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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침을 퉤, 정아(나문희 분)의 복수가 통쾌했다.
 물에 침을 퉤, 정아(나문희 분)의 복수가 통쾌했다.
ⓒ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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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영아! 물."

석균(신구 분)이 아내 정아(나문희 분)에게 소리친다. 정아는 물에 침을 '탁' 뱉는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물에 넣어 '휘휘' 젖는다. 침을 뱉은 증거를 없애려는 듯. 석균은 그 물을 시원하게 마신다. 드라마를 보던 나는 정신없이 웃었다. 요즘 tvN에서 방영 중인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의 한 장면이다. 소심한 정아의 복수에 웃음이 나왔다.

옛날 생각이 난다. 40년 전, 엄마도 저렇게 아버지한테 '절절'매며 살았다. 아버지가 퇴근하면 엄마는 물을 데웠다. 대야에 담은 따끈한 물을 들고 언니가 1층 아버지 방으로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갈 때 물이 넘칠까 봐 대야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조심조심 발을 내디뎠다.

발수건을 깔고 그 위에 대야를 올려놓았다. 아버지는 그 물로 얼굴과 발을 씻었다. 나는 수건을 준비해야 했다. 언니가 대야를 방에서 치우면 엄마가 2층에서 저녁상을 가지고 내려왔다. 아버지가 식사를 다 마치기 전에 숭늉이 준비돼 있어야 했다.

엄마는 물린 상을 들고 2층 부엌으로 올라갔다. 매일 아침저녁 하루에 두 번씩 아버지 밥상이 2층에서 내려왔다. 어디 밥 뿐일까? 언제든 아버지가 부르면 2층에서 물이 내려가고 재떨이가 내려갔다.

엄마는 아버지가 군대생활을 오래 해서 그러시는 거라고 했다.

"장교는 졸병들이 다 해주잖아? 너희 아버지는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해. 그게 버릇이 들어서 이때까지 그러는 거야. 아주."

대학생이 됐을 때는 아버지의 물심부름이 싫어서 혼날 각오하고 반항을 하기도 했다.

"내가 왜 물까지 가져다 드려야 하는데요? 물은 아버지가 갖다 드셔도 되잖아요?"

아버지는 내 당돌한 말에 당황하셨는지 화도 안 내고 '허허' 웃으셨다. 그렇게 하고 나니 물 심부름 횟수가 줄어들었다.

엄마에게 '강추'한 드라마, 그나저나 제목 참 어렵다

tvN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
 tvN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
ⓒ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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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찍' 소리 못하고 살던 아내가 남편에게 속 시원히 복수하는 드라마를 열광적으로 좋아한다.

'이 드라마 엄마가 보면 진짜 좋아하시겠다.'

엄마가 좋아하실 모습이 눈에 보인다. 11회 예고편에서 완(고현정 분)이 말한다.

"복수를 하려면 이렇게 해야지. 정아 이모처럼."

이제 곧 정아의 복수가 시작된다고 하니 엄마는 더 통쾌해하면서 볼 것이다. 친정에 당장 전화를 했다.

"엄마 노인들 이야기 나오는 드라마 있는데 엄마가 보면 좋아할 거 같아."
"어디에서 하는 건데?"
"tvN에서."
"뭐? 어디서 한다고? 드라마 제목은 뭔데?"
"디.어. 마.이. 프.렌.즈."
"디? 뭐라고?"

아, 미치겠다. 이건 도대체 팔순 넘은 부모님에게 전화로는 알려 드릴 수 있는 드라마 제목이 아니다. 이름 좀 쉽게 한글로 지으면 안 되나?

"금요일 토요일 저녁 8시 반에 하는 건데요. 김혜자, 신구, 나문희씨가 나온대요."

알았다고는 하시는데 못 찾으실 거 같다. 친정 가서 종이에 매직으로 크게 드라마 제목을 써 드려야겠다.

