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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시내 '송상현 광장'에 세워져 있는 이 동상의 이름은 '충렬공 송상현 선생상'이다. 장군 복장이 아니라 선비 차림을 하고 있고, '장군'이 아니라 '선생'이라는 칭호가 부여되어 있다. '선생'은 공자 등의 현인에게만 적용되는 최고의 호칭이다.
 부산 시내 '송상현 광장'에 세워져 있는 이 동상의 이름은 '충렬공 송상현 선생상'이다. 장군 복장이 아니라 선비 차림을 하고 있고, '장군'이 아니라 '선생'이라는 칭호가 부여되어 있다. '선생'은 공자 등의 현인에게만 적용되는 최고의 호칭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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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중앙대로 818(전포동)의 광활한 삼거리 일대에는 '송상현 광장'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이곳에 가면 1978년 건립된 '충렬공 송상현 선생 상'의 위풍당당한 모습도 볼 수 있다.

오늘날 '부산 정신'으로 표상되는 '戰死易 假道難(싸워서 죽는 것은 쉽지만 길을 빌려 주기는 어렵다)'이라는 명언을 남긴 송상현은 임진왜란 발발 당시 동래부사로, 1592년 4월 15일 동래읍성에서 왜적과 맞서 싸우던 중 중과부적으로 전사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왜군은 1592년 4월 14일 부산진성을 함락 후 동래읍성으로 진군하였고, 성을 공격하기에 앞서 왜군은 취병장(吹兵場, 현 동래경찰서)에 군사들을 집결시킨 후 백여 명의 군졸들을 시켜서 동래읍성 남문으로 보내어 목패에다 "戰則戰矣 不戰則假道(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우리에게 길을 빌려달라)"라는 글을 써서 남문 밖에 세워두고 돌아갔다. 이에 동래부사 송상현은 목패에다 "戰死易 假道難"이라고 써서 적진에 던져 결사항전을 표명하였다.

4월 15일 왜군은 동래읍성을 포위하고 전투를 시작하였고, 동래부사 송상현은 군사를 이끌고 항전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되자 갑옷 위에 조복(朝服, 관원이 조정에 갈 때 입는 예복)을 받쳐 입고 장렬히 전사하였다. 왜군은 송상현 동래부사의 충렬을 기려 동문 밖에 장사를 지내주었다고 한다.'

위의 글은 '송상현 광장' 누리집에 실려 있는 '공원(송상현 광장)의 역사적 의미' 부분이다. 역사적 인물을 기려 동상이 건립되는 일은 흔하지만, 그의 이름을 따서 대도시 한복판 대도로 삼거리에 공원이 조성되고, 또 별도의 누리집까지 운영되는 것은 보기드문 경우이다. 이는 그만큼 부산 사람들이 송상현이라는 인물에 대해 향토적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부산사람들이 송상현을 '선생'으로 부르는 까닭

동래읍성의 북문. 적군이 성문을 공격할 때 앞뒤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옹벽이 설치되어 있다.
 동래읍성의 북문. 적군이 성문을 공격할 때 앞뒤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옹벽이 설치되어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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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의 이름 역시 그런 해석이 가능하다. 동상에는 '충렬공 송상현 선생 상'이라는 동판이 붙어 있다. 복장도 선비 차림이다. 대구광역시 동구 망우당공원에 세워져 있는 '紅衣將軍 郭再祐 先生 像(홍의장군 곽재우 선생 상)' 명칭은 선생이되 형상은 무장을 한 채 말을 호령하고 있는 장수의 면모이고, 달서구 월곡역사공원에 건립되어 있는 '월곡 우배선 장군 상'이 옷은 선비 복장이되 칭호는 장군인 데 반해, '충렬공 송상현 선생 상'은 명칭도 복장도 곧이 곧대로 선비를 표상하고 있다.

이때 '선생'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 송상현은 실제로 선비이다. 그는 26세 되던 1575년(선조 8) 문과에 급제한 문관일 뿐 장군이 된 적이 없다. 하지만 그가 선비라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 '충렬공 송상현 선생 상' 동판에 '선생' 두 글자를 넣었다고 볼 수는 없다.

