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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개봉한 영화 <서프러제트> 공식 포스터.
 지난 23일 개봉한 영화 <서프러제트> 공식 포스터.
ⓒ 필름4, BFI, 인지니어스 미디어, 카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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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 전부터 기대와 논란을 동시에 불러온 영화, <서프러제트>가 지난 23일 개봉했습니다. 여성들의 반응이 뜨겁습니다. 서프러제트란 여성 참정권 운동가를 뜻하며, 이 영화는 멀지 않은 과거인 20세기 초를 배경으로 합니다. 당시 영국 여성들은 반세기 동안 평화 시위로 여성 참정권 보장을 주장했지만, 사회적으로 묵살 당했습니다.

결국 서프러제트들은 1912년을 기점으로 운동의 수위를 높여 인명 피해를 최대한 피하되 사회 시설을 파괴하는 전투적 방식을 취합니다. 그만큼 공권력의 위협에 노출됐지요. 하지만 이것을 감수할 만큼 '모든 인류는 존엄하다'는 신념이 강했습니다. 영화는 참정권 운동이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다는 편견을 깨고자 다양한 문헌을 근거로 '모드 와츠'라는 주인공을 증류해 냅니다.

모드(캐리 멀리건 분)는 어려서부터 세탁 공장에서 일해온 가난한 노동자이자 평범한 아내, 그리고 엄마입니다.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한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고 살아온 것이지요. 영화엔 그런 모드가 실존했던 서프러제트들을 보는 시선, 또 모드 자신이 동료들의 열정과 신념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삶을 찾으며 서프러제트로 재탄생하는 과정이 담겨있습니다.

시민등수론과 무임승차론에 반기를 든 여성들

20세기 초에 나온 엽서입니다. 당시 나온 한 엽서에는 여성이 남성의 품에 안기는 그림 밑에 '서프러제트들이 표를 얻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서프러제트에 대한 조롱을 담은 것이지요.
 20세기 초에 나온 엽서입니다. 당시 나온 한 엽서에는 여성이 남성의 품에 안기는 그림 밑에 '서프러제트들이 표를 얻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서프러제트에 대한 조롱을 담은 것이지요.
ⓒ Dunston-Weiler Lithograph 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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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드가 살던 시대는 최저 임금 기준도 없었고 직장과 가정에는 늘 일거리가 쌓여 있었습니다. 그때만큼은 아니지만 한국 여성도 높은 저임금 노동자 비율, 임금 격차, 경력단절, 유리천장, 노인 빈곤 등으로 유명합니다. 또한 예나 지금이나 경제 성장의 이면에 가난한 임금노동과 가정으로 전가된 노동력 재생산의 부담이 있고, 여성은 이 모든 것에 시달린다는 구조적 모순, 사회적 맥락을 외면하는 '구조 맹인'들이 있습니다.

차별받기에 세금을 못 낼 만큼 가난하고 가난하므로 가부장적 질서에 종속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건데, 20세기 초 미국에서 나온 엽서를 보면 여성을 '무임승차자'처럼 바라보는 시선이 고스란히 드러날 정도였습니다. 여성이 남성의 품에 안기는 그림 밑에 '서프러제트들이 표를 얻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는 문구를 새겨놓아 여성은 원래 남성에게 의존하는 게 자연스러운 존재인 양 낙인찍은 것이지요.

세계 최초로 여성의 참정권이 인정된 것은 1893년, 뉴질랜드에서의 일이었습니다(핀란드 1906, 영국 1918, 미국 1920, 프랑스 1944, 한국 1948년). 1789년 유럽을 자유의 물결로 뒤흔든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이후에도 부유층, 소시민층, 남성들은 여성을 '수동적 시민'으로 낙인찍고 선거권, 피선거권을 동등하게 '돌려주지' 않은 겁니다.

하지만 여성들은 남성이 옭아매던 몇 가지 가부장적 사슬을 '법률적으로' 끊어내려 노력했습니다. 1789년 10월엔 7000명의 파리 여성들이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수용하라'며 베르사유로 행진해 루이 16세를 사로잡는 힘을 보여줬습니다. 

그럼에도 여성은 독립적인 이성적 판단 능력이 부족하다며 참정권을 제한당했습니다. 모순적이게도 노력에 따라 '능동적 시민'으로 승격할 수 있던 빈민층 남성과 달리 여성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이 가능성을 원천 봉쇄당했습니다. 불평등의 이면에는 여성을 소유하고 족쇄를 채우려는 가부장적 욕구가 있다는 게 드러난 겁니다(육영수 <혁명의 배반 저항의 기억> 참조). 이것이 단지 과거의 이야기에 불과할까요.

