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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떡볶이 먹고 갈까?"

오래간만에 일찍 퇴근하는 길, 엘리베이터 앞에서 동료가 물었다.

"그래, 빨리 먹으면 이모님 가시기 전에는 도착할 수 있겠다." 

떡볶이를 먹는 시간조차 아이를 돌봐주시는 이모님 퇴근시간을 계산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워킹맘이다. 어찌 됐든 퇴근 후 동료들과 먹는 간식과 수다는 힐링의 시간이다. 옆의 남자 동료에게 물었다.

"차장님도 가실래요?"
"전 와이프가 맛있는 거 해놓는다고 해서…."

일순간 부러움 섞인 탄성이 마구 흘러나온다.

"아, 나도 와이프가 있었으면 좋겠다." 
"나도~!" "나도~!"
"나는 밥 없어도 좋으니 설거지만 없어도 좋겠어."
"나도~!" "나도~!"

듣고 있던 다른 사람들 모두가 웃었다. 아내가 전업맘이 아닌 경우, 집에 돌아가 밥을 얻어먹기란 남자나 여자나 매한가지지만, 워킹맘들은 퇴근 후 쌓인 설거지와 널려있는 집안일과 마주치지 않아도 된다.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결혼 전 vs. 결혼 후

영화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중 한 장면
 영화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중 한 장면
ⓒ 박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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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설경구와 전도연이 출연한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영화가 있었다. 그 영화의 내용은 아직 미혼인 설경구와 전도연이 풋풋한 사랑을 키워나가는 것. 하지만 결혼 후 이 말의 의미는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사랑하는 아내보다는 공동의 집안일을 대신해주는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종종 든다. 영화의 끝은 사랑을 이룬다는 해피엔딩으로 끝났지만 만약 결혼 이후 아이 육아까지 상황이 그려졌다면 그들이 생각한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판타지는 어떻게 끝이 났을까?

요즘은 맞벌이 부부가 많다 보니 결혼 전부터 상대방이 나를 위해 밥을 짓고, 요리를 하고, 빨래를 하고, 온갖 청소와 잡동사니를 정리정돈 해주길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7080세대는 물론이고, 요즘 입사하는 젊은 남자 사원들 사이에서도 집안일은 필수라는 말이 나올 정도니까.

그런데 가끔 내가 불편하게 바라보는 순간은 이런 거다. 신혼 시절, 집안일을 같이 놓고 남자들은 집안일을 같이 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며 뿌듯해하고 스스로를 대견스러워 할 때다. 그 배경에는 '나는 다른 남자들과 달리 집안일을 많이 돕고 있다'는 의식이 깔려 있으리라. 자신의 할아버지는 물론 아버지 세대에서도 가사분담의 불평등을 보고 자란 세대임에도 말이다.

하지만, 여자들은 결혼 이후 음식을 못한다거나, 집안 청소에 자신이 없다거나, 해도 표시가 나지 않는다는 말을 하곤 한다. 자라면서부터 봐온 여자들의 세계는 늘 가족을 위해 밥을 짓고, 음식도 맛나게 하고, 빨래, 청소 등 모든 일을 척척 해내던 모습이었으니까. 인식이라는 게 참 무섭다. 살림 고수와 살림 초보인 자신을 비교하지 말라고 해도 비교되는 건 자연스럽다.

그래도 신혼 시절은 가사분담이 적절히 이뤄지는 기간이다. 나 또한 집안일에 헌신적인 어머니 밑에서 자란 남편과 결혼했고, 신혼시절 남편은 빨래와 청소·정리정돈을 전담했고, 나는 요리와 설거지를 전담했다. 가끔 남편이 나를 위해 특별식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나는 가사분담에 불평불만이 없었다. 하지만, 관성의 법칙은 대단하다. 그리고 사람이 변하기는 정말 어렵다. 결혼이라는 제도, 신혼이라는 상황 아래 그도 나도 많이 노력했지만, 그가 다시 헌신적인 어머니 밑에서 자란 아들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사분담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

결혼한 남녀가 살면서 가사분담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은 워킹맘이 육아휴직을 하면서부터다. 첫아이를 낳은 기쁨도 잠시 산후우울증과 어설픈 초보 부모의 고난을 감내하느라 혼란의 시기를 겪게 된다. 육아라는 삶의 무게에 집안일까지, 어느 순간 이 모든 것은 아내인 나만의 역할로 자리잡는다.

여자들은 아이들을 낳으면서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하게 된다. 남자들에게도 육아휴직이 법적으로 허용되긴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나라 정서상 보편적으로 사용하기엔 무리가 있다. 이 육아휴직 기간 동안 육아와 집안 살림을 여자들이 도맡게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유는 워킹맘일수록 직장에서 겪는 스트레스와 압박감, 퇴근 후의 피로감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직장을 다니는 남편을 배려하는 경우가 많고, 남자들의 경우는 아이가 태어남으로 인해서 집안 경제에 대한 책임감이 더해져서 더욱 직장생활과 사회생활에 에너지를 쏟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 구조는 (우리가 자라면서 많이 답습했던) 여자는 집안 살림, 남자는 사회생활 구조다. 많이 봐왔고, 익숙했던 구조이기 때문에 육아휴직 기간 동안 이렇게 변하는 데 큰 이견이 없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워킹맘들이 복직하면서부터다. 이때 다시 여자들은 사회로 복귀하므로 육아에 대한 문제, 가사분담에 대한 것을 남편이 같이 해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남편은 한번 떠안은 가장이라는 무게감에서 쉽게 벗어나질 못한다. 거기엔 '아내는 최후의 순간에 아이를 키우러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지만, 나는 오로지 사회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기 때문 아닐까.

