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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장>

무영객은 표적을 베었다. 단 한 칼이면 되었다. 잡초를 베듯, 두부를 자르듯. 상대는 무공을 모르는 자였다. 얼핏 듣기로는 예전에 유명한 무관 집안이라고 했는데 가문의 대를 끊기 위해서라고 했다.

노인은 항상 표적을 알려주면서 그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그 또한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가 하려는 일을 더 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노인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표적이 숨은 곳은 깊은 산중이었고, 철저하게 나무꾼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가문의 대를 끊기 위해서라면 그의 식솔까지 해치우라는 의미다. 그것은 문제없다. 검을 한번 휘두르나 두 번 세 번 휘두르나 별 차이는 없다.

그가 찾아 갔을 때, 표적은 마당에서 나무를 쌓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다가가 검을 뽑았다. 천천히. 표적은 의아해 하기 보다는 체념하는 기색이었다. 도망칠 생각도 저항할 의지도 없이 고스란히 검을 받고 쓰러졌다. 자신의 나이 정도 됐을까,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정도. 그가 표적의 옷자락을 베어내 검날에 맺혀 있는 피를 씻어내고 있는 데 사립문 안으로 웬 여인과 아장아장 걷는 아이가 들어왔다. 여인은 깜짝 놀라더니 아이를 안고 풀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오들오들 떨었다. 그 와중에도 아이의 눈을 가리기 바빴다. 아이가 고개를 흔들며 여인을 손길을 벗어나려 하자 그녀는 필사적으로 눈을 가리며 눈앞의 장면을 보여주려 하지 않았다.

그는 무심히 여인에게 걸어가 그녀 남편의 옷자락으로 씻은 칼을 비스듬히 들었다. 찌르는 것보다는 베는 게 빨리 끝낼 뿐만 아니라 상대의 고통도 덜하다. 당시 그는 황소의 목도 단 한 번의 놀림으로 몸통에서 분리할 경지에 이르렀다.  

여인은 체념한 듯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그가 검을 휘두르려는 찰나 얼굴을 들었다. 여인의 눈과 마주쳤다. 그 눈엔 공포도 분노도 맺혀 있지 않았다. 대개 표적이 최후의 순간에 어리게 되는 무늬가 아니었다. 아련하면서도 깊은 곳 어디에선가 갈망이 어른거리는 눈빛이었다. 죽음을 맞이하는 자의 눈빛이 아니었다.

순간 자신의 눈앞에 하나의 장면이 떠올랐다. 언젠가, 정확히 언젠가는 기억할 순 없지만 어린 시절에 딱 한 번 꾼 꿈이 떠올랐다. 단 한 번의 꿈이었지만 너무도 생생해 그의 마음속에선 잊히지 않고 있었다. 자신이 얼굴도 기억 안 나는 엄마의 품에 안겨 있고, 엄마는 자신을 결사적으로 끌어안고 덜덜덜 떨고 있었다. 사방은 불길에 휩싸여 온 세상이 빨갛게 타올랐다. 그러는 가운데 엄마가 쓰러지고 어린 자신은 하염없이 우는 꿈이었다.

그는 어깨 위로 치켜들었던 검을 스르르 내렸다. 그리고 돌아섰다. 그가 사립문을 나서려는데 여인이 소리쳤다. "이대로 가시면 어떡합니까?" 그는 제자리에서 멈췄다.

그렇다. 이대로 그가 가면 남은 이 여인과 아이는 손만 다를 뿐 다른 누군가에게 마찬가지의 결과가 나오게 돼 있다. 단지 시간만 연장될 뿐. 그러니 여기서 죽여 달라는 것일 터이다. 아니 어쩌면 여인이 말한 의미는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을 일에만 고정시켜 놓고 싶었다. 그는 자신의 일이 실패하지 않길 원했다. 실수는 있을지언정 실패는 해서는 안 되었다. 그가 실패하지 않는 길은 한 가지 밖에 없다.

그는 여인을 거두었다. 여인과 아이와 함께 동정호가 내려다보이는 악양의 언덕에 살림을 차렸다. 그는 알고 있다. 은신(隱身)을 하려면 큰 성읍(城邑)에 있어야 한다는 걸. 어설프게 산중에 들어갔다가는 오히려 노출되기 쉽다. 사람들 속에 파묻히는 것이 가장 숨기 좋은 것이다. 

