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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여름날, 가볍고 시원하게 산책할 수 있는 고마운 남산.
 무더운 여름날, 가볍고 시원하게 산책할 수 있는 고마운 남산.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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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남산은 조선시대 한양의 남쪽에 있는 산이라서 지어진 이름이지만, 지금은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 한가운데 우뚝 솟은 가장 큰 공원이기도 하다. 산행이 아닌 가벼운 산책은 물론 자전거 애호가, 관광버스를 타고 온 외국 관광객들까지 찾아오는 등 많은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소중한 곳이다.

300미터가 채 안 되는 도심 속 낮은 산이지만 시민들에게 건강과 계절의 즐거움을 선사해주는 데는 이만한 곳이 없지 않나 생각한다. 무더위가 찾아온 이맘때면 해 저문 저녁나절 도심의 야경이 발아래로 펼쳐지는 시원한 산중에서 여유롭게 산책을 할 수 있으니 더욱 고마운 산이다. 

지난해 11월 남산의 북측 순환로와 남측의 순환로를 연결한 7.5km 숲길, 남산 둘레길이 생겨났다. 남산을 크게 한 바퀴 돌아 산책할 수 있는 편안한 길이다. 오뉴월 무더위와 미세먼지에 지쳐가던 날, 친구와 함께 남산 둘레길을 여유롭게 걸어봤다. 서울에 올라와 산 지 20년이 다 된 부산이 고향인 친구. 남산 둘레길 한 바퀴 돌아보면서 외친 한마디는 "우와! 남산이 이리 좋았나?"였다. 도심 복판에 저녁 나절에도 거닐 수 있는 아늑한 산책로와 쉼터가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단다. 

서울의 다른 산처럼 남산도 여러 들머리길이 있다. 그 가운데 남산 둘레길로 가는 대표적인 곳은 다음과 같다.

▲ 동대입구역 6번 출구 – 장충단 공원 – 남산 북측 순환로
▲ 한강진역 1번 출구 - 하얏트호텔 방향 – 남산 야외식물원
▲ 명동역 3번 출구 – 남산 케이블카 – 남산 북측 순환로
- 문의 : 중부공원녹지사업소 (02-3783-5900)


일제가 공원으로 만든 '현충원', 장충단

원래 자리인 청계천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정겨운 옛 돌다리 수표교.
 원래 자리인 청계천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정겨운 옛 돌다리 수표교.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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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 3호선 전철 동대입구역에 내리면 장충단 공원을 거쳐 남산 둘레길로 들어서게 된다. 정다운 옛 돌다리(수표교) 아래로 지하철 역사의 지하수를 이용한 연못과 실개천이 흐르는 장충단 공원은 도심 속의 쾌적하고 예쁜 공원이다. 신라호텔과 동국대학교 사이에 있는 이 공원에서 지난 1970년대까지만 해도 정치집회를 하면 이곳에서 열렸단다.

당시 서울에 100만 인파가 운집할 수 있는 너른 광장이 이곳뿐이었다니, 공원이 다시 보였다. 신라호텔이 들어서면서 규모가 크게 줄어 들었지만 많은 시민들이 찾아와 쉬어가는 편안한 공간이다. 돌다리 아래로 난 산책로에서 마주친 남녀 어르신들 사진을 찍어주다가 놀라운 얘기를 듣게 되었다.

조선시대 만든 이 돌다리(수표교, 水標橋)는 60년 대 청계천 복개공사 때 이리로 옮긴 것이며, 장충단 공원은 원래 대한제국 시절 고종황제가 조성한 국립 현충원 같은 곳이었는데 '일본놈'들이 다 뭉개고 공원으로 만든 것이란다. 내가 알던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공원 중 하나였던 장충단 공원이 원래 공원이 아니었다니... 수표교가 제자리인 청계천으로 돌아가지 못한 이유는 수백억 원의 막대한 비용이 추산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장충단 공원 가운데 서있는 비석이 눈길을 끈다.
 장충단 공원 가운데 서있는 비석이 눈길을 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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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가운데에 웬 비석이 서 있어 보니 독특한 필체의 한자가 새겨져 있었다. '將忠壇(장충단)', 충성스러운 장군을 기리는 제단이라니... 그 유래가 궁금해 안내글을 읽다가 깜짝 놀랐다. 정말 어르신 말대로 장충단은 원래 공원이 아니었다.

