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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뉴워크 프로젝트의 첫 전시 포스터
 노뉴워크 프로젝트의 첫 전시 포스터
ⓒ 노뉴워크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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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예술가를 '잠수함의 토끼'에 비유하곤 한다. 과거 잠수함에는 함내의 산소가 부족한지 살피기 위해 토끼를 두곤했다. 토끼들은 산소가 모자라면 인간보다 더 빠르게 반응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토끼를 보며 잠수함의 상태가 어떤지를 판단했다고 한다. 예술가를 잠수함의 토끼에 비유하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예술가들은 사회적인 상황에 누구보다 민감하게 반응하고 이를 예민하게 포착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최근 사회에 만연했던 여성혐오가 가시화 되고, 강남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여성 폭력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이 같은 상황을 마주하고 이를 예술의 언어로 풀어내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여전히 되풀이 되고 있는 여성에 관한 여러 문제들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목표로하는 '노뉴워크 프로젝트'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여성, 소수자의 삶을 위협하는 '폭력'을 주제로 첫 번째 작업을 진행했다. 현재 망원동 'ALTER EGO'에서 작품들이 전시중이다.

윤나리 작가의 작품 <기이한 기록> 중 하나
 윤나리 작가의 작품 <기이한 기록> 중 하나
ⓒ 노뉴워크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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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던 것을 드러내기: 윤나리 작가의 <기이한 기록>

'노뉴워크 프로젝트'는 작가 엘렌 맥마흔이 발간한 책에서 이름을 따왔다. 아리조나 대학에서 전임교수로 일하던 맥마흔은 임신과 함께 무보수로 근무하게 된다. 하지만 이후 학교측이 작성한 소위 '업적 리스트'에 그녀가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 때 맥마흔이 느낀 불편함과 결여를 담은 책이 바로 'No New Work'다. 그녀는 이 책을 통해 비가시화된 자신의 일과 삶을 생산적인 결과물로 재해석했다.

노뉴워크 프로젝트의 작품들도 이와 비슷한 결을 가지고 있다. 먼저 윤나리 작가는 작품 '기이한 기록'을 통해 2015년 3월부터 1년간 국내에서 발생한 여성 폭력 사건을 이미지로 기록했다. 작업은 여성 폭력 사건을 다룬 기사를 비워내는 것에서부터 출발했다. 작가는 '~녀'와 같이 사건을 선정적으로 다루는 언어나 '우발적으로', '술해 취해'처럼 가해자를 옹호하는 표현들을 삭제했다. 미디어 속에서 피해 여성들의 이미지가 불안과 측은함을 동반한 혐오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작가는 이렇게 다듬어진 기사들을 가지고 작업을 진행했다.

시작은 덜어냄이었지만, 오히려 선정적인 말들을 치우자 사건에 대해 우리가 봐야 할 더 많은 것들이 보였다. 작품에는 피해 여성들이 느꼈을 두려움에서부터 폭력의 순간 이후에도 멍에를 짊어져야하는 막막함까지, 폭력에 대한 분노에서부터 그럼에도 그 폭력 앞에서 무기력해지지 않고 일어서겠다는 의지까지 복합적인 결의 감정과 생각들이 담겨졌다. 작품에는 피해자의 얼굴이 묘사되지 않았고, 이 때문에 보는 사람은 피해가 누구인지 보다 이 폭력에 어떤 결과를 만들어냈는지에 더욱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기억에 남는 사건들을 언급하며 윤나리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모텔에서 한 남성이 여성을 죽이고 성폭행한 사건이 있었어요. 징역 12년형이 내려졌는데 판사는 주된 이유로 이미 죽은 여성을 강간한 것을 들었죠. 그게 큰 문제였다는 거죠. 그런데 이 사건에서 중요한 건 한 여성이 죽었다는 거에요. 판사가 봐야 했던 게 그런 것이었을까요?"

