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존재감 영화를 이끈 당찬 여배우 김태리. 어쩌면 <아가씨>는 영화 그 자체보다도 김태리의 데뷔작으로 더 의미 깊은 작품이 될지 모른다.

▲ 그녀의 존재감 영화를 이끈 당찬 여배우 김태리. 어쩌면 <아가씨>는 영화 그 자체보다도 김태리의 데뷔작으로 더 의미 깊은 작품이 될지 모른다. ⓒ CJ엔터테인먼트


3년 만이다. 박찬욱이 장편 극영화를 관객 앞에 내놓은 게 말이다. 비슷한 시기, 6년 만에 괴작을 들고 돌아와 큰 반향을 일으킨 나홍진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박찬욱은 도대체 어떤 영화를 내놓을지 궁금해했다. 당연한 일이다. 한국영화계에 박찬욱보다 대중의 높은 관심을 사고 있는 감독은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쯤 되는 감독은 쉬이 변질하는 대중의 관심과 기대를 오롯이 감내해야 하는 법이다.

박찬욱이 내놓은 영화는 그 이름도 매혹적인 <아가씨>다. 레즈비언 사랑 이야기에 정통한 사라 워터스의 소설 <핑거 스미스>를 바탕으로 시대와 이야기를 상황과 정서에 맞게 조금씩 변주했다. 히데코와 숙희, 백작과 코우즈키까지 네 명의 주연 가운데 앞의 세 캐릭터가 속고 속이고 물고 물리는 이야기가 주요 얼개다.

백작은 외롭고 괴로운 상황에 처한 상속녀를 꼬여 막대한 유산을 가로채고자 한다. 그는 장물아비 손에서 자란 좀도둑 숙희를 상속녀 히데코의 하녀로 들여보내고 아가씨의 마음을 흔들 기회만을 호시탐탐 노린다. 숙희는 숙희대로 히데코를 속이려 하지만 함께 하는 시간 만큼 그녀에 대한 마음 역시 커져만 가는 탓에 갈등이 이만저만 아니다.

오래됐지만 여전히 유효한 박찬욱의 장기

그의 존재감 코우즈키(조진웅 분)가 자신의 존재감을 뽐낸 몇 안 되는 장면. 영화가 코우즈키에게 더욱 많은 분량을 할애했다면 덜 대중적이었을지는 몰라도 더 대단한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 그의 존재감 코우즈키(조진웅 분)가 자신의 존재감을 뽐낸 몇 안 되는 장면. 영화가 코우즈키에게 더욱 많은 분량을 할애했다면 덜 대중적이었을지는 몰라도 더 대단한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 CJ엔터테인먼트


크게 3부로 나뉜 영화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구로사와 아키라가 <라쇼몽>에서 보인 것처럼, 장예모와 쿠엔틴 타란티노, 브라이언 싱어와 나이트 샤말란 등 수많은 뛰어난 감독들이 적어도 한 차례씩 시도했던 '시선의 전환을 통한 반전'을 선보이는 것이다. 오래된 수법이지만 여전히 유효한 이 수법이 <아가씨>가 가진 가장 큰 장치다.

시점이 분할되고 구성이 나뉘는 이 같은 수법에 박찬욱 감독은 꽤 능란하다. 때로는 하나의 시점을 감춰두었다가 뒤늦게 공개하기도 하고 때로는 예상보다 한 박자 빠르게 터뜨리며 관객의 감상을 쥐락펴락하는 솜씨가 정평이 나 있다. 정도 차가 있겠으나 <공동경비구역 JSA>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등 그의 많은 영화가 그와 같은 구성을 가진 건 유명하다.

명확하게 3부로 나뉜 <아가씨>는 1부는 숙희의 것, 2부는 히데코의 것, 3부는 그들 모두의 것이다. 관객들은 숙희의 시선에서 이야기의 한 면을 보고 다시 히데코의 시선에서 그와는 전혀 다른 진실을 마주한다. 결국, 숙희와 히데코가 손을 잡는 3부가 영화의 절정인데 이야기가 다다르는 목적지만큼이나 그 과정 역시 인상적이다.

영화는 시선의 근본적 한계에 주목한다. 화자의 시점에 따라 내용이 달라지는 많은 영화가 그렇듯, <아가씨> 역시 여러 인물의 시선을 두루 거친 뒤에야 관객은 비로소 이야기의 참모습을 알 수 있다. 예견된 반전은 충분한 충격을 제공하고 관객들은 그로부터 오락영화로서의 적절한 재미를 취한다. 요컨대 <아가씨>는 영화의 틀이 안에 든 내용보다 훨씬 큰 힘을 발휘하는 작품이다.

박찬욱의 뾰족함은 어디에...

