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브로드웨이 밀레니엄 극장에 오신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

지난 5일 오후 8시, 서울 홍익대 대학로아트센터 대극장을 가득 채운 관객들은 짧은 머리에 가죽 재킷을 입고, 입가에 수염까지 그려 넣은 여성의 한마디에 흥분하기 시작했다.

"여러분들이 좋아하든지 말든지, 소개합니다. 헤드윅!"

누군가 건네는 장미꽃을 쿨하게 받은 윤도현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격한 기타 사운드와 함께 '티어 미 다운(Tear me Down)'이 울려 퍼지며. 뮤지컬 <헤드윅>의 2016시즌 마지막 공연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윤도현의 헤드윅(윤드윅)과 제이민의 이츠학(제츠학)이 함께하는, 헤드윅과 그의 밴드 디 앵그리인치의 마지막 투어가(관련 기사 : 우리는 모두 경계인, 그러니 사랑하자).

영원히 기억하고 싶었던 순간, 윤도현·제이민의 크립

정통 로커의 힘, 윤드윅 2016 뮤지컬 <헤드윅>에 합류한 윤도현. 여러 뮤지컬에 도전해온 그이지만, 역시 가장 잘 어울리는 건 본업에 가장 가까운 <헤드윅>에 합류할 때였다. 아직까지 연기에 있어서는 약간의 아쉬움을 남기지만, 노래만큼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다. 특히 커튼콜 때의 포스는 모든 헤드윅 중에서도 톱에 꼽을 정도이다.

▲ 가발을 쓴 헤드윅 윤도현이 표현하는 헤드윅은 강하다. 배우의 실제 나이만큼이나, 원작의 헤드윅이 나이를 먹은 것만큼이나 연륜이 느껴진다.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마음의 굳은살이 박여 어지간한 말에는 전혀 상처받지 않을 것 같은 꿋꿋함도 동시에. 하지만 가발 뒤에는 여전히 자신의 반쪽을 찾아 헤매는 절박함이 묻어 있다. ⓒ 창작컴퍼니다


어떻게 진행됐는지 모를 정도로 신나는 공연이었다. 본래 이츠학 역에 트리플 캐스팅됐던 임진아 배우는, 무대에 바바리코트에 선글라스를 끼고 매니저 필리스로 분장하여 등장했다. 그는 깨알 같은 웃음과 함께 뜬금없이 조승우의 헤드윅을 그립게 만든 후 바람처럼 사라졌다. 한국도 다녀온 적 있다는 윤드윅이 트로트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온 힘을 다해 부를 때도 '빵' 하고 터지고 말았다. 윤드윅 회차의 트레이드마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윤유다(윤도현+유다)' 빙의는 언제나처럼 짜릿했다.

'또 다른 헤드윅' 정문성 배우는 '슈가 대디(Sugar Daddy)' 열창이 끝난 후, "혹시 대리 불렀어요?"라며 갑자기 등장했다. "슈가 대리 82543(빨리오소서)"을 외치며 후면 주차를 하는 척하는 그의 애드리브에 관객 모두가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카 워시' 때 윤드윅의 치마가 떨어지는 참사는 덤이다. 하지만 그저 웃기고 재미있기만 하면 <헤드윅>이 아니다. 어느새 높은 파고의 감동을 객석으로 퍼뜨리는 '눈물'도 있다.

극 안에서 이츠학은 헤드윅의 월드 투어 중 크로아티아에서 합류한 인물이다. 그는 본래 '드래그 퀸'인 크리스탈이었다. 이 여장남자는 루터(헤드윅의 전 남편)가 한셀(헤드윅)을 미국으로 탈출시켜줬듯이, 헤드윅이 자신을 '인종 청소'로부터 미국으로 탈출시켜주기를 바랐다. 헤드윅은 조건을 하나 건다. 다시는 가발을 쓰지 말 것. 이츠학은 여장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끝에 미국으로 올 수 있었다. 어쩌다가 이츠학이 가발을 건드리면 헤드윅은 불같이 화를 냈다.

