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강원도 탄광마을에 위치한 초등학교에서 4학년 친구들과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아침 시간, 수업 틈틈이 짬을 내어 그림책을 읽고 있습니다. 그림책 같이 읽으며 나온, 아이들의 말과 글을 기록합니다. - 기자말

똥 누고 맨손으로 똥 닦으시는 분? 아주 극소수를 제외하고 자기 똥의 감촉을 직접 느끼려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 똥을 두 손으로 모시는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돌쇠 아버지. 자기 이름조차 없는 이 둥실둥실하게 생긴 사내는 김부자네 집에서 30년 간 머슴으로 일한다. 반평생을 부려먹고 김부자가 새경이랍시고 내놓은 건, 풀 한 포기 안 자라는 돌밭이다.

30년 임금 삯이 돌밭이라니! 가장인 나는 그럼 자식은 어떻게 키우나 하며 혼자 분개하고 있는데, 애들은 그냥 김부자가 나쁘네하고 끝이었다. '얘들아, 우리 노동의 대가가 그것밖에 안 되는 거니?'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참견 같아 넘어갔다.

당하고만 산, 어리숙한 이들이 대개 그러하듯 '처음부터 기름진 밭이 있나?' 하며 돌쇠 아버지는 손에 피가 나도록 돌을 추려낸다. 밭 주위로 수북한 돌탑이 울타리처럼 둘러졌다. 이 와중에도 돌쇠 아버지는 빙긋 웃고만 있는데 신안 염전 노예 사건이 떠올랐다. 생전 농사라고는 듣도보도 못한 현철이가 툭 내뱉는다.

"돌 골라내는데 왜 피가 나지? 돌이 뾰족한가?"
"흙 만지고 그러면 원래 손 갈리지고 피나."

할머니따라 밭에 좀 따라다닌 연준이가 응답한다. 기름진 땅에 흙만 만져도 갈라지는 게 손인데 거칠고 억센 돌투성이 밭을 골라내는 돌쇠 아버지는 오죽했으랴. 어쨌든 돌 치우기까지는 괜찮았는데 거름이 문제다. 워낙 가난한 살림살이라 척박한 땅에 섞을 거름이 없다. 돌쇠네는 죽기 살기로 똥 모으기 운동에 돌입한다. 멀리서 놀던 돌쇠도 똥 마려우면 부리나케 달려와 집에서 똥을 누고, 길거리 개똥도 신줏단지 모시듯 양손 위에 받쳐온다.

간만에 잔칫집에서 거하게 먹은 돌쇠 아버지는 갑자기 급똥 신호를 감지한다. 절약정신 강한 남정네는 귀한 똥을 밖에서 누기가 아쉬웠던지 똥구멍을 꼭 오므린 채 집을 향해 달린다. 엉덩이 뒤로 연달아 뿜어져 나오는 방귀를 보아하니 사태가 여간 심각하지 않다. 거름 마련할 돈이 없어, 똥을 모아야 하는 자의 사투는 처절하다.

지영이는 이 그림이 웃프다고 했다. 똥도 재산인 사나이.
 지영이는 이 그림이 웃프다고 했다. 똥도 재산인 사나이.
ⓒ 사계절출판사

관련사진보기


'꾹, 꾸르르륵!' 비싼 똥을 집에서 누려던 시도는 산 중턱에서 실패하고 만다. 시원하게 대변보던 중 엉뚱하게도 세찬 오줌발이 낮잠 자던 산도깨비 머리에 쏟아진다. 성난 도깨비의 불호령에 놀란 돌쇠 아버지가 똥덩이 위로 털썩 나자빠지더니, 엉엉 울기 시작했다. 바지에 똥 묻힌 게 부끄러워서가 아니고 아까워서였다. 기가 막힌 산도깨비는 돌쇠 아버지를 딱하게 여겨 김부자네 똥을 돌쇠 집으로 옮겨준다.

