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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화가 나네요. 우리는 그 판사를 못 믿겠어요."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클라라 카운티 법정의 배심원들이 자신들에게 배당된 재판의 심의를 거부했다. 직장까지 빠지며 자진해 재판에 참여하려던 배심원들이 이런 결정을 한 건 재판을 주관할 판사의 이름을 확인하고 나서다.

배심원들에게 거부당한 판사의 이름은 아론 퍼스키. 지금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이 판사는 지난 6월 2일, 스탠퍼드 대학에서 발생한 성폭행 사건 가해자에게 징역 6개월의 솜방망이 선고를 내린 장본인이다. "피의자가 아직 젊고 초범인 데다 사회에 위협적 존재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이유였다.

판사를 해임시켜야 한다는 서명운동이 전국적인 호응을 얻고 있는 가운데 그가 소속된 법원은 퍼스키 판사에게는 성폭행과 관련한 어떠한 재판도 맡기지 않겠다고 결정했다. 성폭행범에게 관대했던 판결 하나로 아론 퍼스키 판사는 주민들과 자신이 속한 조직의 '신뢰'를 모두 잃은 것이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목격자도 명확했지만...

 미국 스탠퍼드대 수영선수 브록 터너의 성폭행 판결 논란을 보도하는 CNN 뉴스 갈무리.
 미국 스탠포드대 수영선수 브록 터너의 성폭행 판결 논란을 보도하는 CNN 뉴스 갈무리.
ⓒ C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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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사건은 지난 2015년 1월의 어느 토요일 밤, 캘리포니아 스탠퍼드 대학 내에서 발생했다. 이 학교의 수영과 성적 장학생이던 브록 터너는 술에 취해 쓰러진 여성을 쓰레기통 뒤로 끌고 가 성폭행한다.

이후 자전거를 타고 범행 현장을 지나가던 스웨덴 학생 두 명이 목격해 제지했고, 의식 없는 여성을 팽개치고 도망가던 브록 터너는 출동한 경찰에게 현행범으로 체포된다. 목격자도, 피해자도, 가해자도 분명한 이 사건은 연일 미국 언론을 도배할 정도의 뉴스가 아닐 수 있었다. 처음부터 브록 터너가 자신의 혐의를 인정하고 잘못을 반성했다면 말이다.

하지만 가해자의 부모는 아들의 범죄를 인정하는 대신 일류 변호사와 사설탐정을 고용한다. 변호사는 법정에서 브록 터너가 얼마나 자랑스러운 아들이었고, 속 깊은 친구였으며, 스탠퍼드를 빛낼 뛰어난 수영 장학생임을 강조하며 이 사건은 성폭행이 아닌 합의된 성관계였다고 주장한다.

반면 피해 여성에겐 알코올 중독자 프레임을 씌우며 잘 나가는 운동선수를 유혹한 '헤픈' 여자로 보이도록 하는 진술을 유도한다. 브록의 아버지는 판사에게 "고작 20분의 행동(20minutes' action)때문에 치르는 대가로는 너무 가혹하다"고 진정한다. (관련 기사: "스탠퍼드대 성폭행 사건, 그리고 세 개의 편지 – 2. 가해자 아버지와 친지들의 편지")

지루한 재판 끝에 지난 3월, 사건에 배당된 배심원 7명 모두는 브록 터너가 피해 여성을 세 번 성폭행한 혐의에 대해 유죄 판결을 내렸다. 최대 14년의 징역형을 받을 수 있는 형량이었고 검사는 6년을 구형한다.

하지만 아론 퍼스키 판사는 일반 시민들의 법 감정이나 검사의 생각과는 다른 판결을 내린다. 그는 이 젊고 '유망한' 수영선수가 교도소가 아닌 가벼운 범죄자들이 가는 구치소에서 6개월 복역 후 3년 보호관찰을 받으란 판결을 내린다. "장기복역이 터너의 수영 경력에 '심각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말과 함께.