봄로야 작가의 <멍의 노래>
 봄로야 작가의 <멍의 노래>
ⓒ 노뉴워크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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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배치함으로써 드러내기: 봄로야 작가의 <멍의 노래>

이렇게 지우고 드러내기를 시도한 또 다른 작가가 있다. 바로 '멍의 노래'를 전시한 봄로야 작가다. 작가는 1992년 사회에 충격을 던졌던 '김영오 성폭력 사건'을 소재로 작업했다. 당시의 신문 기사를 모아 종이 위에 다시 기록하며 재구성했고, 이를 통해 당시에는 비가시화 되었던 요소들을 드러내고자 했다. 가령 그 당시의 언론 보도들을 재구성한 작품에서, 작가는 사건을 선정적으로 묘사하거나 가해자의 입장에서 작성된 표현들을 특별히 강조했다. 작품을 보니, 사용되어선 안될 표현들이 가지는 문제가 더욱 극명하게 다가왔다.

사건을 손쉽게 소비하는 선정적인 말들을 걷어내면 더 복합적인 지점이 드러난다. 봄로야 작가는 다른 작품에서 재판 당시, 피해자가 한 증언을 재배치했다. 여러겹으로 겹쳐진 피해자의 증언은 피해자에게 자신이 겪은 폭력이란 어떤 것이며 그 폭력이 어떻게 다가오는 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또한 읽기 힘들게 텍스트를 옅게 표현함으로서 피해자의 언어가 얼마나 사람들에게 전달되기 힘든지를 드러낸다. 피해자의 말들을 자세히 보지 않으면 읽어낼 수 없게 만든 것은, 어쩌면 이 사건을 손쉽게 소비하려는 것에 대한 저항의 방법이 아닌가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작가는 작품 한켠에 1997년에 개정된 가정폭력 방지법의 개정을 요구하는 프린트를 배치했다. 가정의 유지와 안정을 목적으로 제시한 법조항을 놓고, 작가는 폭력이 발생한 가정을 그렇게라도 지켜야 하는가를 질문한다.

혜원 작가의 <여기 있다>
 혜원 작가의 <여기 있다>
ⓒ 노뉴워크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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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에서 벗어나 주체가 되기: 혜원 작가의 <여기 있다>

또 다른 참여작가 혜원은 '여기 있다'라는 작품을 통해 포르노 이미지로 만들어진 현대미술 작업을 고찰했다. 이 작품들은 여성의 육체가 미디어 권력 속에서 성적 대상화가 되는 폭력을 비판하고, 자본주의가 여성의 육체와 성을 상품화하는 것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동시에 작품 속 여성 주체의 성적 욕망을 표백시킴으로써 모델들이 다시 타자화가 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이 같은 상황은 포르노 이미지에서 노출되는 사람들이 다른 매체에서 주체적으로 성적인 이미지를 드러냈을 때 부정적인 시각으로 비난받는 것과 맞닿아 있다.

때문에 혜원 작가는 작업을 통해 성적 대상화된 인물의 주체성을 끌어올리고자 했다. 그 여성들이 구조의 피해자로만 강하게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주체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작가는 여성에 대한 포르노적 이미지를 스케치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모델이 된 여성들의 주변으로 복잡하게 그어진 선을 통해, 관람자가 여성의 몸에 집중하고 그 몸을 손쉽게 성애적으로 소비하는 것을 막았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모델의 눈이다. 작품에서 모델들의 눈은 특히 강렬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이들의 눈동자는 정확하게 작품을 보는 사람을 응시한다. 말하자면 모델들에게 관람자를 바라보게 함으로써, 이들을 '시선'을 가진 주체로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Q9작가의 'THE GOOD GIRL MUSEUM'
 Q9작가의 'THE GOOD GIRL MUSEUM'
ⓒ 노뉴워크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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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여자'의 박물관에서 탈주하기: Q9작가의 <THE GOOD GIRL MUSEUM>