관람평에 등장한 '군대'라는 키워드, 어떤 의미일까

평가 참여자로 여성, 20대가 많은 가운데 평점은 8.54였다(2016.6.26. 오후 12시 30분 기준).
 평가 참여자로 여성, 20대가 많은 가운데 평점은 8.54였다(2016.6.26. 오후 12시 30분 기준).
ⓒ 네이버 영화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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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우파 주간지 '미래 한국'의 한정석 편집위원은 SNS에서 "여성의 정치 참여에 부정적이다. 투표권을 주는 것도. (중략) 여성이 가진 뛰어난 모성과 공감능력 때문이다. 이 공감 능력이 대중의 '합리적 무지'와 만나면 걷잡기 어렵다. (중략) 여성 스스로 참정권을 제약하는 방법은 없을까. 예를 들어 자신은 정치, 경제, 사회 문제에 대해 잘 모르겠다고 생각되면 남의 말을 듣고 투표하기보다는 자발적으로 투표를 포기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덧붙여 "유럽과 일본, 미국에서 여성 투표권은 인권운동의 결과라기보다는 전쟁에 노동력으로 적극 참여한 애국의 결과로 주어졌다. (중략) 한국은 이와 달리 인권이나 애국에 대한 대가로 주어지지 않았다. (중략) 오늘날 여성들의 투표가 '국가안보'와 같은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고 하는 것인지 의문스럽다"고 주장해 논란을 낳았습니다.

수백 년 전 '세금을 안 내면' 투표권을 줄 수 없다는 구조맹들의 무임승차론이 오늘날 한국에서는 '안보에 관심 없으면' 투표권을 줄 수 없다는 발상으로 계승되는 걸까요? 시민등수론, 무임승차론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위 자료는 <서프러제트>가 개봉 나흘째 되던 지난 26일까지 누적된 네이버 영화 누리꾼 반응(오후 12시 30분 기준)입니다.

분포도 상으로 10점에 가장 많이, 1점에 두 번째로 평점이 몰려있네요. 성별로는 여성이 높은 평점을 줬고(9.86), 남성이 비교적 평균 평점을 깎는 낮은 평점을 줬습니다(6.04). 물론 평점을 낮게 준다고 '무조건' 별점 테러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 경우 그런 경향이 있다고 진단할 만한 근거가 있습니다. 누리꾼들의 140자 평을 의미망 분석을 해봤습니다.

① 분석에는 케이아르케이윅(박한우 & Loet Leydesdorff, 2004), 노드엑셀 등의 분석 툴을 활용. ② 핵심어 추출 결과 28개 산정. ③ 중요도(아이겐벡터 중심성)이 높은 핵심어일수록 그래프 중앙에 위치.
▲ 서프러제트 의미망 ① 분석에는 케이아르케이윅(박한우 & Loet Leydesdorff, 2004), 노드엑셀 등의 분석 툴을 활용. ② 핵심어 추출 결과 28개 산정. ③ 중요도(아이겐벡터 중심성)이 높은 핵심어일수록 그래프 중앙에 위치.
ⓒ 하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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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5점 이하 반응은 파란색, 6점 이상 반응은 빨간색, 공통 반응은 보라색입니다. 핵심 어의 크기가 클수록 자주 언급됐고, 중앙에 있을수록 중요도가 높습니다. 우선 이 '영화'는 '여성'들의 이야기라는 공통의 인식에서 출발합니다. 또한 '한국' '남성'과 '여성'의 상황과 비교도 자주 이루어졌네요. 6점 이상 반응들은 '너무' '좋은' '영화'라며 '꼭' 봐야 한다고들 말합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감동'을 받았다는 반응도 있네요.

'사람' '사회'와 같은 보편적 문제로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모습이 눈길을 끕니다. 그러나 가장 주목할 만한 대목은 바로 '영화' 바로 밑 '현재-우리-싸움-권리'라는 네 쌍둥이 라인입니다. '영화'는 과거 '여성'뿐 아니라 '현재' '우리'가 '권리'를 되찾기 위해 직면해야 할 문제를 담은 이야기라는 생각에 도달했음을 시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싸워야 할 상대 즉 '특권'을 가진 이들은 누구일까요? 5점 이하를 준 누리꾼과, 6점 이상을 준 누리꾼 사이에 관점이 다릅니다. '남성' 쪽에 좀 더 가까운 것으로 봐서 여성들이 140자 평에 많이 참여한 가운데 이들의 관점이 더 많이 반영됐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5점 이하 반응의 분포가 12%에 그쳤음에도 여성과 '특권'도 만만치 않게 가깝게 연결된 건 그만큼 여성을 무임승차자로 몰아세우는 공격이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주로 어떤 공격이었을까요. 일단 영화와 '대한민국' '여성'들을 분리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여성'들은 '의무'는 다 하지 않고 '특권'만 누리려 한다, '군대'와 관련된 '의무'를 다 하지 않는다는 식입니다. 불평등 이슈만 있으면 2년의 시간을 전가의 보도처럼 빼어듭니다. 희생의 보상심리는 강자인 국방부로 향하지 않습니다. 생애주기 전반에 걸쳐 할부로 희생 중인 여성에게 수평폭력으로 굴절시킵니다.