여기서부터 갈등은 발생한다. 만약 복직 후 아이 양육을 시어머니가 도와주신다면 남편의 가사분담은 더욱 요원해질 수밖에 없다. 시어머니가 생각하는 집안일은 나와 시어머님의 일이지, 남편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워킹맘들은 아이를 맡아주시는 고마움 때문에 집안일에 대해 함부로 왈가왈부할 수 없다. 어쨌거나 마음 놓고 아이를 맡길 수 있으니 모든 걸 감내하는 것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가 아닌 남편과 사는 이유

맞벌이 10년차, 남편이 아이들을 위해 준비한 아침
▲ 남편이 만든 아침 맞벌이 10년차, 남편이 아이들을 위해 준비한 아침
ⓒ 이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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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 따뜻한 밥상 앞에 앉기 힘든 건 맞벌이 부부 모두 맞닥뜨리는 현실이다. 그들이 자라면서 가사분담에 대한 교육은 없었지만, 요즘 남자들 대부분 '집안일을 도와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이 '도와준다'가 '같이 하는 것'으로 인식되지 않아 아내들은 또다시 분노하지만, 어쨌거나 남편들도 꽤나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다만, 조금 느리게 변화하고, 그 변화의 꼭짓점마다 아내의 칭찬이 가미돼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킹맘의 든든한 지원군은 남편이다. 제3자가 아이들을 양육을 도와준다고는 하더라도 주말이나 아이들 방학, 급작스러운 회식이나 야근을 하게 될 경우 나서는 지원군은 바로 남편이기 때문이다. 나와 남편은 올해로 결혼 10년 차다. 지금도 어떤 집안일은 디테일하게 목록을 나열해 보여주고 시켜야만 하지만, 남편도 이젠 제법 집안일에 내공이 쌓였다.

아이들에게 아침을 먹이고, 씻기고, 준비물을 챙겨서 유치원 셔틀버스까지 태워 보내는 것은 남편의 몫이다. 남편의 사무실이 집에서 가깝기 때문이다. 남편은 밥을 잘 먹지 않는 두 녀석의 입맛을 위해 여러 가지 요리를 개발하기도 하고, 자신이 만든 요리를 아이들이 잘 먹기라도 하는 날에는 뿌듯함에 요리 레시피를 페북에 올리기도 한다.

퇴근 후 아이들 씻기고 재우는 건 남편과 내가 번갈아 가면서 하는데, 아이들 양치질과 씻기는 건 나보다 남편이 낫다. 남편이 몇 개월 해외에 있는 동안 아이들 충치가 늘었다면서 자기가 도맡기 시작했다. 주말에는 여전히 집안일의 대부분이 내 몫이지만, 어쨌거나 남편의 도움은 직장생활을 하는 내게는 큰 존재다.

우리는 모두 성장하는 존재

이렇게 되기까지 그와 나는 무수히 많은 갈등과 다툼, 화해, 인내의 과정을 거쳤다. 사실 많은 워킹맘들이 가사분담으로 남편과 다투다가 결국은 갈등과 화해의 과정도 귀찮고 다툼도 귀찮아서 '그냥 내가 하고 말지'로 결론 내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 또한 많이 그랬었고, 지금도 어떤 부분에서는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그냥 내가 하고 말지'가 만성이 돼버리는 순간, 집안일도 만성이 돼버린다.

남편도 나도 처음부터 부모로 태어나지 않았다. 처음부터 아내, 남편으로 태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직장에서와 마찬가지로 모두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가족의 구성원일 뿐이다.

그 구성원 중 누군가는 빨리 적응하지만, 누군가는 늦게 적응하고, 느리게 진화하는 구성원도 있다고 생각하자. 신입사원으로 입사했을 때를 생각해보자. 잘하는 누군가가 느린 구성원을 도와주기도 하고, 나중에는 또 도움을 받기도 하면서 조직과 개인은 성장해간다. 가정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어느 정도 스펙과 인성을 갖추고 회사에 입사하듯, 어느 정도 같이 살아도 되겠다는 판단을 하고 가정을 이뤘다.

성장해가는 과정이 모두에게 힘겹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그리고 남편이 집안일에 조금 느리게 성장해간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가사분담에 대한 갈등은 조금 줄어들지 않을까? 어쨌든 우리는 남편이란 동지와 같이 길을 걸어가야 하는 존재이니까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이혜선 시민기자의 다음브런치와 네이버블로그 <이틀, 두가지 삶을 담아내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워킹맘,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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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하면서 프리랜서로 글쓰는 작가. 하루를 이틀처럼 살아가는 이야기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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