 작은 사진에서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그림을 자세히 보면 소동(小童)들이 더러 있다. 이 소동들은 통신사 일행을 수행하면서 견문을 넓혔는데, 춤이나 노래 등으로 일행의 무료함을 달래주기도 하였다. 춤과 노래에도 능한 소동들을 통신사의 일원으로 뽑았던 것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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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조선통신사역사관이 체험학습 온 학생들에게 나눠주는 '조선통신사 역사관에서 배워요!'라는 작은 홍보물의 내용이다. 부제가 '조선통신사 역사관 재미있는 퀴즈 퀴즈'인 이 홍보물에는 모두 11개의 퀴즈가 실려 있다. 이 11개의 퀴즈가 통신사의 핵심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는지 여부는 문제를 풀어보면 짐작할 수 있겠지만, 역사관 바로 앞 영가대에 앉아 시원한 바람을 쐬면서 곰곰 답을 생각해 보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있는 일이리라.

(1) 조선통신사는 임진왜란 후 일본의 요청에 의하여 ㅁㅁㅁㅁ년-ㅁㅁㅁㅁ년까지 총 ㅁㅁ회 일본으로 파견되었던 문화사절단이다.
(2) 통신사는 ㅁㅁ, ㅁㅁ, ㅁㅁㅁ 세 사신을 포함하여 역관, 제술관, 의원 등 총 400-500명에 이르는 대규모 사절단이었다. 이는 조선의 수도인 ㅁㅁ을 출발하여 일본의 ㅁㅁ까지 왕복 1년 가까이 소요되는 머나먼 여정이었다.
(3) 통신사 중 머리를 땋은 ㅁㅁ들을 볼 수 있는데 이들은 통신사를 수행하고 춤이나 노래가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4) 통신사는 조선에서 일본으로 갔다. 15세기 초부터 임진왜란 전까지 국서를 교환하거나 조선 임금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조선에 온 일본 사람들은 ㅁㅁㅁ라고 불렀다.
(5) 통신사가 극찬한, 일본 시모카마가리에서 대접받은 요리로 3개의 국과 15 종류의 반찬으로 이루어진 음식의 이름은 ㅁㅁㅁㅁㅁㅁ이다.
(6) 통신사의 이동 경로는 '서울(한양)- 충주- 안동- 대구- ㅁㅁ-시모노세키와 아이노시마 사이 해협-(중략)- 오사카- 교토- 나고야- ㅁㅁㅁㅁ- 하코네- 도쿄(에도)- 닛코'이다.

조선통신사 일행이 보여주는 마상재는 일본인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왼쪽은 말 위에서 화살을 피하는 모습, 오른쪽은 두 마리 말을 번갈아가며 타는 모습을 보여준다. 마상재는 단순한 묘기 수준이 아니라 군사훈련의 일환이었다. 사진은 부산문화재단이 발간한 <평화의 사절단 조선통신사>에 수록되어 있는 것을 재촬영한 것이다. 따라서 구도, 색상 등이 원본과는 다르다.
 조선통신사 일행이 보여주는 마상재는 일본인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왼쪽은 말 위에서 화살을 피하는 모습, 오른쪽은 두 마리 말을 번갈아가며 타는 모습을 보여준다. 마상재는 단순한 묘기 수준이 아니라 군사훈련의 일환이었다. 사진은 부산문화재단이 발간한 <평화의 사절단 조선통신사>에 수록되어 있는 것을 재촬영한 것이다. 따라서 구도, 색상 등이 원본과는 다르다.
ⓒ 부산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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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통신사의 정사가 타고 갔던 배는 조선 시대 대표적 전함인 ㅁㅁㅁ의 형태로 만들어졌다.
(8) 통신사가 오사카에서 교토로 가기 위해서는 에도막부가 제공한 배인 ㅁㅁㅁㅁㅁㅁ를 타고 요도강을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이 배는 2층으로 만들어지고 황금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9) 통신시가 교토를 지나면 비와코와 오우미하치만을 지나는데 이곳에는 쇼군이 천황이 있는 교토에 갈 때만 지나가던 전용도로가 있다. 이 도로에는 지금도 '오직 통신사만이 지나갈 수 있다'는 뜻의 ㅁㅁㅁㅁㅁ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10) 통신사가 에도에 도착하면 국서를 교환하고 서로 선물을 주고 받았다. 조선은 쇼군에게 ( ) 등을 선물했고, 쇼군은 ( ) 등을 답례로 내놓았다.
(11) 통신사는 1811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파견되지 않았다. 이유는 통신사의 파견과 접대는 ( ) 때문이다.   


태그:#조선통신사역사관, #영가대, #황윤길, #김성일, #조선통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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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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