요즘은 선생이 '교사'와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지만 본래는 공자 등 불세출의 현인들에게 쓰인 호칭이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본래 일찍부터 도를 깨달은 자, 덕업(德業)이 있는 자, 성현의 도를 전하고 학업을 가르쳐주며 의혹을 풀어주는 자, 국왕이 자문할 수 있을 만큼 학식을 가진 자 등을' 선생으로 존칭했다고 설명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국가 체제가 갖추어지면서 교육의 기능이 강화되자, 선생이 남을 가르치는 사람을 지칭하는 어휘로 의미 변화를 일으켰다'면서 '통일신라시대까지의 사실을 전하는 각종 기록에서 선생으로 불린 인물로는 강수 선생(强首 先生)과 백결 선생(百結 先生)이 있다'라고 풀이한다. 그렇듯 선생은 드물다는 것이다. 그런 선생을, 부산 사람들은 송상현 동래부사를 부를 때 사용하고 있다.

선조실록에는 매우 간략하게 언급된 '동래읍성 전투'

동래읍성 북문의 누각
 동래읍성 북문의 누각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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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4월 14일자 <선조실록>은 임진왜란 발발 첫날의 기사를 '왜구가 침범해 왔다'로 시작한다. 실록은 '이보다 먼저 일본 적추(賊酋) 평수길(平秀吉, 풍신수길)이 관백(關白)이 되어 여러 나라를 병탄하고 잔포가 날로 심했다, 그는 항상 중국이 조공을 허락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앙심을 품고 일찍이 중 현소 등을 파견하여 "요동을 침범하려 하니 길을 빌려 달라"고 청했다, 우리나라에서 대의(大義)로 매우 준엄하게 거절하자 적은 드디어 온 나라의 군사를 총동원하여 현소, 평행장, 평청정, 평의지 등을 장수로 삼아 대대적으로 침입해왔다'라고 덧붙인다.

물론 기사에는 동래부사 송상현보다 부산진첨사 정발에 관한 내용이 먼저 다뤄진다. 부산진성 전투가 4월 14일에 벌어졌고, 동래읍성 전투는 그 다음날인 4월 15일에 치러졌기 때문이다. 실록은 '적선이 바다를 덮어오니 부산첨사 정발은 마침 절영도(絶影島, 영도)에서 사냥을 하다가, 조공하러 오는 왜라 여기고 대비하지 않았는데 미처 진(鎭)에 돌아오기도 전에 적이 이미 성에 올랐다. 발(撥)은 난병(亂兵) 중에 전사했다'라고 14일 전황을 전한다. ('왜적들이 그의 첩까지 칭송한 장군' 기사 참조)

15일 전투에 관한 기사는 지나칠 정도로 간략해서 '이튿날 동래부(東萊府)가 함락되고 부사 송상현(宋象賢)이 죽었으며, 그의 첩(妾)도 죽었다'가 전문이다. 실록은 '적은 드디어 두 갈래로 나누어 진격하여 김해, 밀양 등 부(府)를 함락하였는데 병사 이각(李珏)은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달아났다, 2백 년 동안 전쟁을 모르고 지낸 백성들이라 각 군현(郡縣)들이 풍문만 듣고도 놀라 무너졌다'라고 이어진다.

보물 392호인 <동래부 순절도>의 원본은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592년 4월 14일 동래부 전투 상황이 묘사된 이 그림과 관련해서는  1709년(숙종 35) 동래부사 권이진이 쓴 화기(畵記)가 전해진다.
 보물 392호인 <동래부 순절도>의 원본은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592년 4월 14일 동래부 전투 상황이 묘사된 이 그림과 관련해서는 1709년(숙종 35) 동래부사 권이진이 쓴 화기(畵記)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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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의 기사만으로는 동래읍성 전투의 내막을 제대로 가늠하기가 어렵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국조 인물고(國朝人物考)>의  '비명(碑銘)'을 찾아본다. <국조 인물고>는 조선 개국 이후 숙종 대까지의 중요 인물 2065명에 관한 대표적 기록문을 1인당 1종씩 모아 편집한 책으로, 정조 때에 간행되었다. 송시열이 쓴 송상현 비명을 현대문으로 대략 바꿔가면서 발췌독으로 읽어본다.