여인은 그에게 냉엄하지도 정염에 싸이지도 않았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아이는 달랐다. 아이는 비극을 기억 못하고 그를 아빠처럼 따랐다. 여자 아이 특유의 애교와 발랄함이 그의 사막과 같은 마음에 비를 뿌렸다. 그는 재산이 많았다. 그가 일을 처리할 때마다 노인은 그에게 금화를 주었다. 그는 금화를 쓰지 않고 모았다. 달리 목표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쓸 데가 없었기 때문이다. 금화를 모두 여인에게 주고 그는 동정호가 바라보이는 정자에 올라 매일 술을 마셨다.

여인은 그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었고 그도 여인에게 점차 기울었다. 꽃대궁처럼 가는 목과 다소곳이 숙인 그녀의 옆얼굴을 보면 붓꽃이 떠올랐다. 기억도 어렴풋한 어릴 적, 다리 밑에서 구걸로 연명할 때 굶는 날이면 천변의 붓꽃을 꺾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보랏빛 꽃잎을 보고 있노라면 아득해지며, 배고픔도 잊을 수 있고 자신이 거지라는 사실도 잊을 수 있었다.

노인이 자기를 데려간 이후 그는 붓꽃에 대한 기억을 잊었다. 그런데 지금 붓꽃 하나가 눈앞에 피어 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중양절이나 단오절에 아이를 데리고 시장에 가서 폭죽놀이를 하거나 동정호에서 뱃놀이 할 때의 재미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는 사람들이 왜 가정을 꾸리며 사는지 알 것 같았다.

그렇게 3년이 흘렀다. 어느 날 그가 시장에서 아이에게 줄 예쁜 당혜(唐鞋, 신발)를 사서 집으로 왔다. 대문에 들어서는 순간 집안의 정적이 낯설었다. 괴괴하다기보다는 무언가로 꽉 눌러놓은 정적이었다. 그동안 죽어 있던 감각이 순식간에 살아났다. 온몸의 감각이 바늘처럼 솟아올랐다.

그는 대문 옆에 있는 대자루를 거꾸로 들고 기호세(幾虎勢)를 취했다. 현관에 들어서자 비린내가 훅 끼쳤다.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코로는 냄새의 궤적을 따르며 눈은 사방을 살피고 발걸음은 천천히 안방을 향했다. 검이 어딨더라? 이내 생각을 지웠다. 검은 살림을 차리면서 버렸다. 여인이 요구했기 때문이다.

안방에 들어가자 여인과 아이가 쓰러져 있다. 여인은 목에, 아이는 가슴에 칼을 받았다. 피가 그다지 흘러나오진 않았다. 그는 여인과 아이의 상처를 살펴보았다. 깊이와 넓이가 낯익었다. 노인이 새로운 제자를 두었구나. 그는 당혜를 아이의 상처 위에 올려놓았다. 상처가 가려지고 보니 아이는 예쁜 당혜를 사오는 아빠를 기다리다 지쳐 잠든 것 같았다. 그는 그 길로 대장간에 가서 검을 주문했다. 두 자 여덟 치 장검으로.

주문한 검이 완성되려면 보름 정도 있어야 했다. 그동안 그는 여인과 아이를 뒷산에 손수 묻었다. 아이와 어미를 합쳐 묘를 썼다. 그는 무덤 위에 아이의 당혜를 올려놓았다. 황톳빛 봉분과 화려한 당혜가 묘하게 어울렸다. 그는 밤이 이슥할 때까지 봉분에 기대어 술을 마셨다. 여인의 아미(蛾眉) 같은 초저녁달이 서산에 빼꼼이 나타날 때 그는 산을 내려왔다.

내려오면서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제몫의 온유한 생이 마침내 다했다고 믿었다. 자신에게 주어졌던 소박한 행복마저도 앗아간 노인의 부당함에 그는 치를 떨었다. 자기 같은 인간에게 잠시나마 깃들였던 영혼을 도로 빼앗아간 운명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다. 그는 향로봉으로 향했다.