그 그리고 그 산전수전 다 겪은 노회한 늙은 변태 코우즈키(조진웅 분)가 백작(하정우 분)에게 놀아나는 모습을 그린 건 안이하고 실망스런 선택이다.

▲ 그 그리고 그 산전수전 다 겪은 노회한 늙은 변태 코우즈키(조진웅 분)가 백작(하정우 분)에게 놀아나는 모습을 그린 건 안이하고 실망스런 선택이다. ⓒ CJ엔터테인먼트


아쉬운 건 야욕에 있다. 영화가 탄탄한 틀에 기대 편안하게 전진하는 동안, 달성될 수 있었고 달성돼야만 했던 아까운 지점들이 그냥 비켜 나가고 만 것이다. 적어도 박찬욱과 같은 작가라면 한 번쯤 방망이를 휘둘러볼 수 있었을 법한 공마저도 모두 보내고 그저 안전하고 편안한 출루를 선택한 것이 무척이나 안타까웠다.

박찬욱의 <아가씨>는 숙희와 히데코의 영화다. 사악한 용이 사는 성에서 공주를 구해 달아나는 백마 탄 왕자의 이야기며 주체적인 방식으로 왕자의 선택을 구하는 공주의 드라마다. 이들 사이에 문제가 되는 건 왕자를 자처하는, 실은 가짜에 지나지 않는 '사기꾼' 백작이다. 백작은 숙희와 히데코 사이를 오가며 계획을 주도하고 모든 금은보화를 탈취해 달아나려 하지만 숙희와 히데코의 작전에 보기 좋게 말려 뒤통수를 맞고 마는 인물이다. 사악한 용으로부터 공주를 구하려는 숙희의 용감한 결단과 그저 금은보화를 가로채겠다는 백작의 저속한 계획은 처음부터 상대가 될 게 아니다. 이처럼 전형적인 동화에서는 말이다.

문제는 백작이 주목받는 과정에서 진짜 악당이 사라진다는 점에 있다. 저택의 주인으로 한 번 용트림에 저 용감한 용사조차 움츠러들게 한다는 사악한 용, 코우즈키 영감의 존재는 영화 속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숙희와 히데코, 백작이 자기 집 안뜰에서 뛰노는 동안 가난한 조선인으로 태어나 대저택의 주인이 됐다는 코우즈키는 그저 우스꽝스러운 노인으로 그려질 뿐이다.

코우즈키의 존재감이 적기에 히데코가 겪는 억압 역시 충분히 충격적이거나 고통스럽게 다가오지 않는다. 히데코는 저택에 갇혀 어린 시절부터 온갖 고통을 감내했다기엔 너무도 평범하고 정상적인 모습이다. 그녀가 당했을 고통을 생각하면 그저 천천히, 그리고 힘없이 말하는 연약하고 새하얀 여자가 김민희가 그려낸 히데코의 전부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저택을 찾은 사내들이 내보이는 변태적 욕망 앞에서 <금병매>와 사드풍 소설 따위를 몸소 읽고 연기했을, 그래서 죽음까지 생각했을 히데코의 고통은 영화에선 그저 동화 속 여느 역경처럼 묘사될 뿐이다. 가진 것 없는 조선인의 몸으로 저 식민시대에 일가를 이루고, 수십 년 간 온갖 변태적 행위를 연마해온 코우즈키의 진면목이 영화에서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는 건 실망스러울 뿐이다. 그가 고작 사기꾼 백작 앞에서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놀아나는 모습을 보는 건 그래서 웃프(웃기고 슬프다의 준말)기 짝이 없다.

돌아보면 <아가씨>는 한국영화에 익히 나온 적 없는 새로운 작품이 될 수 있었다. 박찬욱과 같은 뛰어난 감독이라면, 그가 복수 3부작에서 보인 것처럼 자신만의 확고한 스타일로 대중의 취향을 거슬러 마침내는 모든 반대자를 설득해내는 그런 영화를 찍어내리라는 기대도 무리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코우즈키를 생략해 용이 없는 성을 만들어 놓고는 안이하고 편안한 동화 속 이야기에 안주하고 말았다.

흔히 나이가 들면 모난 부분이 갈려 둥글둥글해지는 게 순리라고들 한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자기만의 뾰족함을 간직하는 소수의 사람도 있다. 나는 박찬욱이 후자일 줄 알았다.

<아가씨> 포스터 <아가씨>는 여러모로 아쉬움을 남기는 영화였다. 그가 박찬욱이었기에 더더욱.

▲ <아가씨> 포스터 <아가씨>는 여러모로 아쉬움을 남기는 영화였다. 그가 박찬욱이었기에 더더욱. ⓒ CJ엔터테인먼트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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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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