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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가씨>. 그리고 영화의 원작인 <핑거 스미스>의 스토리를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착각'이 아닐까. 나와 다른 너를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한데 묶으려 했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나와 다른 너를 돈으로 한 데 녹이려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각자 입맛에 맞게 꼬아놓은 덫에 상대방이 덜컥 걸려들기를 고대하는 인간 군상들이 있고 그 군상들의 오만과 착각이 내러티브를 직조한다. 바꿔 말해 착각이 없다면 영화와 소설 속에 갈등도 없고 반전도 없다. 상대와 나를 투명하게 꿰뚫을 수 있다면 어떻게 사건이 발생하겠는가.

하지만 우리 일상에서 '착각' 때문에 발생하는 사건의 성격은 영화와는 좀 다르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지난 5월 광주에서 상경하신 엄마가 심드렁하게 흘린 말 한 마디가 그 시작이었다.

"이번 여름에는 가족끼리 여행이나 가야겠다."

멀리 떨어져 산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 뵙지도 못하고 전화도 뜸했던 죄스러움이 그 말씀에 불거졌다. 그러고는 '그래 이번엔 꼭 여행을 가자'라고 다짐한다. 어차피 8월 생신 때 찾아뵈어야 하니 겸사겸사 잘 됐다 싶기도 했다. 대단하게 화려한 생신상 차려드리는 것은 아니지만 생신에 맞춰 이벤트를 생각해내는 것도 좋겠다 생각했다.

[사건의 시작] 여행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아내 반응은

여행을 가기로 했었다.
 여행을 가기로 했었다.
ⓒ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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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흘렀고 며칠 전부터 우리 형제들은 여행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일단 여행 장소와 콘셉트는 쉽게 결정했다. 동생네가 부산에 살고 있으므로 중간 지점에서 2박 3일 쉬었다 오자. 문제는 일정이었다. 설왕설래하다 일단 이렇게 합의했다. 이쪽저쪽 모두 맞벌이니 날짜를 맞추되 여름휴가는 서로 건드리지 말자. 그럼 8월 광복절 연휴 때가 좋겠다. 그렇게 카톡 대화를 마쳤다.

나는 곧바로 텔레그램으로 아내에게 그간의 내용을 정리해서 알려주고 날짜를 맞출 수 있겠느냐고 물어봤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답이 날아왔다.

"8월 마지막 주로 하면 안 되나? 8월 중순쯤에 엄마(장모님) 공연 있는데 야간에 하는 거라 우리가 데리고 와줬으면 하더라고. 아니면 7월 22~24일로 하고, 내가 23~24일 날 합류하는 거로 해도 좋을 것 같고."

이걸 보고 나는 화가 났다.

1. 왜 시가 식구 보러 가는 길에 순순히 동의를 해주지 않는 거냐. 
2. 왜 시가에만 가자고 하면 하루라도 더 빠지지 못해 하는 걸까.

3. 아이 데리고 나 혼자서 400킬로미터를 어떻게 운전해 가라는 거지?

내 기억에 명절이든 부모님 생신이든 아내는 이제껏 순순히 시가에 내려간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선물, 출발일, 교통편 등 모두 딴죽을 걸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오가는 차 안에서 싸움이 나곤 했다. 제발 이번에는 싸우지 말고 다녀오자는 게 서로 간에 하는 인사가 됐다.

아내가 매번 일이 그렇게 되는 이유를 말해준 적이 있었다. 내가 시가 일에 너무 민감하게 군다는 게 요지였다. 하지만 과연 정말 그럴까? 그런데 지난 22일 아내는 또다른 반응을 내놨다.

[치닫는 갈등] 블라디보스토크? 블라디보스토크??

아내는 블라디보스토크에 갈 계획이라고 했다.
 아내는 블라디보스토크에 갈 계획이라고 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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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장모님)는 다른 날 공연하시긴 하는데 광복절에는 엄마 모시고 블라디보스토크로 여행 다녀오려고."

맙소사. 광복절 여행은 내가 먼저 말을 꺼냈는데 장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간다고 하다니. 내가 말했던 시가 여행은 제대로 들은 걸까. 아내는 이런 말로 에둘러 '보험'을 들었다.

"아니면 어머님 두 분 만 모시고 댕겨올까? ^^;;;"

결혼식 이후로는 몇 년 동안 한 번도 대면하신 일이 없는 두 분이다. 과연 여행이 가능할까. 난 신혼 때 아내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넌 내 뒤에 있어. 우리 집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 괜히 드라마처럼 네가 먼저 나서고 그러지 마."