"신문에서 내 이름은 '술 취한 여자'"... 반향 일으킨 피해자의 호소

이 판결이 미국 언론에서 심각하게 다뤄지기 시작한 건, 에밀리 도우라는 가명을 쓴 피해자가 법정에서 읽은 편지가 <버즈피드>에 처음 공개된 직후였다. 성폭행 피해자로 1년 6개월을 살며 그녀가 겪은 고통과 분노를 가감 없이 쓴 이 글은 이미 400만 명 이상이 읽었고 성폭력 사건의 교과서로 삼아야 한다고 할 정도로 많은 이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여성주의정보생산자조합 <페미디아>가 직접 번역해 올린 편지 중 일부를 인용한다.

"어느 날, 전 직장에서 핸드폰으로 뉴스를 보고 있었습니다. 어떤 기사를 읽게 되었죠. 저는 그 기사를 통해서 처음으로 내가 의식을 잃은 채 어떻게 발견되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제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긴 목걸이는 목에 감겨져 있었으며, 브래지어는 옷 바깥으로 나와 있었고, 드레스는 어깨위로, 그리고 허리 위로 올려져 있었습니다. 저는 엉덩이부터 부츠까지 벗겨져 있었고, 다리는 벌려져 있었으며, 누군가의 알 수 없는 어떤 물건으로 인해 제 몸이 관통 당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저는, 저에게 일어난 일을 알게 되었습니다, 책상에 앉아 뉴스를 보다가 말입니다. 저는 제게 일어난 일을 세상 모든 다른 사람들과 같은 시간에 알게 된 것입니다. 그때야 비로소, 제 머리카락에 엉켜있던 솔잎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나는 이제 고통과 익숙해. 넌 나를 희생자로 만들었어. 신문에서 나의 이름은 '술에 취해 의식을 잃은 여자'였어. 오랫동안, 나는 그게 내 전부인 줄 알았어. 나는 내 진짜 이름, 나의 정체성을 다시 되찾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어. 내가 그게 전부인 사람이 아니라는 걸 믿기 위해서 말이지.

나는 그저 '술에 취해 쓰레기장 뒤에서 발견된 희생자'이고, 너는 '유망한 수영선수이자 유죄가 확정되기 전까지는 혐의가 없으며 아주 중요한 사람'이라고 믿지 않기 위해 발악했어. 난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받은 인간이고, 난 내가 인간으로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일 년을 기다려야 했어." 

피해자의 편지에 대한 응답은 법정 밖에서 먼저 왔다. 언론을 통해 브록 터너와 아론 퍼스키 판사의 얼굴은 전국에 알려졌고 재심을 요구하는 청원서가 줄을 이었다. 그 중 하나에만 140만 넘는 사람이 서명을 했다. 판사는 강간범의 수영 경력을 걱정했지만 정작 미국 수영연맹은 올림픽 꿈나무였던 브록 터너를 미국 수영협회 회원으로 받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CNN의 여성 앵커는 20여 분의 시간을 할애해 11장에 걸친 에밀리의 편지를 읽으며 판결은 잘못됐다고 웅변했다. 마침 전설의 복서 무하마드 알리의 사망과 소식이 겹쳤던 탓에 브록 터너가 운동 잘하는 백인의 명문대생이 아니었다면, 그가 평범한 유색인종이었다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을 거라며 분노했다. 

브록 터너의 뉴스가 한참이던 지난 6월 12일, 스탠퍼드 대학에선 졸업식이 열렸다. 지역 신문의 1면은 지역 명문대의 졸업식 소식이 실렸지만, 마지막 면은 시민들의 성금으로 만들어진 '전' 스탠퍼드 학생 브록 터너의 재심과 판사의 해임을 요구하는 광고였다.