'왜추(倭酋) 수길이 (중략) "명나라를 범하리라" 하였다. 동래는 적과 처음 충돌할 곳이어서 사람들이 사지(死地)로 여겼다. (중략) 임진년(1592) 4월 적장 평의지 등이 대거 쳐들어와 14일 부산(부산진성)을 함락하고 15일 부성(府城, 동래읍성)을 공격해 왔다. 처음에 병사(兵使, 경상좌병사) 이각(李珏)이 변(變, 전쟁 발발)을 듣고 (동래읍성에) 와서 (공과) 만났는데, 적의 기세가 매우 대단한 것을 보고는 겁을 집어먹고 도주하려 했다. 공이 바른 말로 꾸짖으며 죽음으로 성을 지키자고 요청했지만 이각은 끝내 달아나버렸다. 이에 아군의 분위기가 적을 크게 두려워하는 기색에 빠졌다.'

'공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기백을 떨치면서 (끝까지 싸워 적을 물리치자, 이길 수 있다는) 맹세를 하고, 성을 돌면서 방어 준비에 돌입했다. 탄환과 화살이 서로 쏟아지면서 산이 무너지는 듯했다. 공은 편안한 낯빛으로 조복(朝服)을 가져와 갑옷 위에 차려 입고 누각에 오르더니 두 손을 모아 단정하게 앉았다. 적들이 밀어닥쳤다.'

전부터 알고지낸 적장이 피신을 권유했지만...

적장 중에는 평조익(平調益)이란 자가 있었다. 일본 사신단의 일원으로서 동래부에 드나들었던 평조익은 예전부터 마음으로 송상현을 존경해 왔다. 성 안으로 들어온 그는 송상현에게 눈짓을 보내어 피신할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죽음이 촌각 앞에 닥쳐왔는데도 송상현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동래부사의 갑옷과 투구. '부산 충렬사'에 전시되어 있다.
 동래부사의 갑옷과 투구. '부산 충렬사'에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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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평조익은 다른 일본군들이 지켜보는 와중에도 송상현의 옷자락을 잡아당겨 성 아래 빈터로 이끌려 했다. 송상현은 평조익의 팔을 뿌리쳤다. 송상현은 북쪽으로 엎드려 대궐을 바라보며 큰 절을 올렸다. 그리고는 부채를 꺼내어 그 위에 부친께 올리는 편지를 썼다.

'孤城月暈 외로운 성은 달무리처럼 포위되었지만
列鎭高枕 이웃 진들의 지원 기척은 없습니다
君臣義重 임금과 신하의 의리가 무거우니
父子恩輕 아버지의 은혜는 가벼이 하오리다'

부채에 글을 다 쓴 송상현이 주위를 둘러보며 '혹시 오늘 이곳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는 사람이 있거든 이 부채를 고향에 계시는 아버지께 전해 다오, 그리고 내 주검을 거두어 묻어주기 바라노라, 나는 배꼽 아래에 검은 점이 있으니 목이 없더라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고 말했다. 둘러서 있던 장졸들과 노비들이 눈물을 쏟으며 공앞에 엎드렸다. 그 순간, 적군의 날카로운 칼이 공의 머리를 내쳤다. 불과 42세, 그는 목이 잘리고, 가슴에 칼이 박히고, 다리에 창날이 찍힌 채 세상을 떠나갔다. 곁에 머무러 있다가 생포되었던 공의 첩 금섬(金蟾)은 사흘 동안 내내 적들을 통렬히 꾸짖던 끝에 결국 살해되었다.