거름간이 넘치도록 들어찬 똥. 성실하고, 순박하게만 살아온 돌쇠네는 똥거름 덕분에 대풍년을 맞이한다. 조며 수수도 잘 되고, 고구마는 줄기가 실하다. 두호가 연신 "대박", "이제 부자네"라고 돌쇠 아버지를 응원했다. 아이들은 돌쇠 지게에 차곡차곡 쌓인 곡식을 보며 손뼉 쳤다.

나는 함께 칠 수 없었다. 30년간 뼈 빠지게 수고하고 받은 돌밭에 항의조차 못하는 양반이, 그저 오줌 한 번 세차게 누고 받은 산도깨비표 로또라니. 억세게 운 좋은 돌쇠 부자가 흐드러지게 웃고 있는 모습이 기쁘면서도 찜찜했다. 왠지 산도깨비를 만나지 못한 운 나쁜 머슴들이 엄청나게 많을 거라는 상상을 꾸역꾸역 눌렀다. 동심을 깨고 싶지 않았거니와, 머슴들이 힘들게 사는 건 김부자 부류의 욕심쟁이 탓이지 머슴들 잘못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돌쇠 아버지는 고구마 캐다가 금가락지를 발견한다. 천성이 착한 전직 머슴은 금가락지가 김부자네 똥통에서 나왔으리라 예상하고 돌려주러 간다. 그런데 금붙이를 뺏어 든 옛 고용주는, 자기네 똥을 훔쳐갔다며 똥을 반납하든지 그 똥을 먹고 자란 곡식으로 갚으라고 닦달한다. 실컷 두들겨 맞고 멍투성이가 된 돌쇠 아버지는 산도깨비를 찾는다. 사또와 포졸이 와서 폭력을 막아주고, 지엄한 국법으로 김부자를 다스려야 마땅하나 돌쇠 아버지의 삶에서 기댈 곳은 또 산도깨비이다.

"수리수리 수수리! 온 세상 똥아, 김부자네로 날아라!"

산도깨비는 매타작에 엉망이 된 돌쇠 아버지의 부탁을 화끈하게 들어준다. 하늘에서 물찌똥, 된똥, 진똥, 선똥, 피똥, 알똥, 배내똥, 토끼 똥, 염소 똥까지 모든 세상 똥이 김부자네 마당으로 후득후득 처덕처덕 쏟아져 내린다. 김부자가 이리 뛰고 저리 뛰어보지만 똥벼락은 피할 틈도 없이 촘촘하게 내리 꽂힌다. 금가락지 낀 손을 뻗어 겨우 똥 무더기 위로 내밀어 보지만 재앙이 그치려면 한참 멀었다. 앞줄에 앉은 탓에 그림을 생생하게 마주하고 있던 희성이와 주은이가 몸서리를 쳤다. 뒷줄에 있던 영재는 메슥거린다며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똥산에 뿌리째 박혀있는 나무가 돈독오른 김부자의 손가락처럼 보이는 건 지나친 해석일까?
 똥산에 뿌리째 박혀있는 나무가 돈독오른 김부자의 손가락처럼 보이는 건 지나친 해석일까?
ⓒ 사계절출판사

관련사진보기


돌쇠 아버지 똥으로 흥하고, 김부자 똥으로 망하네

첩첩변중이라 해야 하나, 다음 장을 펼치니 똥이 산을 이뤘다. 재물을 그렇게 탐하더니, 당할 때도 규모는 엄청났다. "으어어어! 똥 거인의 진격이다." 만화 마니아인 헌준이가 소리 질렀다. 이어서 벌 받은 거다, 꼬시다, 당해도 싸다, 세상 똥이 저거밖에 없냐는 둥 통쾌한 합창이 쏟아졌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산 옆구리로 사람 발자국, 고양이 발자국이 나있다.

"저거 김부자 발자국 아니야? 아까 기와집에 고양이도 있었어!"