스탠퍼드는 학교 안에서 술에 취한 여성을 성폭행한 위중한 범죄를 저지른 브록 터너를 학칙에 따라 조치하려 했지만, 그는 먼저 자퇴를 선택했다. 학교는 정의가 실현되는 공정한 재판이 되도록 모든 조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고 밝혔고 학생들은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재심과 판사 해임을 요구하는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용감한 젊은 여성에게" 정치권도 응답

여론은 정치권을 움직였다. 

지난 15일 밤, 워싱턴 DC의 하원 의사당에선 보기 드문 풍경이 펼쳐졌다. 18명의 하원 의원들이 차례로 7200글자에 달하는 성폭행 사건 피해자 에밀리의 편지를 읽어 나간 것이다. 당과 성별과 나이를 떠나 의원들 하나 하나가 에밀리가 된 것이다.

"우리는 부끄럽다고 살인을 감추진 않습니다. 그러나 지난 십수 년 동안 강간에 대해선 그렇게 해왔습니다."

이 자리를 준비한 재키 스피어 의원은 성폭행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함께 나누며 학내 성폭행 사건으로 조사 중인 학교 명단을 교육부에 요구할 수 있는 법안 제정을 지원하는 시도라고 그 취지를 설명했다. 

 12월 6일 한국을 방문한 조 바이든 미국 부통령이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에서 대외 정책 관련 연설을 하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부통령.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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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상원의장인 조 바이든 부통령도 기꺼이 합세했다. 피해자의 편지를 최초로 공개해 반향을 일으켰던 <버즈피드>에 피해자에게 공개 편지를 쓴 것이다. "용감한 젊은 여성에게"로 시작하는 이 편지에서 그는 피해 여성이 겪었을 고통을 위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가해자와 폭력적인 재판 과정, 판결에 대해 같이 분노한다. 피해자를 힐난하는 대신 가해자에게 '자격'을 묻는다. <페미디아>가 직접 번역한 글을 옮긴다.

"나는 피해 사실을 밝히는 당신의 용기에 경외심을 표합니다. 당신에게 행해진 잘못된 일을 정확하게 명명하고, 인간 존엄에 대한 당신의 권리를 열렬히 주장하는 당신의 모습은 내게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동시에 나는 격렬한 분노를 느낍니다. 이 일이 당신에게 일어났다는 사실로 인해 그렇고, 또 우리의 문화가 여전히 너무나 형편없어서 당신이 손수 자신의 가치를 변호해야 하는 자리에 서야 했다는 이유로 그렇습니다. (중략)

당신은 매년 여성 5명 중 1명이 성폭행을 당한다는 우리의 대학 캠퍼스 문화에 좌절했겠지요. 수동성을 부추기고 캠퍼스 내의 젊은 남녀들의 방관을 장려하는 문화에도요. 캠퍼스 내 성폭력의 통계 수치는 지난 20년 동안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이는 몹시 불쾌한 일이자 우리 모두의 발 앞에 보란 듯이 놓여있는 실패입니다.

'동의 없는 섹스는 강간이다.' 이 간명한 진실에 감히 질문을 던지는 이들로 인해 당신은 상처 입었습니다. 이 이상의 말은 필요 없습니다. 이는 범죄입니다. (중략)

이 문제는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요. 우리에겐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는 사회악을 근절할 책임이 있습니다. (중략) 우리는 생존자들에게 충분히 말한 적이 있었기에 나는 당신을 지지하는 이들의 전 세계적인 합창에 동참할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그건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당신이 견뎌온 일들은 결코, 절대, 조금도 여성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법부가 당신의 주장을 인정했지만, 국민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계속해서 소리 높여 말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전문보기)

정당한 싸움을 하고 있는 피해 여성에게 감사인사로 마무리하는 이 편지는 미국사회 성폭행 문제에 대한 기준을 진일보 시킨 파워풀한 메시지라는 평을 받고 있다. 상원의원 시절부터 성폭력 관련 캠페인과 법안을 제출해 만든 조 바이든의 경륜이 그의 편지를 더 호소력 있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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