무영객은 거꾸로 보이는 세상이 오히려 재밌어졌다. 거꾸로 매달린 채 바라보는 운부산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절경이다. 너무 쉽게 생각했다. 그냥 길을 막고 정면 승부를 했더라면 자신이 이 지경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태허진인 사대제자인 담곤의 무공 수위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인 데다 어느 정도 무공을 갖춘 낭자까지 상대하다보면 혹시 실수라도 나올까 싶어 다른 공격 수단을 택한 것인데, 결과적으로 자신이 당하고만 꼴이 되었다. 이미 예전에 장강편운 습평과 대결해 본 자신이 아니던가. 그냥 담곤과도 무공으로 대결을 했었어야 했다. 쉽게 가려다 어려운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가 한혈마로 담곤과 서생이 탄 마차를 추월하고는 난항을 설치해 마차를 망실하려던 계획은 어이없이 실패했다. 그들이 탄 수조마차에 전투용 보호장구가 있는 줄 몰랐던 것이다. 마차를 무너뜨리고 순식간에 제압하려던 계획이 성공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이 위험할 뻔했다.

추락의 와중에 경공을 써서 몸을 가볍게 하지 않았더라면 한혈마와 함께 운부산 계곡에 뼈를 묻었을 것이다. 그는 한혈마와 함께 절벽에서 추락하면서도 저만치 보이는 노송의 나뭇가지를 목표로 삼았다. 충격을 흡수하고 속도를 완화시켜 줄 수 있는 가지에 먼저 몸을 부딪친 후 바로 밑에 있는 가지에 안착하면 될 것이다.

순식간이었겠지만, 한없이 느려진 시간 속에서 그는 노인을 떠올렸다. 일차 충돌을 할 때 복부에 따끔한 통증이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는 연속동작으로 밑에 있는 가지를 잡고 몸을 빙그르 돌려 추락을 멈췄다. 어때, 노인. 그러나 떨어지던 관성이 워낙 컸던 탓에 몸을 두어 바퀴 더 회전할 수밖에 없었다. 회전이 멈췄을 때 그는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그는 바로 몸을 세우지 않고 그 상태로 얼마 쯤 있었다. 시선을 밑으로 향하니 한혈마를 삼켜버린 계곡에 허연 격류가 몸을 뒤채며 무어라 소리 지르고 있다.

얼마 쯤 있자 가지에서 뿌지직 소리가 나더니 휘청하며 밑으로 꺾였다. 그는 몸을 회전시키려고 반동을 주기 위해 등을 제쳤다가 자기도 모르게 '악' 소리를 내며 복부를 움켜쥐었다. 손바닥을 눈앞에 가져가니 피가 흥건했다. 이런, 일차 충돌 때 뾰족한 가지에 찔린 것 같았다.

그는 다시 이를 악물고 다시 반동을 주어 몸을 회전시키고는 손을 뻗어 다른 가지를 잡았다. 이번에는 제법 튼실한 가지다. 위를 올려다보니 자신이 추락한 높이가 서너 마장 정도 되었다. 이 정도 높이의 절벽을 오르는 건 식은 죽 먹기다. 어린 시절 고개를 직각으로 꺾어야 까마득히 보이던 적운봉을 아침 식전마다 오르내리던 그였다.

그가 다시 임도에 들어서니 몇 개의 질려가 길바닥에 놓여 있는 게 보였다. 흠, 이거였군. 무영객은 질려를 절벽 밑으로 던졌다. 이어 나무 밑에 앉아 옷을 헤쳐 오른쪽 복부를 살폈다. 젓가락 굵기의 구멍이 나있고 피부가 옆으로 세치 가량 찢어져 있다. 당장 거동하지 못할 정도의 상처는 아니지만 가만 놔둬도 될 상처는 아니다. 단순히 피부가 찢긴 정도가 아니라 내장까지 깊게 파고들었다. 상처가 덧나 곪으면 큰일이다.

산세로 보아하니 약초는 많을 것 같았다. 포황(蒲黃), 망초(芒硝), 반비(反鼻) 등이 필요했다. 반비의 경우 살무사의 내장과 껍질이 필수다. 그는 품안에서 비상 고약을 꺼내 으깬 후 상처 부위에 발라 지혈을 했다. 그리고 일어나서 임도를 따라 터덜터덜 걸으며 다음에 취해야 할 행동을 생각했다.

덧붙이는 글 | 연재 소설은 월, 수, 금요일에 업로드합니다.



태그:#PERD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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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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