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영화 프로젝트는 13년 동안 이어져왔다. 그간 수많은 관객이 극장에서, 학교에서, 집에서 인권영화를 감상했고 연출자 각각이 천착한 시선에 대해 함께 고민을 나눌 수 있었다.

인권영화 프로젝트는 13년 동안 이어져왔다. 그간 수많은 관객이 극장에서, 학교에서, 집에서 인권영화를 감상했고 연출자 각각이 천착한 시선에 대해 함께 고민을 나눌 수 있었다. ⓒ 영화사 진진


국가인권위원회(아래 인권위)는 지난 13년 동안 성별, 사회적 지위, 장애, 출신국가 등을 소재로 한국사회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차별과 폭력을 영화화하는 작업을 지원해왔다. 임순례, 정재은, 여균동, 박진표, 박광수, 박찬욱 등 한국을 대표하는 초호화 연출진이 발벗고 나선 2003년작 <여섯 개의 시선>을 시작으로 2005년 개봉작 <별별 이야기>, 2006년 개봉한 <다섯개의 시선>, 2009년 개봉작 <날아라 펭귄> 등 주목할 만한 작품이 적지 않았다.

그간 인권위의 인권영화 제작지원 프로젝트는 차별과 폭력 이전에 존재하는 시선에 주목해왔다. 영화를 찍는 연출자의 시선부터 영화를 보는 수용자의 시선, 일상에 존재하는 관심과 차별의 시선이 모두 그 대상이었다. 국내 유수의 감독들이 인권위의 프로젝트에 합류해 저마다의 시선으로 인권과 관련한 문제를 제기했고 관객은 그로부터 스스로의 시선을 의식하고 점검하는 계기를 가져왔다.

때로 이들 인권영화가 시대에 뒤처진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거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고정관념을 확대·재생산한다는 등의 비판을 받기도 한 게 사실이다. 더욱이 인권위로부터 제작지원을 받는 탓에 일정한 틀을 벗어난 파격적인 작품이 나오지 못하게 된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일각에선 인권이란 주제에 매몰돼 감독 본연의 색깔을 잃어버린 영화들이 주를 이루고 있어 지루하다는 목소리까지 나왔다.

그럼에도 인권영화 프로젝트는 13년 동안 이어져왔다. 그간 수많은 관객이 극장에서, 학교에서, 집에서 인권영화를 감상했고 연출자 각각이 천착한 시선에 대해 함께 고민을 나눌 수 있었다. 이 점만으로도 인권위의 영화제작 프로젝트는 나름의 성과를 거뒀다고 할 수 있겠다.

나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 그곳에도 누군가는 있다

시선 사이 첫번째 단편 <우리에겐 떡볶이를 먹을 권리가 있다> 속 한 장면. 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의 떡볶이를 향한 열망을 그렸다.

▲ 시선 사이 첫번째 단편 <우리에겐 떡볶이를 먹을 권리가 있다> 속 한 장면. 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의 떡볶이를 향한 열망을 그렸다. ⓒ 영화사 진진


올해 개봉한 인권영화는 <시선 사이>다. 최익환, 신연식, 이광국이라는 비교적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세 명의 연출자가 각기 한 편씩 감독했다. 각기 한국영화 제작부문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들로 저마다 색깔이 있는 연출스타일을 지녔다고 평가받는다. 아직 충분히 여물지는 않았지만 한국영화를 애정하는 관객이라면 <시선 사이>가 이들 가능성 있는 연출자들의 깜냥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시선 사이>는 각기 30분 내외의 3편의 단편으로 이뤄졌다.

첫 편은 최익환 감독의 <우리에겐 떡볶이를 먹을 권리가 있다>로 학교의 방침에 따라 쉬는 시간에 학교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된 여고생들이 떡볶이를 먹기 위해 벌이는 소동을 발랄하게 그렸다. 갖은 역경에 맞서 마침내 떡볶이를 먹으려는 여고생들의 분투에서 학습이란 이름으로 학생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한국의 교육현실을 풍자하고 비판하려는 감독의 의도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다만 떡볶이를 먹겠다는 주인공들의 욕구가 이를 제한하는 학교의 방침에 비해 지나치게 가볍고 비현실적으로 묘사돼, 보는 이의 공감을 사기 어렵다는 점은 아쉽다. 코미디적 요소를 다분히 가진 작품답게 장르성에 기대 현실의 문제를 유쾌하게 승화시키는 솜씨를 기대했으나 전반적으로 공감과 재미 사이에서 무엇도 잡지 못했다는 평가가 적절할 듯 싶다.

