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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윤덕영의 ‘벽수산장’과 그가 출가한 딸을 위해 지어준 집(현 종로구립미술관)
 일제강점기 윤덕영의 ‘벽수산장’과 그가 출가한 딸을 위해 지어준 집(현 종로구립미술관)
ⓒ 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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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소위 '서촌기행' 때 가장 많이 찾는 명소는 대부분 옥인동 주변에 몰려 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인 1927년 이 옥인동 면적의 54%를 소유한 조선인이 있었다. 조선의 마지막 황후 순정효황후의 큰아버지인 윤덕영이 그 주인공이다.

약 1만 6천 평 대지 위에 지하 1층 지상 3층, 795평에 이르는 당시로서 조선인 최대 가옥인 '벽수산장'이 그의 집이었다. 그 위치는 앞서 들른 종로구립미술관(박노수가옥) 뒤편 대부분의 땅이다.

김수정, ‘옥인동 윤씨가옥 사료조사 결과’, 서울시 문화재과, 2010, 45쪽 재인용, 빨강색은 1927년 윤덕영의 소유토지를 나타낸 것이다.
 김수정, ‘옥인동 윤씨가옥 사료조사 결과’, 서울시 문화재과, 2010, 45쪽 재인용, 빨강색은 1927년 윤덕영의 소유토지를 나타낸 것이다.
ⓒ 김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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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설계도는 프랑스인이 작성한 것이며, 이를 주프랑스공사에 가 있었던 민영찬이 귀국하여 자기 집으로 짓고자 입수한 것이나 재력이 미치지 못하여 건축에 옮기지 못하였다.

이후 이 설계도는 경술국치 때 특별한 공로를 세워 일본 국왕으로부터 귀족 작위와 함께 막대한 은사금을 받은 윤덕영이 입수하여 1913년부터 짓기 시작한 것이다. 건설업자 역시 전례에 없던 건축물이었기에 예상치 못한 자재가격 등으로 파산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으며 결국 1935년 완공되었다.

"집 한 채를 14, 5년이나두고 건축하고도 오히려 필역(畢役)치 못하였다 하면 누구나 경이(驚異)의 눈을 뜰 것이다."(조선일보 1926.5.31)

일제강점기 지도(경성시가도, 1933)에 나타난 벽수산장의 연못(점선으로 표시)
 일제강점기 지도(경성시가도, 1933)에 나타난 벽수산장의 연못(점선으로 표시)
ⓒ 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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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수산장은 단지 규모만 큰 것이 아니었다. 뱃놀이를 위해 현재의 옥인제일교회부터그 아래쪽으로 약 200평 넓이 연못까지 조성해 놓았다. 이것은 당시 지도에도 나타날 만큼 큰 규모였다. 그런데 한번은 집중호우에 이 연못의 둑이 터져 그 아래 초가집들을 덮치는 사고가 발생하자 그 주인인 윤덕영을 비꼬는 다음과 같은 기사까지 실린 적이 있다.

"연못이 어느 해인지 장마통에 터져서 앞 동네 초가집들이 물벼락을 맞았는데 손해는 대궐 안에서 물어주셨답니다. 그러기에 충심이 그리 갸륵하지요."(동아일보 1924.7.21)

인왕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터라 당시 사대문 안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벽수산장은 1940년 윤덕영이 죽고 양손 윤강로에게 상속되었으나 1941년 군부와 결탁한 미쓰이 광산주식회사에 처분했다.

그리고 해방 후 적산처리되어 덕수병원에 불하되었다가 전쟁 초기 조선인민공화국 청사, 서울수복 후 미군장교숙소, 1954년부터 UNCURK(국제연합 한국통일부흥위원단) 청사 등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다 1966년 실화로 2, 3층이 전소되어 결국 1973년 도로정비사업 때 철거되었다.

현존하고 있는 벽수산장의 안채로 '남산골 한옥마을'에 새롭게 복원하여 전시되고 있다
 현존하고 있는 벽수산장의 안채로 '남산골 한옥마을'에 새롭게 복원하여 전시되고 있다
ⓒ 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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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수산장의 출입구가 있었던 곳임을 알리는 문설주
 벽수산장의 출입구가 있었던 곳임을 알리는 문설주
ⓒ 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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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남은 흔적은 1919년 완공된 안채(옥인동 47-133)와 골목길에 방치된 정문 기둥 4개 가운데 3개이다(사진참조). 안채는 관리가 전혀 안돼 무척 낡은 상태로 현재 여러 세대가 입주하여 생활하고 있으며, 또 최근 이 일대가 옥인동재개발구역에 묶이면서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그리고 앞서 들른 박노수가옥도 윤덕영이 딸을 위해 지어준 것으로 벽수산장 대지 안에 있던 건물 가운데 하나이다.

남산골 한옥마을에 전시되고 있는 친일파가옥들

'남산골 한옥마을'에 전시되고 있는 5채의 한옥가운데 친일파의 가옥들(노란색으로 표시된 가옥)
 '남산골 한옥마을'에 전시되고 있는 5채의 한옥가운데 친일파의 가옥들(노란색으로 표시된 가옥)
ⓒ 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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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곳 안채는 현재 '남산골 한옥마을'에 있는 5채 한옥 가운데 '옥인동 윤씨가옥'으로 소개되고 있는 곳이다. 본래 이 가옥을 그곳에 옮겨 놓으려 하였지만 그리 오래된 집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윤덕영의 첩이 살았던 집이라 그런지 집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너무 낡고 손상이 심해 아예 같은 모양 건물을 새로 지어 놓은 것이다.

'남산골 한옥마을'은 국내인 뿐만 아니라 수많은 외국인들이 방문하여 우리의 전통가옥을 보고 느끼는 곳이다. 그런데 그곳에 옮겨지거나 새로 지어진 한옥 5채 가운데 3채는 대표적인 친일파의 가옥이다.

사람이란 무엇을 보면서 현상적으로 보여지는 건축물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살았던사람의 삶도 느끼고 상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과연 한옥마을을 기획한 사람은 관광객들에게 무엇을 전해주고자 하는 것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집과 집주인이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며 다음과 같은 화엄경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같은 물도 독사가 먹으며 독을 뿜고,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된다(蛇飮水 成毒, 牛飮水 成乳)"

<'남산골한옥마을' 가운데 친일파 가옥>
옥인동 윤씨 가옥
옥인동 윤덕영 벽수산장의 안채
관훈동 민씨 가옥
처음에는 박영효가옥으로 잘못 소개되다 민씨가옥으로 수정된 것으로 민씨란 바로 민영휘를 말한다.
제기동 해풍부원군 윤택영 재실
윤덕영의 동생이며 마지막 황후 순정효황후의 아버지로 일명 채무왕이라는 별명의 소유자이다.

위 가옥의 주인은 모두 <친일인명사전>(민족문제연구소)에 등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1910년 경술국치로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을 때 일본왕실로부터 은사금과 함께 귀족 작위를 받은 76명의 매국노에 포함된 인물들이다.


태그:#벽수산장, #윤덕영, #서촌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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