헤드윅이 가발과 옷을 갈아입으러 간 사이, 이츠학의 솔로 무대가 펼쳐진다. 이츠학의 솔로 파트는 각 배우마다 다른 레퍼토리를 가지고 꾸려진다. 이날 제츠학이 다시 고른 첫 솔로는 이글스의 '데스페라도(Desperado)'였다. 그녀가 "Desperado"라며 입술을 떼는 순간 객석 전체를 낮은 탄성이 훑고 갔다. 이 한 곡만으로 이미 좌중을 지배한 그녀는 그다음 곡을 통해 절대 잊을 수 없는 강렬한 하이라이트를 만들었다.

제츠학, 화려한 신고식 2012년 <잭 더 리퍼>에서 글로리아로 데뷔한 이후, 제이민은 분명 '잘하는' 배우였지만 '매력있는' 배우라고 하기에는 어려웠다. 그리고 그 틀을 이번 <헤드윅>을 통해 깨버렸다. 제이민은 서문탁과는 다른, 자신만의 매력으로 무장한 이츠학이 됐다. 특히 조정석, 윤도현과의 음색 조합이나 연기 케미가 발군이다. 앞으로가 기대되는 배우가 됐다.

▲ 제이민, 이츠학, 제츠학 라디오헤드의 '크립(Creep)'은 원래 제이민이 종종 솔로 곡으로 선택하여 부르는 레퍼토리였다. 하지만 2016년 6월 5일에 부른 크립은 그 어떤 크립보다도 훌륭했다. 이 곡을 부르는 순간만큼, 그는 한 명의 이츠학으로 그 자리에 존재했다. ⓒ 창작컴퍼니다


"You're so fucking special, I wish I was special, But I'm a creep.(너는 너무 특별해, 나도 특별하기를 바라, 하지만 난 고작 등신인 걸.)"

이 문장이 음을 타고 토해지는 순간, 노래는 헤드윅을 바라보는 이츠학의 이야기가 됐다. 결혼했지만, 자신은 바라보지 않은 채 토미만 쫓는 헤드윅에게서 이츠학은 무엇을 느꼈을까. 헤드윅을 좋아했지만 토미의 대체재가 될 수 없기에 그를 질투했고,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그를 미워하면서도 자신을 구원해준 헤드윅을 마냥 미워할 수도 없었던 이츠학. 제츠학이 부르는 크립은 라디오헤드의 크립이 아니라 이츠학의 크립이었다.

정통 로커의 힘, 윤드윅 2016 뮤지컬 <헤드윅>에 합류한 윤도현. 여러 뮤지컬에 도전해온 그이지만, 역시 가장 잘 어울리는 건 본업에 가장 가까운 <헤드윅>에 합류할 때였다. 아직까지 연기에 있어서는 약간의 아쉬움을 남기지만, 노래만큼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다. 특히 커튼콜 때의 포스는 모든 헤드윅 중에서도 톱에 꼽을 정도이다.

▲ 핑크 가운이 잘 어울리는 언니 제이민은 <뉴스1>과의 인터뷰에서 윤도현에 대해 이렇게 평한 적이 있다. "숏 컷트에 핑크 가운을 입었을 때 옆모습이 정말 예쁘기도 해요." ⓒ 창작컴퍼니다


옷을 다 갈아입은 윤드윅이 등장하면서, 크립은 솔로 곡이 아니라 듀엣 곡으로 변모한다. 허스키한 윤도현과 맑은 미성의 제이민, 두 보컬은 서로 상극인 듯하지만 노래 안에서 절묘한 화음을 만들며 결합했다. 두 개로 갈라져 있던 목소리가 하나로 만나서 완전해진 것처럼. 이들의 크립은 이대로 흘려보내고 싶지 않을 정도로, 박제해서 영원히 간직하고 싶을 정도로 슬프고, 아름다웠다.