수십 년 지난 이야기, 엄마는 지금도 몸서리

엄마는 극중 석균(신구 분)을 보고, 아버지를 떠올렸다.
 엄마는 극중 석균(신구 분)을 보고, 아버지를 떠올렸다.
ⓒ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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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와 12화를 봤다. 정아는 예고대로 집을 나갔다. 석균은 6000만 원이 든 통장을 들고 정아에게 가서 해외여행 갈 테니 집으로 돌아가자고 한다. 정아는 다 필요 없다고 잠을 자 버린다. 석균은 정아가 집으로 돌아올 줄 알았다가 크게 실망을 한다.

그는 지난 일을 생각하며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생각한다. 유산기가 있어 병원에 가겠다는 아내에게 엄살이라 무시했던 일. 하혈하고 병원에 이틀인가 입원하고 돌아온 아내에게 "일어나 밥해" 하고 말했던 일. 수만 가지 수천 가지 일을 생각하며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다. 잘못을 깨달았으니 어떤 식으로든 석균은 정아에게 사과를 할 것이다.

다음날, 김치와 반찬을 싸 가지고 친정에 갔다. 매직으로 드라마 이름과 방송국명 방송 시간을 적어 드리려고 하는데 엄마가 말을 꺼낸다.

"야, 그 드라마 봤어. 진짜 재미있더라."
"어떻게?"
"아버지가 이리저리 돌리다가 어떻게 찾아냈어. 그런데 어쩜 신구랑 너희 아버지랑 그렇게 똑같냐?"
"똑같지. 돈 못 쓰게 하는 것도 그렇고."

"너희 아버지가 작은 언니랑 오빠 낳을 때 엄마한테 막 뭐라고 그랬어. 어디서 뭔 이야기를 듣고 와서는. 다른 여자들은 말이야. 농사도 짓고 살림도 다 하면서 젖 먹이고 잘 키우는데 왜 그 비싼 분유를 먹이냐고 막 뭐라고 그러는 거야. 뭘 몰라도 그렇게 모를 수가 있냐? 쌍둥이는 낳았는데 젖은 부족하지. 내가 그때 일만 생각하면 기가 막혀서. 어떻게 돈을 못 버는 것도 아니면서 자기 자식 먹는 분윳값이 아까울 수가 있어?"

"그래서?"
"그냥 못 들은 척하고 계속 먹였지. 사실 엄마가 아버지가 하는 말은 다른 건 다 들었는데 그 말만은 안 들었어. 지금 생각해도 진짜 잘한 일이지. 사실 그땐 분유가 엄청 비쌌어. 시골이라 구하기도 힘들고. 그때 일만 생각하면 으이고."

50년도 더 지난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 엄마는 몸서리를 친다. 지금이야 젖이 안 나와 분유 먹인다고 구박받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지만 그 시절, 그 시골에서는 달랐다. 아마 그 동네에서 분유 먹이는 집은 우리 집 뿐이었을 거다.

엄마는 가슴 속 깊이 곰팡이 낀 상처 하나를 꺼내 내게 보여준다. 엄마의 상처에 밝은 햇살이 들었으면 좋겠다. 아버지는 석균처럼 아내에게 상처 주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을까? 그리고 옛일을 사과하실까?

부모님이 같이 드라마 보다 보면 아마 옛일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을 거다. 그러다 보면 엄마가 눈물 바람을 할 거고. 어쩜 지난 일 이야기하다 다투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이제는 아버지가 '그땐 정말 뭘 몰라서 그랬어. 미안해' 아무 핑계 없이 딱 한 마디로 사과하셨으면 좋겠다.

드라마가 한 회 방송될 때마다 친정에 전화해서 엄마한테 "어떠셨냐?" 물어야겠다. 공감도 해 드리고 상처도 어루만져 드리며. 부모님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드라마가 있다는 건 내겐 너무 좋은 일이다. 이런 노인 드라마가 계속 만들어지면 좋겠다. 좋은 대본 쓴 노희경 작가와 명연기 펼쳐준 배우들에게 너무 고맙다.


태그:#부모님의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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