스스로 동래로 달려온 조영규, 노개방 등 모두 전사

칼을 곧추세우고 적진 속으로 뛰어들었던 양산군수 조영규(趙英圭, 1535-1592)도 마침내 순절했다. 조영규는 왜적이 쳐들어 왔다는 소식을 듣자 그 길로 곧장 동래부로 달려왔었다.

"양산이 작은 고을이라 무기도 제대로 없고 병사도 몇 안 되니 부사와 함께 동래에서 힘을 모아 왜적을 물리치는 것이 낫겠다 싶어 한걸음에 왔소."

조영규의 말을 듣고 송상현은 조영규의 두 손을 꼭 부여잡았다.

"잘 하셨소이다. 이곳에서 막아야 적들이 북으로 올라가지 못할 것이외다. 동래가 적의 수중에 떨어지면 양산, 김해, 밀양 등이 함락되는 것은 불문가지가 아니겠소이까?"

금세 왜적들이 성 안으로 밀려왔다. 두 사람은 북쪽을 바라보며 나란히 절을 올렸다. 조영규는 눈물을 쏟으며 임금께 하직 인사를 올렸다.

"신은 살아서는 적을 물리치지 못하오나 죽은 뒤에라도 마땅히 이 성을 지키는 귀신이 되어 적들을 참살하겠나이다."

동래읍성역사관에서 보는 동래읍성의 모습. 문화재청 누리집과 송공단 외삼문 앞 안내판에는 송공단이 송상현 공이 전사한 정원루 터에 세워졌다고 되어 있지만 이 조형물에는 송공단과 정원루가 서로 다른 곳에 자리잡고 있다.
 동래읍성역사관에서 보는 동래읍성의 모습. 문화재청 누리집과 송공단 외삼문 앞 안내판에는 송공단이 송상현 공이 전사한 정원루 터에 세워졌다고 되어 있지만 이 조형물에는 송공단과 정원루가 서로 다른 곳에 자리잡고 있다.
ⓒ 동래읍성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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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현, 조영규, 금섬 외에도 이날 동래성에서는 비장 송봉수(宋鳳壽)와 김희수(金希壽), 향리 송백(宋伯), 백성 김상(金祥) 등 무수한 사람들이 적과 싸우다 죽었다. 이촌녀(二村女, 두 사람의 시골 여인)도 김상을 도와 지붕 위 기왓장을 떼어 아군에 전해주다가 마침내 적의 칼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겸인 신여로(申汝櫓)는 노모를 모시고 산다는 이유로 송상현이 성밖으로 피신하라 했지만 공이 순절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돌아와 왜적에 대항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동래교수 노개방(盧蓋邦, 1563-1592) 등은 향교에서 적과 대전하다가 순절했다. 1588년 문과 급제를 거쳐 동래교수로 부임했던 노개방은 왜적이 쳐들어온 날 어머니를 뵈러 밀양에 가 있었다. 그는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급히 향교로 돌아왔는데 이미 적들이 물밀듯 쳐들어와 있었다. 부사 송상현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칼을 쓸 줄 모르는 문관이었지만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적들을 향해 분연히 대항했다. 노개방이 장렬히 전사하고, 스승의 뒤를 따르던 문덕겸(文德謙)과 양조한(梁潮漢) 등 학생들도 모두 죽었다.

모든 광경을 지켜본 평의지(平義智) 등 적장들이 한결같이 탄식하면서 대장 소서행장(小西行長,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경과를 보고했다. 소서행장은 송상현 부사의 몸에 죽음의 위해를 가한 군사를 오히려 끌어내어 참수했다. 그 후 송상현을 실은 상여가 지나갈 때에는 소서행장 이하 왜장들이 모두 말에서 내려 예의를 표시했다. 이런 일은 '전사상 유례가 없는 것(부산시 발행 <충렬사>의 표현)'이었다. 전쟁 초기의 적장들조차 이 정도였으니, 오늘날의 부산 시민들이 송상현을 '선생'이라 높여 부르는 데에는 조금의 잘못도 과장도 없으리라.

