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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봉제공장에서 '미싱'을 돌리고 있는 아들을 둔 네팔 노인.
 한국의 봉제공장에서 '미싱'을 돌리고 있는 아들을 둔 네팔 노인.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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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 통증으로 안나푸르나에서 흘러 내려오는 계곡물을 건너지 못하고 숙소로 되돌아가는데 그 길목에서 한 노인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내 뒤에 누군가 있나 싶어 뒤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다. 그가 겸연쩍게 다가와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묻는다. 한국에서 왔다니까, 고향 사람이라도 만난 것처럼 악수를 청하며 불쑥 아들 얘기를 꺼낸다.

"내 아들이 한국에 있어요."

그리고는 짜이를 대접하고 싶다며 비좁은 집 마당으로 나를 안내한다. 나는 그에게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한다. 작은 양동이에 물을 받아 푸덕푸덕 세수를 하고 나더니 그제서 사진을 찍어도 상관없다고 말한다.

사진을 찍고 나자 그는 집안으로 들어오라 손짓한다. 부엌 겸 거실로 되어 있는 집안은 흙바닥으로 되어 있었지만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거실 한구석에 이층으로 올라가는 작은 계단이 놓여 있고 그 한가운데에는 맨바닥에 직사각형으로 파놓은 작은 화덕이 자리하고 있다.

그는 불씨가 남아 있는 화덕에 바싹 마른 장작 몇 토막을 올려놓고 호호 입 바람을 불어넣는다. 금세 불꽃이 피어오른다. 화덕의 쓰임새가 한 겨울 방안의 온기를 유지해가며 밤이나 고구마를 구워먹던 그 옛날 우리네 질화로를 닮아 있다. 이곳 화덕은 그 쓰임새가 더 많아 보인다. 히말라야 고산지대의 서늘한 날씨에 온기를 불어넣는 난로일뿐만 아니라 온갖 요리를 할 때도 쓰고 있다.

노부부는 내게 짜이를 끓여 내주고 그 귀하다는 석청까지 내주었다.
 노부부는 내게 짜이를 끓여 내주고 그 귀하다는 석청까지 내주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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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쑥 찾아온 낯선 손님을 곁눈질로 바라보며 어린아이처럼 말없이 빙글빙글 웃기만 하던 그의 아내는 살림도구가 진열되어 있는 허름한 찬장에서 분말 우유를 꺼낸다. 우유와 말린 찻잎을 넣은 검게 그을린 청동냄비를 화덕 위에 올린다.

노인은 안나푸르나 트레킹하는 외국인들이 수없이 오고 가는 란드룩에 살고 있어서 그런지 그나마 몇 마디의 영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이들 노부부에게는 4남 2녀, 여섯 명의 자식이 있는데 두 아들이 한국에서 일한다며(혹은 일했다며) 노인은 서툰 영어 몇 마디 섞어 온 몸으로 말한다.

"자녀분들은 한국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습니까?"

영어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은지 그는 온몸으로 재봉질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봉제공장에서 재봉사로 일하고 있는 듯싶다. 봉제 공장의 '미싱'를 떠올리는 순간 1970년대 일요일도 제대로 찾아 먹지 못하고 하루 15시간이 넘는 중노동에 시달렸던 미싱사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1970년 겨울, 서울 청계천 평화 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자신의 몸을 불태웠던 스물 두 살의 청년, 전태일 열사를 떠올렸다.

지금은 봉제 공장 재봉사들이 그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는 환경에서 일하고 있지만 네팔 노인의 아들과 같은 외국인 노동자들은 사업주를 잘못 만나면 열악한 노동 환경 속에서 온갖 천대를 받아가며 일하고 있을 것이었다.

"두 아들은 아직도 한국에 남아 있습니까?"
"아니요. 하나만 한국에 있습니다."

지난해 한국에서 돌아온 아들은 서울에서 번 돈으로 포카라에서 장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짜이를 마시고 나자 그는 페트병을 열어 거기에 담겨 있는 뭔가를 병뚜껑에 따른다. 그리고는 손바닥을 내밀어 보라고 한다. 손바닥에 따라준 그것은 꿀처럼 달콤했다. 그 달콤함이 너무 강해 혓바닥을 씁쓸하게 자극한다.

"꿀인가요?"
"예 맞습니다."

그는 높은 절벽을 타고 내리는 몸짓을 보이며 거기서 채취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말로만 듣던 히말라야의 야생벌꿀, 석청(石清)이다. 언젠가 히말라야를 소개하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석청을 채취하는 과정을 본 적이 있다. 절벽 위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가 아주 사나운 벌들을 쫓아내가며 석청을 채취하는데 그 과정이 매우 위험했다.

노인이 내준 석청 꿀물.
 노인이 내준 석청 꿀물.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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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여행자로서는 평생 맛보기 힘든 석청, 1리터에 4천~5천 루피(우리 돈으로 5만 원 정도 하지만 네팔 사람들에게는 큰돈이다.)를 받는다는 그 귀한 석청을 맛보게 해줘 너무 고맙다며 인사를 올리자 그는 손을 내저으며 내게 묻는다.
"안나푸르나 트레킹은 다녀왔습니까?"
"아니요. 무릎을 다쳐서 갈 수 없습니다."