시가든 처가든 우리의 결혼을 통해 한 가족으로 묶이기는 했지만 30년 넘게 몰랐던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이 30년 동안 펼쳐놓은 감정과 사건의 질곡 속에서 아내와 나는 한없이 낯선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각자 집안의 문제는 각자가 앞장서서 풀어가는 게 순리라고 봤다. 아직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가족 행사마저도 함께해주지 않으니 머리가 아팠다. 나처럼 타지살이를 하는 고향 동창 녀석은 시가 식구들과 가는 여행에 아내 없이 아이들만 데리고 간다고 한다. 내가 뜨악한 반응을 보이자 그 녀석 하는 말이 이랬다.

"그게 서로 편해. 아내는 불편해하고 부모님도 당신들 마음대로 손자들한테 해주고 싶은 것도 못해주고 눈치만 보시니까. 따로 만나니까 속 편하고 좋더라."

나도 이제부터라도 마음 고쳐먹고 아내는 두고 아이만 데리고 가족 여행을 떠나야 하는 걸까?

이 답답한 마음을 들어줄 사람은? 원인 제공자, 아내밖에 없다. 그래서 아내에게 솔직하게 내 속을 까뒤집고 물어봤다. 그러자 의외의 반응이 돌아왔다. 아내는 내 기억과 짐작과는 전혀 다른 결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남편의 착각] 지금까지 남편은 아내를 이렇게 바라봤다

내 시선은 화로 가득했을 것이다.
 내 시선은 화로 가득했을 것이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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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시가에 대한 아내의 반응에 좀 민감한 편이다. 예컨대 갑자기 아버지가 일 때문에 상경하셨다는 소식(우리집에 들르신다고도 안 했다)만 전해도 집안 꼴이 엉망이라고 불평하기 시작하거나 감기 걸린 조카들이 우리집에 올지도 모른다고 하니까 우리 애한테 감기 옮길까 걱정한다. 그러면 나는 바르르 떨었다. 떨기만 하겠는가. 냉정해지고 화도 낸다. 이런 일로 다투기도 많이 다퉜다.

내가 이러는 데는 일종의 '보상심리'가 작동한다. 난 처가 일이라면 두 말 없이 나섰다고 믿었다. 아내가 시가 일을 대하듯이 주저한 적은 없던 기억이다. 무엇보다 처가는 경기도라 한 달에 두어 번은 들른다. 시가보다 훨씬 더 자주 간다. 어머니(장모님)께서 내게 해주시는 칭찬이야 당신 딸 잘 돌보라는 의미겠으나 어쨌든 좋은 사위, 착한 사위 소리 듣고 살아 왔다.

이러니 아내가 시가 일에 시큰둥하면 '나는 처가에 헌신을 하는데 네가 이러면 돼?'라는 생각이 들어 속이 상한다. 차라리 나도 처가 일에 관심을 끊고 모르쇠로 일관해 버릴까. 앞으로 처가에 갈 일이 있거든 아내와 아이만 보내면 내 속이 편해질까. 그런 속 좁은 생각도 든 게 사실이다.

[여자가 말한 진실] 남편의 보상심리는 '조작'돼 있었다

진실을 알아버렸어...
 진실을 알아버렸어...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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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이야기까지 다 털어놨다. 면전에서는 못하지만 대화창에다 대고는 확 풀 수 있었다. 그러자 아내는 이런 답을 줬다.

"(여행일정을 양보하지 않은 것에 대해) 신혼 초에는 내가 먼저 시가 식구들이랑 여행가자고 했고 매번 시간을 냈지. 그리고 처가에 자주 간다고 하는데 그건 항상 애 맡기러 가는 거잖아. 일부러 찾아뵌 게 아니라 오히려 미안해 난. 그리고 오빠 없이 나 혼자 친정에 간 적도 있어."

아내의 반격에 난 더 이상 뭐라 할 수 없었다. 곧이어 머리가 복잡해지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간의 일이 훅 지나갔다. 처가에 자주 가긴 했지만 우리 부부 둘다 주말 출근을 해야 할 때 아이를 맡기러 갔던 것이었다. 신혼 초에 시가 식구들과 2박 3일 여행을 가기도 했다. 또, 명절에 한 번도 처가에 먼저 들른 적 없이 곧장 시가로 직행한 뒤에 하루 정도 처가에 들러 얼굴만 비췄다.

아내의 말이 맞다. 내 기억도, 그 동안의 보상심리도 '조작'돼 있었다. 착각도 유분수랄까. 일이 이쯤 됐으니 엎드리는 수밖에 없다. 아내가 하자는 대로 해야 한다. 블라디보스토크? 모스크바라도 가자!

하지만 우리네 인생이 그런 식으로 깔끔하게 해결나지 않는다. 영화라면 내가 낯선 타지에서 이 짐 저 짐 다 들고 가이드까지 하는 모습으로 마무리날 법하다. 하지만 이건 한 인간의 인생이다. 극적 반전도 되새김질을 해야겠지만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고 과거는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가 핵심인 내 인생이다. 그래서 나는 고민에 빠져든다.