충렬사 뜰에 세워져 있는 송상현 명언비. 적이 길을 비켜달라고 하자 송상현은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이라고 대답했다.
 충렬사 뜰에 세워져 있는 송상현 명언비. 적이 길을 비켜달라고 하자 송상현은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이라고 대답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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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진성 전투와 동래읍성 전투에서 조선의 장졸과 백성들이 얼마나 처절하게 죽어갔는지는 송상현과 정발 등이 장렬하게 전사한 지 일곱 달도 더 지난 1592년 11월 25일자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극명히 증언해준다. 선조가 묻는다.

"정발과 송상현은 과연 죽었는가?"

김수가 대답한다.

"정발과 송상현이 누군가는 죽지 않았다고 하지만 죽은 게 틀림 없습니다. 잘못 전해진 말 가운데 심지어는 송상현이 적장(賊將)이 되었다고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포위를 당했을 때 홍윤관(洪允寬)이 성밖으로 나가기를 권했으나 상현은 말하기를 '지금 성을 빠져 나가더라도 어디로 간단 말이냐?' 하고는 남문(南門) 위에 팔짱을 끼고 앉아 있으니 적이 들어와 죽이고, 바로 그의 목을 대마도로 보냈다고 합니다."

1592년 8월 7일자 <조선왕조실록>에도 이와 비슷한 기록이 나온다. 이날 선조는 신하들에게 '정발은 죽었는가?' 하고 묻는다. 선조에게는 '적이 종일 목을 매어 두었다가 저녁에 그만 죽였다고 합니다'라는 답변이 돌아온다. 물론 이 두 기사는 당시 조선 조정의 정보 파악력이 그만큼 아둔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하지만 그보다는 부산진성과 동래읍성 전투에서 우리 선조들이 너무나 처절하게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부사와 첨사조차도 죽었는지 살았는지 임금이 알지 못했고, 심지어는 송상현이 항복하여 왜장으로 활약하고 있다는 지독하게 잘못된 소문이 전쟁 발발 일곱 달 뒤까지도 흘러다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해주는 기록으로 보아야 옳을 것이다.

1년 가까이 생사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송상현

송상현과 정발이 전사하고 1년여 지난 뒤의 기록은 그제야 송상현과 정발의 생사에 대한 인지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송상현과 정발이 순국하고 13개월 이상 지난 1593년 5월 27일자 <선조실록>에 나오는 명나라 사신 경략과 선조의 대화가 바로 그 증거이다. 경략이 선조에게 묻는다.

"귀국(조선)이 부산을 분할하여 왜적에게 내어주고 또 계패(界牌, 국경 표지)까지 세웠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선조가 대답한다.

"부산은 동래와 연결된 땅인데 우리나라가 어찌 원수 왜적에게 떼어줄 리 있겠소? 우리나라는 강토를 우리 선조 때부터 중국에서 받았는데 어찌 사사로이 마음대로 떼어 주겠습니까? 땅을 떼어 적에게 주면 마침내는 나라를 보존할 수가 없으니 우리가 비록 어리석다 해도 어찌 그런 것조차 알지 못하겠습니까?"

선조가 심희수에게 '경략의 의심이 아직도 풀어지지 않은 듯하니 상세하게 변명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하고는, 이어서 경략에게 덧붙인다.

"우리나라가 정말로 부산을 떼어서 왜적에게 주었다면 본진(부산진)의 첨사 정발과 동래부사 송상현 등이 어찌 왜적에게 전사했겠습니까? 연전(年前)의 자주(咨奏, 상소문 등 임금과 신하가 묻고 답한 기록)를 살펴보면 명백하여 의심이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나라와 일본은 큰 바다로 떨어져 있는데 저들이 어떻게 바다를 건너와서 거주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김연광 (1524~1592)

김해김씨로 자는 언정(彦精), 호는 송암(松巖)이다. 1555년(명종 10)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회양부사로 부임했다.