나를 '인정(사랑)'해주지 않을 바에는 모두 하향평준화되어야 한다는 못난 생각일 때도 있고요(관련 기사: 그날 일베의 보상심리 파편은 45도로 튀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군무새(군대+앵무새)'라는 신조어도 생겼습니다. 100년 전 서프러제트들도 '이것들을 위해 내가 군대에서 나라를 지켰다니!'라는 그림으로 자신들을 조롱하는 이들과 싸워야 했죠.

구글 트렌트는 특정 시기의 특정 키워드에 대한 누리꾼의 관심도를 그래프의 상대적 높낮이로 나타내주는 기능이다. 지난 5월 강남 여성 선택 살해 사건 당시 화두가 됐던 '여성혐오'는 최고점을 찍었고 동시에 '여성차별'도 지난 8년간 가장 높은 관심도를 찍었다(기준 시점: 2016년 6월 23일 자정)
 구글 트렌트는 특정 시기의 특정 키워드에 대한 누리꾼의 관심도를 그래프의 상대적 높낮이로 나타내주는 기능이다. 지난 5월 강남 여성 선택 살해 사건 당시 화두가 됐던 '여성혐오'는 최고점을 찍었고 동시에 '여성차별'도 지난 8년간 가장 높은 관심도를 찍었다(기준 시점: 2016년 6월 23일 자정)
ⓒ 하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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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점 일탈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공통으로 '메갈'이 '여성'과 가끔 언급되지만, 상세 분석으로 들어가 보면 5점 이하를 준 누리꾼들이 주로 언급 횟수를 끌어올린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가령 영화와 아무 상관도 없는 "메갈메갈메갈메갈메갈메갈메갈"이란 댓글을 달며 별점 테러를(1점) 하는 식입니다.

'메갈'이 '남성' '혐오'를 한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여성들의 시각은 좀 달랐습니다. 주인공의 말처럼 '폭력'만이 남성들이 알아듣는 유일한 언어라는 지적이 자주 인용됐습니다. 지난 십수 년간 '여성차별'이란 말은 관심을 못 받다가 '여성혐오'라는 말로 수위를 높여야 비로소 관심도가 증가했듯 말입니다. 단, 여성들은 '아직' 폭력의 수위를 높일 의사는 없는 듯합니다. '폭력'은 의미망 가외에 위치했고 '메갈'과 유기적 관계도 맺지 못했습니다.

'별점 테러' 정제된 실제 관람객 평가는?

서프러제트 평점 성별 예매 분포는 여성, 연령별 예매 분포는 20대가 많은 가운데 골든 에그 지수가 99%에 달해 그레이트(GREAT) 등급을 기록했다.
 서프러제트 평점 성별 예매 분포는 여성, 연령별 예매 분포는 20대가 많은 가운데 골든 에그 지수가 99%에 달해 그레이트(GREAT) 등급을 기록했다.
ⓒ CGV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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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점 이하의 140자 평들을 '별점 테러'로 볼 만한 결정적 근거는 실 관람객 평가와 매우 달라 과연 영화를 보고 쓰긴 한 건지 신뢰성이 의심스럽기 때문입니다. 지난 26일 CGV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네이버보다 표본이 많은 904명의 관객이 평가에 참여한 가운데 골든 에그 지수(영화에 대한 고객의 평가를 아이콘과 퍼센트로 표현하는 방식. 아이콘은 평가 결과에 따라 '프라이드 에그', '굿 에그', '그레이트 에그'로 변한다.-편집자주)가 99%에 달해 '그레이트' 등급을 받은 걸로 나타났습니다. 성별, 연령별 예매 분포는 네이버의 140평 참가자 분포와 비슷한 조건이었습니다.

물론 <서프러제트>도 한계가 있는 영화입니다. 실제 역사에서는 유색 인종 여성들의 운동 참여가 있었는데 이를 담아내지 않고 백인들만 등장시키는 바람에 해외에서 인종차별 논란이 있었죠. 또한 여성운동 과정에서 나타난 계층, 노선 차이 등 미묘한 맥락을 담아내기에는 주제의 무게감에 비해 사라 가브론 감독의 감독·연출력이 받쳐주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고요. 전반적인 영상미, OST 등도 불만족스럽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하지만 스토리나 배우들의 연기만으로도 호응을 얻는 건, 과거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닌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모든 인류의 존엄성은 인정받아야 한다는 아주 보편적인 이야기 말입니다. 구조적 모순을 힙을 합쳐 타격해 평등한 세상이 오면 과연 남성이 불행해질까요? 아닐 겁니다.


태그:#서프러제트, #페미니즘, #네이버, #CGV, #여성혐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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