"(윤)도현 오빠는 일단 노래가 너무 잘 맞아요. 같이 노래를 하면 너무 기분이 좋아요. 에지(edge)가 딱 맞아 덜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또 희한하게도 도현 오빠와 할 때는 더 자유로워지는 것 같아요. 제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도록 받아주시는 것 같아요." - <뉴스1> '헤드윅 제이민, 누구도 아닌 그만의 이츠학'(4월 29일) 중에서

배우와 함께 성장하는 극, 금방 다시 돌아오기를

제츠학, 화려한 신고식 2012년 <잭 더 리퍼>에서 글로리아로 데뷔한 이후, 제이민은 분명 '잘하는' 배우였지만 '매력있는' 배우라고 하기에는 어려웠다. 그리고 그 틀을 이번 <헤드윅>을 통해 깨버렸다. 제이민은 서문탁과는 다른, 자신만의 매력으로 무장한 이츠학이 됐다. 특히 조정석, 윤도현과의 음색 조합이나 연기 케미가 발군이다. 앞으로가 기대되는 배우가 됐다.

▲ 제츠학, 화려한 신고식 2012년 <잭 더 리퍼>에서 글로리아로 데뷔한 이후, 제이민은 분명 '잘하는' 배우였지만 '매력있는' 배우라고 하기에는 어려웠다. 그리고 그 틀을 이번 <헤드윅>을 통해 깨버렸다. 제이민은 서문탁과는 다른, 자신만의 매력으로 무장한 이츠학이 됐다. 특히 조정석, 윤도현과의 음색 조합이나 연기 케미가 발군이다. 앞으로가 기대되는 배우가 됐다. ⓒ 창작컴퍼니다


그렇게 감정의 끝과 끝을 오가며 롤러코스터처럼 흘러가던 극도 그 끝을 향해 치달았다. 극의 마지막, 헤드윅은 가발을 벗는다. 반면 이츠학은 가발을 쓰고 드래그 퀸 크리스탈로 돌아 간다. 미국에 함께 오는 조건으로 금지됐던 가발을 뒤집어쓰고, 드레스를 입은 채 본래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는다. 가발을 쓴 이츠학은, 토미를 향해 가발을 벗고 가는 헤드윅에게 잘 가라고 노래를 불러준다.

"날아가라, 꿈틀대는 영혼 붉은 심장처럼. 넌 하늘 저편 밝은 별. 넌 하늘 높이 나는 발레리나. 넌 외로운 세상 지친 영혼. 지지 마라. 포기 마라. 그래서 우린 록 앤드 롤러스. 영원한 유어 록 앤드 롤. 손을 들어. 손을 들어." - 뮤지컬 <헤드윅> No.12 '미드나이트 라디오(Midnight Radio)' 중에서

드디어 본 공연이 끝나고, 무대 인사 그리고 이어진 앙코르와 리앙코르 무대까지. 리앙코르로 선택된 '오리진 오브 러브(Origin of Love)'에서 무대와 객석의 많은 사람이 눈물과 환호를 함께 쏟아냈다. 인터미션 없이 진행되는 <헤드윅>은 이날 오후 11시, 3시간이 좀 넘는 공연 끝에 그 막을 내렸다.

정통 로커의 힘, 윤드윅 2016 뮤지컬 <헤드윅>에 합류한 윤도현. 여러 뮤지컬에 도전해온 그이지만, 역시 가장 잘 어울리는 건 본업에 가장 가까운 <헤드윅>에 합류할 때였다. 아직까지 연기에 있어서는 약간의 아쉬움을 남기지만, 노래만큼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다. 특히 커튼콜 때의 포스는 모든 헤드윅 중에서도 톱에 꼽을 정도이다.

▲ 정통 로커의 힘, 윤드윅 2016 뮤지컬 <헤드윅>에 합류한 윤도현. 여러 뮤지컬에 도전해온 그이지만, 역시 가장 잘 어울리는 건 본업에 가장 가까운 <헤드윅>에 합류할 때였다. 아직까지 연기에 있어서는 약간의 아쉬움을 남긴다는 평을 듣지만, <헤드윅> 서울 마지막 공연날 보여준 섬세함은 이런 평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또한 커튼콜 때의 포스는 역대 모든 헤드윅 중에서도 손가락에 꼽을 정도이다. ⓒ 창작컴퍼니다


스크린 위로 비친 특별 영상 속 글귀처럼, 잠시나마 우리 삶에 빛을 줬던 헤드윅·이츠학과의 안녕. "모피코트 살 돈 있으면 그 돈으로 기타를 사겠다"는, 음악 없이는 못 살 것 같은 강고한 윤드윅과도 안녕. 헤드윅 한 마디 한 마디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누구보다 애절하게 그를 원했던 제츠학과도 안녕.