1895년 8월 20일, 고종의 부인 명성황후가 일본의 자객들에 의해 경복궁에서 시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궁내부 대신 이경직, 시위대장 홍계훈 등 많은 대신과 장병들이 자객들과 맞서 싸우다가 목숨을 잃었다. 이에 고종 황제는 그들의 영령을 위로하고자 1900년 11월 장충단이라는 사당을 짓는다. 장충단은 본래 공원이 아니라 순국한 사람들을 기리는 국립 현충원 같은 곳 이었던거다.

1910년 8월 장충단은 일제에 의해 폐사되고 말았다. 장충단이 공원으로 조성된 것은 1919년. 창경궁이 창경원이 된 것처럼 일제는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박문사(博文寺)'라는 절을 세우고 벚나무를 심고 공원을 조성했다. 박문사는 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추모하는 사찰로, 광복 후 모두 철거했다. 비석의 '奬忠壇(장충단)' 이라는 세 글자는 순종이 황태자였을 때 쓴 글씨이며, 뒷면에는 민영환(구한말의 문신, 순국지사)이 쓴 143자의 찬문(撰文)이 새겨져 있다.

낮이나 밤이나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어주는 고마운 산

여름밤에 산책하면 더욱 좋은 7.5km의 남산 둘레길.
 여름밤에 산책하면 더욱 좋은 7.5km의 남산 둘레길.
ⓒ 남산 둘레길 안내판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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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충단 공원을 지나 남산 둘레길 표지판을 따라 계단을 오르면 길은 자연스레 남산의 북측 순환 숲길(3.4km)로 이어진다. 남산의 자연을 최대한 가까이 만날 수 있는 아름다운 산책길이다. 과거엔 차량들이 지나갔는지 아스팔트길에 차도 표시가 나있지만 이젠 자전거도 못 지나가는 보행자 전용길이다.

차들이 지나다녔던 남산 북측 순환로엔 1960, 1970년대 군사정권 당시 안기부(안전기획부)와 중앙정보부 건물들이 줄지어 들어서 남산이라는 이름을 무섭게 만들기도 했다. 당시 "남산에 가면 못 돌아온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이후 안기부가 국가정보원으로 이름을 바꿔 서초구로 떠나면서 비로소 남산은 옛 모습을 되찾아갔다. 현재 옛 안기부의 여러 건물들은 서울시의 공공기관, 유스호스텔 등 용도만 바뀌어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둘레길엔 애국가 '남산위의 저 소나무'에 나오는 소나무들이 울창해 보기만 해도 상쾌했다. 삼림욕 코스가 따로 없다. 아기들을 태운 유모차도 다닐 수 있는 편안한 숲길이다. 무엇보다 좋은 건 귀를 즐겁게 해주는 경쾌한 새소리. 산속이라 그런지 새소리가 유난히 맑고 청명한 게 음악처럼 들려왔다. 기분을 즐겁게 해주는 음악이 들려오니 몸은 저절로 흔들거리게 된다. 역으로 몸을 흔들거리며 걷거나 뛰면 절로 기분이 좋아지겠구나 싶었다.

새소리 경쾌하게 들려오는 울창한 숲속 길.
 새소리 경쾌하게 들려오는 울창한 숲속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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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둘레길을 더욱 상쾌하게 해준 작은 물길.
 남산 둘레길을 더욱 상쾌하게 해준 작은 물길.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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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날씨 속 둘레길가에 나있는 작은 인공폭포가 기분을 더욱 상쾌하게 해줬다. 이채로운 사당 '와룡묘'와 식당이 된 '목멱산장'도 눈길을 끌었다. 와룡묘는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정치가이며 군사지략가인 제갈공명을 받드는 사당으로 그의 호인 와룡을 따서 와룡묘라 하였다. 철종 13년(1862)에 제갈공명을 추모하는 인사들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해진다. 아쉽게도 출입은 금지돼 있다.

목멱산장은 식당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남산의 옛 이름이 '목멱산'이었다고 한다. 무슨 뜻이 있을까, 남산이라는 단순한 이름보다 궁금증을 일으키게 하는 이름이다.  

"해발 265m의 야트막한 남산은 본래 서울의 중심은 아니었다. 조선 개국과 함께 한양이 도읍지가 되었을 때, 남산은 그저 남쪽을 지키는 요새였다. 당시 북악산 기슭에 궁궐을 짓고 바라보니 남쪽에 산이 있어 남산이 됐다.