적들이 강원도로 침범하자 관리와 군사들이 모두 도망쳤다. 그는 혼자 회양성 문앞에 조복을 입은 채 똑바로 앉아 있었다. 적들이 위협하면서 손가락을 먼저 칼로 찍었는데 그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의연히 왜적들을 꾸짖었다. 그는 마침내 적들에게 참살당하였다. 개성의 숭절사(崇節祠)에 제향되었다. 문장에 능하고 박학했으며 강직 청렴한 선비로 널리 알려졌다. 저서로는 <송암유고>가 있다.

하지만 이 기록이 임금을 비롯한 조정이 송상현 등의 비장한 전사 과정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는 완전한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 그로부터 다시 다섯 달이 지난 1593년 10월 29일, 비변사는 '동래부사 송상현과 회양부사 김연광(金鍊光)은 모두 순국하여 절의가 칭송할 만한데도 장계(狀啓, 보고서)에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포장(褒奬, 상)을 받지 못하고 있어 인정(人情, 사람들의 마음)이 매우 답답해 합니다. 시급히 실적을 조사하여 일체 포장하고 증직(贈職, 벼슬을 높여줌)함으로써 충혼을 위로하게 하소서' 하고 선조에게 건의한다.

이때 선조는 '아뢴 대로 하라'면서도 '송상현과 김연광의 일에 대해서는 내가 자세히 모르니 다시 살펴서 조처하라'고 답변한다. 전사한 지 18개월 보름이 지났는데도 조정은 여전히 송상현의 죽음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는 지경이다. 그만큼 1592년 4월 15일 우리 선조들의 동래성 죽음은 너무나 처참했던 것이다. 

송공단 외삼문
 송공단 외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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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는 동장대, 서장대, 북장대와 성곽의 옛모습을 추정해 볼 수 있는 동래읍성 터(부산광역시 기념물 5호)가 남아 있다. 산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182m 가량의 성곽과 장대(將臺, 장수의 지휘 장소)들은 1980년에 복원되었는데, 특히 옹성(甕城)이 볼 만하다. 옹성은 적들이 성문 바로앞까지 공격해 왔을 때 앞뒤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설치된 장독(甕) 모양의 둥글고 높은 성(城)벽이다. 또, 성내인 복천동 1-2번지에 건립되어 있는 동래읍성역사관도 필수 답사지이다.

그런가 하면, 동래읍성역사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동래시장길 27에는 동래읍성 전투에서 전사한 선열들을 기려 세워진 제단 송공단(宋公壇, 기념물 11호)이 있다. 출입문이 시장에 붙어 있어 차량으로는 그 앞을 지나치기 어렵지만 담장 바로옆에 공영주차장이 있어 방문하는 데 별 지장은 없다. 물론 1742년(영조 18) 동래부사 김석일(金錫一)이 송공단을 세웠을 때에는 말이 외삼문까지 곧장 당도했을 것이다. 그래서는 아니겠지만 하마비(下馬碑)는 눈에 띄지 않는다.

남문 밖에 세웠던 전망제단, 134년 뒤 송공단으로 재건

송공단의 본래 이름은 전망제단(戰亡祭壇)이었다. 그리고 위치도 현재의 자리가 아니었다. 1608년 동래부사 이안눌(李安訥)이 동래읍성 남문 밖에 1592년 4월 15일 동래읍성 전투 순절 선열들을 제사 지내는 장소라는 의미의 전망제단을 처음 세웠다. 그로부터 134년 지난 1742년에 이르러 김석일이 초췌해진 전망제단을 새로 키워 송상현이 순절한 정원루(靖遠樓) 터에 재건했다.

문화재청 누리집도 송공단이 '본래 임진왜란 때 동래부사 송상현이 순절한 정원루 터에 설치' 되었으며 '송상현을 비롯하여 동래성을 지키다 순절한 분들을 모셨다'라고 해설한다. 송공단 외삼문 왼쪽에 세워져 있는 현지 안내판에도 동일한 문장이 쓰여 있다. 문화재청 누리집의 내용과 현지 안내판은 전문이 동일하다. 두 해설에는 '이 단이 세워지기 전에는 동래읍성의 남문 밖 농주산(弄珠山, 동래경찰서 자리)에 임진왜란 때 순절한 분들의 전망제단을 세워 동래부사 송상현과 양산군수 조영규, 동래교수 노개방을 비롯하여 동래성에서 순절한 분들을 모셨다, 1742년 송공단이 세워지자 그 곳으로 옮겼다'라고 안내되어 있다.