두 번째 영화는 신연식 감독의 <과대망상자(들)>이다. 세 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실험적이라 할 만한 구성의 영화로, 그룹 신화의 멤버이자 배우 김동완이 주연을 맡았다. 김동완 외에도 오광록이라는 인지도 높은 배우가 출연했으나 <시선 사이>를 본 많은 관객들이 <과대망상자(들)>을 가장 견디기 어려웠다고 평한다.

영화는 국가기관 혹은 그에 준하는 단체로부터 감시당한다고 생각하는 한 남자를 주인공으로 설정했다. 철저히 외부세계로부터 차단된 삶을 살아가려 하는 그는 우연한 계기로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일련의 사람들과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철저히 판타지적이고 코미디적인 분위기의 영화지만 전반적으로 새롭고 신선한 세계관을 던져주지 못할 뿐더러 지루하다는 게 가장 큰 단점이다.

무엇보다 개인에 대한 국가의 감시와 그로 인한 폐해를 그린 영화가 판타지와 코미디 사이의 어딘가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게 아쉬움으로 남는다. 실존하는 문제를 보다 사실적으로 엮어내거나 아예 직접적이고 파격적인 시도를 감행했다면 이보다 훨씬 볼 만한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TV시리즈 등에선 나름대로 괜찮은 연기를 펼쳐왔던 김동완의 영화진출은 이번에도 무리수로 보였다.

소주병에 한스럽게 불어넣은 어떤 고통에 대하여

시선 사이 세 번째 단편 <소주와 아이스크림> 주연을 맡은 배우 박주희. 영화는 소주병을 매개로 꿈과 현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솜씨가 인상적이다.

▲ 시선 사이 세 번째 단편 <소주와 아이스크림> 주연을 맡은 배우 박주희. 영화는 소주병을 매개로 꿈과 현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솜씨가 인상적이다. ⓒ 영화사 진진


마지막 세 번째 영화는 이광국 감독의 <소주와 아이스크림>이다. 청년실업문제와 기업의 청년착취, 빈곤과 연대의 파괴 등을 두루 드러내는 작품으로 현존하는 사회문제를 오히려 다소 늦은 시점에 짚었다고 생각된다. 지적은 늦었지만 영화의 완성도는 앞의 두 작품보다 높은 편이다. 영화적으로 흥미로운 표현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트릭이 제 역할을 다 하는 덕분이다.

널리 알려지진 못했으나 많은 작품에서 꾸준히 제 역할을 하고 있는 박주희가 간만에 주연을 맡아 여러모로 분투한다. 스스로 곧추서기 쉽지 않은 세상에서 낮은 곳에 처한 이들이 서로 기대고 의지하며 당면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을까? 이광국 감독이 <소주와 아이스크림>에서 전하는 메시지는 다소 뭉툭하고 늦긴 했어도 여전히 유효한 울림을 지니고 있다. 아마도 세 편 가운데 제일로 치는 관객이 적지 않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인권이라는 커다란 주제 아래 각각의 영화에 통일성을 기하는 세부주제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게 <시선 사이>의 단점이라 생각한다. 어쩌면 틀이 없어 자유롭다 말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틀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더욱 큰 자유를 추구하는 뛰어난 연출자를 보고픈 마음도 컸기에 아쉬움이 남았다. 어찌보면 제약만큼 창작자를 자극하는 것도 없으니까 말이다.

시선 사이 두 번째 영화 <과대망상자(들)>. 주연배우 김동완은 과대망상자들 사이에 파묻혀 존재감을 잃어버린다.

▲ 시선 사이 두 번째 영화 <과대망상자(들)>. 주연배우 김동완은 과대망상자들 사이에 파묻혀 존재감을 잃어버린다. ⓒ 영화사 진진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시선 사이 영화사 진진 국가인권위원회 김성호의 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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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음악이 주는 기쁨과 쓸쓸함. 그 모든 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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