Q9 작가는 작품 'THE GOOD GIRL MUSEUM'에서 속담을 재해석의 대상으로 삼았다. <세계여성속담사전>을 인용한 이 작품은 남성중심사회에서 이분법적으로 여성들을 폄하한 속담들을 이미지로 형상화 했다. 박물관이라는 작품의 제목처럼, 이 이미지들은 보는 이들에게 이제껏 남성중심사회에서 여성들이 어떻게 통제되고 처벌되었는지를 망라한다. 이미지들 속에서 여성은 남성이 아니기에 '얕보이는 대상'이지만, 동시에 언제 통제를 벗어날까 두려운 '마녀'로, 출산과 남편을 보조하는 것을 제일 가치로 지녀야 할 '어머니'로 등장한다.

그러나 'THE GOOD GIRL MUSEUM'은 단지 이런 이미지들을 모자이크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래픽 노블의 형식을 차용한 이 작품은 이러한 박물관에서 태어난 한 여성의 이야기를 담고있다. 이 여성은 남자들이 말하는 좋은 여자(Good girl)가 되어 박물관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이 이미지들에서 환멸을 느끼고 나아가 과거와의 절연을 선언하고 다른 삶을 향해 나아간다. 이를 통해 이런 속담들이 어떤 이해관계를 내포하지도 않고, 더 이상 쓰이지도 않기를 바라는 작가의 바람이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자청 작가의 <치마 이야기>
 자청 작가의 <치마 이야기>
ⓒ 노뉴워크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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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폭력을 드러내기: 자청 작가의 <치마 이야기>

마지막으로 '치마 이야기'를 전시한 자청 작가는 너무나도 가깝고 빈번한, 여성으로서 겪는 일상 속 폭력을 다루었다. 그녀의 작품에는 어린 시절 가족에게 치마입기를 강요받았던 자신의 경험과 친구들의 사연이 담겼다. 여러 사연들 중에서 가족과의 이야기를 고른 이유에 대해 작가는 차별이 시작되고 누적되었던 최초의 장소가 가족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한 일상 속의 폭력은 기록화 되지않고, 이 때문에 드러내지 않으면 보이지 않기에 선정했다고 한다.

특히 주목할 것은 그녀의 메시지가 '퀼트'를 통해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작가는 자신에게 퀼트가 복합적인 매개물이라고 말한다. 퀼트는 그녀의 어머니가 전업주부일 때 찾았던 유일한 해방구이며 동시에 그런 해방구가 필요하게한 억압의 기록이라고 한다. 또한 퀼트는 여성적이라 폄하되었던 매체이지만 초기 페미니스트들이 저항의 기록을 담았던 것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그녀는 퀼트 위에 자신의 목소리를 담으며 퀼트를 재의미화한다. 이렇게 퀼트의 의미를 이동시키는 것처럼, 여성성을 둘러싼 수사도 변화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전시가 진행중인 ALTER EGO 갤러리
 전시가 진행중인 ALTER EGO 갤러리
ⓒ 노뉴워크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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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뉴워크가 아닌 뉴 워크가 가능한 사회를 위해

전시를 모두 관람하고 나오던 중 윤나리 작가에게 '특별히 노뉴워크를 프로젝트 이름으로 선정한 이유가 있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녀는 나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것은 저희가 진행한 프로젝트가 새로운 것만은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해요. 실로 여성과 소수자들이 겪는 폭력에 대한 예술 작품은 계속 등장했었죠. 하지만 사회가 변화하지 않고, 여성에 대한 폭력이 계속해서 되풀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이런 작업을 해야해요.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고, 저희는 '노뉴워크'라는 이름을 선택했어요."

새롭지 않은 일을 계속해서 해야하는 사회가 아니라 새로운 것을 말할 수 있는 사회, 그것이 가능한 변화된 사회를 마주하는 것이 우리 모두가 가진 목표가 아닐까. 나는 '노뉴워크 프로젝트'가 그 같은 지향을 향해 사회가 딛는 발 한걸음에 함께했다고 생각한다.


태그:#노뉴워크 프로젝트, #여성주의,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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