송공단 내삼문
 송공단 내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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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삼문으로 들어서면 다시 내삼문이 나타난다. 모두 15기의 비석으로 이루어진 제단은 내삼문 안에 있다. 그리고 제단의 동쪽 뒤편 구석에 조그마한 비석이 하나 더 있다. 이들 16기 중  송상현 선생을 기리는 '충렬공 송상현 순절비'가 가운데에 있으면서 규모도 가장 큰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가 정3품의 고위 관직인 동래부사를 역임해서가 아니라 1592년 4월 15일 전투의 주장(主將)으로서 장렬하게 순절한 '부산 정신'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비석의 글들은 모두 한자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독자의 편의를 위해 한글로 읽는 소리를 붙여서 비석들을 소개하려 한다. 종4품 양산군수 조영규와 종6품 노개방의 비석은 송상현 순절비 동쪽에 세워져 있다. 송상현 순절비보다는 작지만 여타 다른 비석들보다는 조금 더 크고 높다.

송상현 순절비 서쪽에는 8기의 비석들이 도열해 있다. 김희수, 송봉수, 양조한, 문덕겸, 송백, 김상, 신여로 선열을 기리는 비석들이 이어지고, 끝에는 '同時死亂民位(동시사란민위)'라는 이름의 빗돌이 서 있다. '(송상현 등과) 같은 때에 전란을 맞아 죽은 백성들'을 기려 세워진 비석으로, '位(위)'는 해마다 음력 4월 15일이 되면 이곳에서 그들을 제사지낸다는 뜻이다. 

송공단 내부의 '충렬공 송상현 순절비' 등 비석들
 송공단 내부의 '충렬공 송상현 순절비' 등 비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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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송상현 공 등 남자 선열 11분을 모시는 비석이 끝나면  담장으로 에워싸인 4기의 비석도 별도로 세워져 있어 눈길을 끈다. 이른바 '남녀칠세부동석'이다. 남자와 여자는 나이가 7세가 되면 그 이후부터는 같은 자리에 있어서 안 된다는 철학을 가졌던 것이 조선 시대라 그런지, 여성 선열들을 기리는 4기의 비석들은 죽어서도 남자들과 다른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낭군 송상현의 죽음을 지켜본 그의 첩 금섬의 비석 '金蟾殉亂碑(금섬순란비)'가 있고, 그 동쪽에는 2기의 '의녀위(義女位)'가 있다. 이름은 전해지지 않고 지붕 위에서 기왓장을 떼어 김상에게 전해주다가 결국 왜적들의 칼날 아래 목숨을 잃은 두 여성을 기려 세워진 비석이다. 금섬순란비 서쪽에는 '同時死亂婦女位(동시사란부녀위)'가 세워져 있다.  남성들의 11기 비석이 설치된 제단의 '同時死亂民位'와 마찬가지로, '같은 날 전란을 맞아 죽임을 당한 부녀자들'을 제사 지내기 위해 건립된 빗돌이라는 뜻이다.  

송공단 전경. 사진 오른쪽 끝부분 나무 아래에 홀로 서 있는 비석은 전투에서 죽은 노비를 기려 세워진 것이다.
 송공단 전경. 사진 오른쪽 끝부분 나무 아래에 홀로 서 있는 비석은 전투에서 죽은 노비를 기려 세워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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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섬(金蟾)은 '김섬'이 아니라 '금섬'이다. 그녀는 정3품 동래부사의 첩이었지만 성씨가 새겨져 있지 않다. 즉, 동래읍성 전투에서 적과 싸우다 장렬하게 죽은 수많은 일반 백성들의 성명이 전해지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송공단에는 '동시사란민위'와 '동시사란부녀위'가 건립되어 있다. 남녀와 신분에 따른 차별이 극심했던 조선 사회였지만, 여성과 일반 백성을 잊지 않고 그들의 죽음을 기리는 비석을 세운 이들의 됨됨이가 따스하게 느껴진다.