무릎 때문에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포기했다고 하자 그는 다시 약간의 석청을 따라 자신의 한쪽 손에 바르더니 내게 바지를 걷어 올리라고 한다. 그리고는 압박 밴드를 발밑으로 내려놓고 내 무릎을 마사지 해준다. 석청을 바르면 다친 무릎이 한결 좋아질 것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한국에서 일하는 아들이 매달 꼬박꼬박 돈을 보내주고 있다는 통장 영주증
 한국에서 일하는 아들이 매달 꼬박꼬박 돈을 보내주고 있다는 통장 영주증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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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돌아온 아들을 통해 한국에 대해 많은 얘기를 들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궁금한 것이 많았다. 그는 한국에 있는 아들이 매달 꼬박꼬박 돈을 부쳐 온다며 박스에서 뭔가를 뒤적거리더니 영수증 같은 것을 내보인다. 한국에서 아들이 송금한 액수가 찍혀있는 영수증이다.

"한국에서 일하면 하루에 얼마나 받습니까?"
"일에 따라 다릅니다. 보통 외국인 노동자들은 하루 일당으로 5천 루피 정도 받게 될 것입니다. 밤늦게까지 일하면 좀 더 받을 것입니다."

서툰 영어로 장황하게 설명했다.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신중한 표정으로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이것저것 한국에 대해 알고 싶은 게 많은 그는 언어 소통의 벽 앞에서 안절부절 하는 순박한 표정을 내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부모가 다른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하는 두 살배기 아이의 웅얼거리는 말을 알아듣듯이 누군가에게 애정을 쏟게 되면 짧은 영어 단어 몇 개로도 소통이 가능하다.

그의 아들은 한국에서 악덕 업주를 만나 온갖 차별을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그에게 한국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무런 대가도 없이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 그의 아들이 한국인들에게 귀한 대접을 받지 못할망정 차별당하고 심지어 학대당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그의 아들은 한국인들이 꺼려하는 3D업종, 더럽고(dirty) 어렵고(difficult) 위험한(dangerous) 일을 감당하고 있지 않은가.

한국의 업주는 낯선 타국에 와서 힘든 일을 감당해 주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고마워 하고 외국인 노동자들은 돈벌이 할 수 있는 일자리를 내준 한국 업주에게 고마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네팔 노인은 1970년대 도시로 돈 벌러 간 자식을 둔 우리네 시골 부모를 닮아 있다.
 네팔 노인은 1970년대 도시로 돈 벌러 간 자식을 둔 우리네 시골 부모를 닮아 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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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나먼 타국에서 일하는 아들에 대한 걱정과 사랑으로 가득한 그의 눈빛이 가슴으로 파고들어와 나는 차마 그에게 한국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말할 수 없었다. 한국인으로서 나는 그저 그가 베풀어준 자비에 고맙고 미안할 따름이었다.

네팔 노인과 마주앉아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다보니 히말라야 안나푸르나가 올려다 보이는 란드룩에 와 있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서툰 영어와 판토마임하듯 몸짓으로 소통하고 있었지만 1970년대 한국의 허름한 산골 농가에 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팔 노인은 1970년대 도시로 돈 벌러 간 자식을 걱정하는 우리네 시골 부모를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자식이 돈벌이하고 있는 도시 사람을 만나기라도 하면 무조건 반가워 이것저것 그 도시에 대해 물어봤던 그 시절의 우리네 부모님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여 네팔 안나푸르나 기슭에서 자란 노인의 아들을 비롯한 외국노동자들을 차별하는 것은 가난한 생활에서 벗어나고자 도시 사람들이 꺼려하는 일거리를 찾아 나서는 청년들, 산골에 순박한 부모를 둔 우리네 청년들을 차별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 시절 우리의 부모님들이 그랬듯이 노인은 내게 자꾸만 뭔가를 대접하고 싶어한다. 집 안에서 나오자 그는 집 마당 한구석에 자라고 있는 자두나무에 다가가더니 몇 개의 자두를 따서 건네준다. 좀 더 내주고 싶은데 덜 익은 것들만 남아 있다며 아쉬운 표정을 짓는다.

"아드님의 한국 전화번호를 갖고 있습니까?"
"없습니다."

한국에 돌아가면 재봉사로 일하고 있는 그의 아들을 만나 식사라도 한 끼 대접하고 싶은데 그는 아들의 전화번호를 모른다고 한다. 나는 그에게 한국에서 사용하는 나의 손전화기 번호를 적어주고 아들과 소식이 닿게 되면 꼭 전해달라 당부하고 다만 '프랜바두루 구룸'이라는 한국에서 일하고 있다는 그의 아들 이름만 적어올 수밖에 없었다.

허리 굽혀 '나마스테' 인사를 건네고 노인과 헤어져 나오면서 한국의 봉제공장에서 '미싱'을 돌리고 있는 그의 아들이 사고없이 고향으로 되돌아오기를 기원하다가 '노찾사'의 노래 '사계'를 아프게 떠올렸다.

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어도
하얀 나비 꽃나비 담장 위에 날아도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흰 구름 솜구름 탐스러운 애기구름
짧은 쌰쓰 짧은 치마 뜨거운 여름
소금 땀 비지땀 흐르고 또 흘러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태그:#네팔 노인, #네팔 노동자, #석청, #미싱사, #'노찾사'의 '사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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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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