이 산은 한양의 안쪽에 자리한 4개의 내사산(남산, 인왕산, 북악산, 낙산) 가운데 하나였다. 산 위에 성을 쌓고 봉수대를 설치, 도성 방어의 중추적인 역할을 맡겼다. 그랬던 산이 오늘날에 와서는 당당히 서울의 중심이 된 것이다. 근대 이후 서울이 급팽창하면서 도성의 중심을 꿰찬 것이다."(책 <명품 올레 48> 가운데)

서울N타워를 등대삼아 걷는 고즈넉한 길.
 서울N타워를 등대삼아 걷는 고즈넉한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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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도성 방어 역할을 해서였는지 산등성이에 성곽이 이어져 있다. 낮엔 잘 몰랐는데 조명을 켜놓은 성곽이 운치 있게 이어져 나도 모르게 성곽길로 들어서게 된다. 성곽 너머로 보이는 높다란 서울타워(혹은 남산타워)를 등대삼아 걸었다. 서울의 다른 건축물처럼 이 타워도 낮보단 밤에 더 멋있다. 성곽길을 걷는 외국인들이 고개를 위로 향한 채 혹은 입을 반쯤 벌린 채 감탄을 하며 걷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다. 

서울타워가 있는 남산 정상은 남측 순환로를 타고 올라온 시내버스, 관광버스와 외국인 관광객들로 북적북적했다. 덕분에 유일하게 자리한 편의점은 직원이 서너 명이나 있을 정도로 잘된다. 시원한 냉커피를 골라 계산대에서 줄을 섰는데 진도가 잘 안나갔다. 맨 앞줄을 힐끗 바라보니 웬 아저씨들이 슬쩍 다가와 새치기를 하는 게 아닌가.

더 얄미운 건 성인 남성 앞에선 하지 않고 만만해 보이는 여성이나 청소년들이 대상이다. 계산대 앞에 선 10대 청소년이 엄마에게 중국말로 크게 욕을 먹고 있었다. 편의점 직원이 귀띔해준 얘기는 놀라웠다. 많은 중국 관광객들이 새치기 한 아저씨가 아니라 당한 아이들을 이렇게 훈육(?)한단다. 새치기 당하면 안 된다, 새치기 당한 네가 잘못한 거다라면서.

발소리, 말소리가 모두 소근소근하게 들려 정다운 남산 길.
 발소리, 말소리가 모두 소근소근하게 들려 정다운 남산 길.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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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타워는 열심히 페달질을 하며 국립극장에서 남측 순환 도로를 통해 오르는 자전거 애호가들도 모이는 곳이다. 헉헉~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올라오는 모습이 흡사 고행하는 순례자 같다. 한 밤의 고요한 숲길이라 그런지 가족끼리, 친구끼리 다정하게 거니는 사람들의 발소리, 말소리가 소곤소곤 정답다.

남산은 이렇게 걷는 사람은 물론 자전거 타는 사람, 버스나 택시를 타고 누구나 오를 수 있는 고마운 산이다. 게다가 전망 좋은 도서관이 두 개나 있어 더욱 여유로운 산책을 할 수 있었다.  

서울타워에서 내려와 소나무들이 많아 소나무 생태 탐방로가 있는 남측 순환로를 걷다보면,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다는 듯 산책하기 좋은 남산 야생화 공원과 야외 식물원이 맞아준다. 공원 안 원두막 정자에 누워 있는 사람, 크고 작은 개들과 함께 산책 나온 시민들, 공원 가운데 만들어 놓은 시냇물 가에서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 바로 밑에 펼쳐지는 무덥고 분주한 서울 풍경과 다르게 참 한갓지고 여유롭게 시간이 흘렀다. 남산 둘레길을 걸으면서 문득 깨달은 게 있다. 행복은 아주 느린 거다.   

▲ 주요 남산 둘레길 : 3호선 동대입구역 - 장충단 공원 - 남산 북측 순환로 숲길 - 와룡묘, 목멱산장 - 남산 도서관 - 서울타워 - 남산 남측 순환로 - 소나무 생태 탐방로 - 야외 식물원

덧붙이는 글 | 6월에 여러 번 다녀왔습니다.



태그:#남산둘레길, #남산, #장충단 공원, #수표교, #서울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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