게다가 송공단 경내에는 노비를 기리는 비석까지 세워져 있어 더욱 마음이 훈훈하다. 관청 노비 철수와 매동의 충성심을 본받으라는 뜻에서 세워진 비석 '故官奴鐵壽邁同効忠碑(고관노철수매동효충비)'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이 조그마한 비석은 제단 위가 아니라 뜰 외진 구석에 홀로 서 있다.

두 관노는 송상현의 주검을 수습한 인물들이다. 그들은 동래읍성 전투에서 전사하지 않았기에 제단 위에 모셔지지는 못했지만,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난 후 공의 시신을 찾아내는 정성을 보였다. 두 사람은 공이 죽음을 앞두고 "나는 배꼽 아래에 검은 점이 있으니 목이 없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주검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하고 말할 때 그 앞에 엎드려 눈물을 쏟았던 관노들이다. 1742년, 김석일 등 후세인들은 결코 두 관노를 잊지 않았다.

송공단에는 동래읍성 전투에서 죽은 여인들을 위한 빗돌이 별도로 세워져 있다. 재미(?)있는 점은 남성들의 비석과 경계를 나누어 담장을 설치해 두었다는 사실이다.
 송공단에는 동래읍성 전투에서 죽은 여인들을 위한 빗돌이 별도로 세워져 있다. 재미(?)있는 점은 남성들의 비석과 경계를 나누어 담장을 설치해 두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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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흘러 1908~1909년, 이때는 이미 나라가 일본의 손아귀에 거의 들어가버린 사실상 망국의 시대였다. 이 무렵 순종은 나라 안을 돌아다녔다. 허수바이 황제 순종을 백성들 앞에 내세워 흉흉한 민심을 다스리려 한 이등박문(伊藤博文, 이토 히로부미)의 획책에 순응한 순행이었다. 대구, 부산, 마산, 개성, 평양, 신의주 등을 돌아다닌 순종은 "이토 통감이 이 추운 날씨에도 이렇게 멀리까지 왔으니 짐의 마음이 매우 기쁘도다(伊藤統監 朕爲寒節不拘 此地來到朕心嘉悅)" 따위의 발언을 일삼았다.

이등박문에 이끌려 부산을 방문했던 순종

1908년 12월 18일 부산을 방문한 순종은 일본 군함에 올라 천황을 위해 축배를 들었다. 군함이 없는 대구 등지에서 신사 참배를 하면서 천황을 떠받들었다. 그렇게 끝없이 나약한 인물이 순종이었다. 그는 결코 한 나라의 왕답지 못했다. 만약 순종이 송상현, 정발 등 무수한 선열들처럼 칼을 들고 왜적과 싸우다가 죽었더라면, 병장기를 들 힘이 없어 지붕 위에 올라 기왓장을 아군에게 전달하다가 죽임을 당한 두 여인만한 마음만 있었더라면, 금섬처럼 끝까지 말로써 적들을 꾸짖다가 순절했더라면, 그래도 조선은 그처럼 무기력하게 망국의 길을 걸었을까.

하지만 순종은 신하와 백성들에게는 자신을 위해 죽을 것을 요구했다. 당일 <승정원일기>에는 순종이 "나라에 몸바친 외로운 충성은 해와 별처럼 밝으며(殉國孤忠 皎若星日), 영명하고 씩씩한 영혼은 천고에 살아 있는 듯하니(英靈毅魄 千載如生), 이 고장(부산)을 지나면서 더욱 더 감회가 일어난다(駕過此鄕 尤庸興感)"면서 '충렬공 송상현과 충장공 정발의 사당에 지방관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도록 하라는 교지를 내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왕은 나라를 위해 죽을 수 없지만, 신하와 백성들은 왕을 위해 죽어야 한다!


태그:#송상현, #송공단, #동래읍성, #임진왜란, #전사이가도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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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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