다시 앞으로 촤르르. 역시나 담장 위에 요염하게 표정 짓는 고양이가 한 마리 있다. 김부자가 살아 도망갔다는 추측이, 지지를 얻으며 확신으로 변해간다. 이걸 어쩌나, 부자는 망해도 삼 년 간다는데 어디서 또 나쁜 짓을 할지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힘 있고, 곳간 두둑한 이들은 어지간해서 당하지 않는다. 살거나 말거나, 집은 폭삭 주저앉았으니 한동안은 잠잠하겠지? 하고 뒤표지를 닫았다.

악한 자를 똥으로 응징하다니! 정말 유쾌한 결말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돌쇠 아버지나 김부자는 모두 부유함을 갈망했다. 방법이 옳은가, 그른가에 대한 차이만 있을 뿐 두 등장인물은 경제적으로 넉넉해지는 인생을 지향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배부르고 등 따뜻한 인생은 중요하다. 탐욕. 김부자를 똥에 파묻히게 하고, 돌쇠 아버지를 쉼 없이 노작하게 만드는 이 감정은 대체 뭘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데 얼마만큼의 돈이 필요한지 잘 모른다. 단순히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식이다. 돈 욕심이 위험한줄 알면서도 현대인은 돈 없이 살 수가 없다. 연애, 결혼, 출산, 주거, 취미...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떨어지면 시체가 된다. 돈은 단순히 물건이나 서비스를 교환하는 수단을 넘어, 모든 것의 가치를 결정하는 존재가 되었다. '세속 세계의 신'이라는 별명이 과장스럽지 않다.

똥처럼 세상의 거름이 되자고, 우리 반 아이들이 똥산을 제작하고 있다.
 똥처럼 세상의 거름이 되자고, 우리 반 아이들이 똥산을 제작하고 있다.
ⓒ 이준수

관련사진보기


김부자를 보자. 그는 뙈양볕에 낫질하지 않고도, 하인을 부려 김매기를 하고 곡식을 거둔다. 돌쇠 아버지가 값싼 벙거지 하나 없이 맨상투머리로 작업할 때, 비단옷에 감투를 쓰고 담배를 태운다. 남들이 비새는 초가집 좁은 방에 그릇 받쳐둘 때, 기와에 빗방울 튀는 소리를 즐긴다. 빈부에 따라 생활의 질이 확 차이 나는데, 어느 누가 부유함의 달콤함을 마다하겠는가?

문제는 재산형성 과정이다. 책에서 김부자의 젊은 시절 이야기는 생략되어 있다. 그가 어떤 과정을 거쳐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그가 돌쇠 아버지에게 세경으로 준 '돌밭', 똥거름으로 키운 곡식을 내놓으라는 생떼, 약자에게 가하는 일방적 매질을 보았을 때 매우 부도덕한 성품을 지녔음은 확실하다. 이런 자가 가산을 늘리면서 깨끗한 방법만을 쓰지 않았을 거라는 예상을 쉽게 할 수 있다. 부는 정당한 경쟁과 노력을 통해 성취되고, 가치롭게 쓰일 때 명예롭다.

만일 돌쇠 아버지가 2016년 한국을 보았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 똥은 쌀이 되고, 쌀은 밥이 되며, 밥이 다시 똥이 되는 자연의 섭리에 맞춰 사는 사람. 두툼한 금가락지가 내 밭에서 나왔어도, 아무도 이 사실을 모른대도, 인간의 양심에 따라 주인에게 돌려주는 사람. 이런 사람들보다 제2의 김부자들이 득세하는 세태를 보면 어떤 마음이 들까?

다행히도 우수하신 삽화가 조혜란님께서 모범 답안을 화려한 똥 그림으로 잘 표현해주셨다. 신명나게 똥 회오리 한 판 몰아치는 광경을 보고 싶은 분들은 꼭 <똥벼락>을 펼쳐보시기 바란다.



똥벼락

김회경 글, 조혜란 그림, 사계절(2001)


태그:#그림책, #똥, #방구, #똥벼락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지구를 구하는 가계부, 산지니 2021>, <선생님의 보글보글, 미래의창 2024> 를 썼습니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