<헤드윅>은 기본적으로 성장 드라마이다. 헤드윅이 성장해 가발을 벗고 맨몸의 자신을 마주하는 것처럼, 드래그 퀸의 모습으로 돌아와 갖고 싶지만 가질 수 없는 헤드윅을 보내주는 이츠학처럼. <헤드윅>은 헤드윅을 연기하는 배우도 함께 성장하게끔 이끈다.

무대 인사에서 뮤지컬에 도전하는 것이 참 힘들었다고, 그래서 다시는 안 하겠다는 마음마저 먹은 적 있다고 털어놓은 윤도현. 하지만 자칭 "착하고 말 잘 듣는" 로커는 자신에게 찾아온 또 한 번의 <헤드윅>을 거절하지 못했다. 시작하고서 이내 또 벽에 부딪혀서 힘들었다지만, 그는 앵그리인치와 이츠학 그리고 다른 헤드윅들의 도움으로 끝까지 해내고야 말았다. 언제나 윤도현에게는 '노래는 잘하지만 연기는 좀...'이라는 평이 따라붙었다. 하지만 그는 그만이 표현할 수 있는 연기의 '결'을 찾아냈고, 윤드윅으로서 그걸 보여줬다. 다시 돌아오고 싶다는 윤도현, 그는 반드시 돌아와야 할 헤드윅 중 한 명이다.

BNT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공연 두 시간 전에 펑펑 울었다"며 첫 공연 당시의 두려움을 토로했던 제이민도 마찬가지이다. 이츠학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었던 제이민은 특유의 매력으로 자기만의 이츠학을 표현하는 데 성공했다. 이번 <헤드윅>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실히 뮤지컬 팬들에게 각인시키고, 뮤지컬 배우로서 한 단계 도약할 디딤돌을 만들어냈다. 윤도현과 제이민. 그들이 얼마나 훌륭한 가수인지, 배우인지, 헤드윅과 이츠학이었는지는 2016년 6월 5일의 관객들이 기억할 것이다.

물론 <헤드윅>은 몇 년 안에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언니들의 귀환이 정확히 언제일지 알 수 없는 지금, 2016 <헤드윅>을 이대로 떠나보낼 수 없는 '헤드헤즈(<헤드윅>의 팬)'가 분명 있을 테다. 바로 내일(25일)과 모레(26일) 수원 경기도문화의전당 대극장에서 문드윅(정문성)과 변드윅(변요한) 그리고 세 이츠학이 기다리고 있다. 왔다, '내적 야광봉'을 흔들며 저 멋진 언니들을 배웅해 줄 마지막 기회가.

See you again soon 지난 5일, <헤드윅>의 프로덕션 수퍼바이저이자 디 앵그리인치의 크리츠토프 역을 맡은 재키 김(Zakky Kim)이 촬영한 무대 사진. 그의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사진 한 장이 참 많은 걸 담고 있다. 그는 이 포스팅에 "see You again soon"이라고 남겼다. 분명히 곧, 다시 돌아올 것이다.

▲ See you again soon 지난 5일, <헤드윅>의 프로덕션 수퍼바이저이자 디 앵그리인치의 크리츠토프 역을 맡은 재키 김(Zakky Kim)이 촬영한 무대 사진. 그의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사진 한 장이 참 많은 걸 담고 있다. 그는 이 포스팅에 "see You again soon"이라고 남겼다. 분명히 곧, 다시 돌아올 것이다. ⓒ @zakkykim



윤도현 제이민 헤드윅 쇼노트 크립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