내 고민은 내 형편없는 기억력이나 이기적 유전자에 잠깐 머물렀다가 금방 빠져나왔다. 더 근본적인 문제를 발견한 탓이다. 이제껏 나는 시가의 대표성을 띄고 아내와 대결했다. 그런데 과연 나는 시가의 대표로 자격이 있긴 한가? 이걸 모르겠다.

즉, 내 부모님과 형제자매를 대변한답시고 사소한 갈등에도 크게 발끈했지만 과연 그것을 누가 원했나.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을지 모른다. 마치 처가에 애를 맡기면서 장인·장모님께 손자를 보여드리니 이 얼마나 칭찬받을 일인가 하고 내심 뿌듯해했던 착각과 같은 게 아니었을까? 지독하게 착각하면서 괜히 죄없는 아내만 잡았던 게 아닐까? 부모님·형제·자매 누구도 아내의 불성실함을 탓한 적이 없다. 실상 누구도 탓하지 않은 사람을 나만 탓했다. 아, 이거 뭔가 잘못 돼도 크게 잘못 됐다.

[갈등의 해소?] 가족애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이번 여행건만 해도 그렇다. 어쩌면 엄마는 여름에 여행을 가자고는 하셨지만 자식들 번거로우면 그냥 집에 있는 쪽을 진심으로 바라실지 모른다. 혹은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이라고 가볍게 생각하고 계실지도 모른다. 그럼 나 혼자 지레짐작으로 오버했던 거다. 이제껏 본가와 처가 사이에서 나의 행동 모두가 이 지경이었던 건 아니겠지? 등골이 오싹하다. 내가 지난 수년 간 쌓아온 가족애가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이 문제를 어찌 하면 좋을고! 불행히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겨우 '내가 옳고 아내가 틀렸다'는 내 생각이 바르지 못했다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이다. 입장이 달랐고 내 착각이 깊었다. 나는 지금껏 엉뚱한 대변자 역할을 하느라 바빴다. 그럼에도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까에 대한 답은 여전히 나오지 않는다. 가족끼리는 의리로 산다는 인생 선배들은 말한다.

"아내의 제안대로 해라. 그게 제일 좋다."

염치가 있으니 당분간은 그렇게 살긴 해야 한다. 하지만 길지는 않을 거다. 또 어느 시점이 지나면 네가 맞니 내가 맞니 하면서 투닥거리고 울고 불고 토닥이고 안아주고 화해할 것이다. 아마도 남은 인생 끝까지 그러리라 짐작된다. 그래도 우리는 주거니 받거니 대화창에서건 면전에서건 문제를 만들기도 하지만 풀기도 한다. 서툰 대화를 통해서.

생각해 보면 이쪽 저쪽 식구들 중 가장 대화가 적은 쪽은 시가 식구들이다. 대화를 한다고 해도 안부거나 1년 주기로 돌아가는 일들에 대한 상의와 결정일 뿐, 소소하고 자잘한 일상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그다지 나눠 본 적이 없다.

[끝나지 않은 결말] 나의 착각 때문에 일어난 일, 수습이 어렵네

수습이 안 된다...
 수습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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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칭 시가의 대변자 노릇을 했으면서도 감정을 드러내는 대화는 하질 못했으니 제대로 된 대변이 됐겠는가. 그렇다고 앞으로는 전화통을 붙잡고 아버지에게 일기 쓰듯 대화할 수 있을까? 시시콜콜 미주알고주알 세상사 이야기 나눌 수 있을까? 낯선 풍경이다. 그만큼 꽤나 어려운 일이다. 그렇게 손발 오그라드는 일은 술 마시고 몇 년에 한 번씩 이벤트로 하는 게 고작이 될 것이다.

처음에는 아내의 부덕함을 고발하려고 했는데 못난 남편의 자백이 됐고, 이제는 '불효자는 웁니다'가 될 판이다. 더 가다가는 뭐가 나올지 무섭다. 그만 이 사건의 결말을 지을 때가 됐다.

죄다 나의 착각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원인은 알았다. 하지만 수습이 되지 않는다. 내 인생이라는 영화는 반전이 있다고는 해도 격렬한 베드신이나 피와 살점이 튀는 자극과 선정성이 농후한 장르 영화가 되지는 못한다. 예술성은 없으나 그 지루함과 난해함은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영화 못지 않다. 그래도 상영은 계속 돼야 한다. 2시간을 할애해주겠다며 티겟을 구매하는 수백만 명의 관객은 없으나 일생토록 나의 착각을 보듬어 준 식구들, 여생의 착각을 받아줄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남편의 착각에서 비롯된 해프닝을 다룬 글입니다. 둘은 현재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태그:#시댁, #본가, #가족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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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 기업하면서 세상 사람들과 소통하려고 글을 씁니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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