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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북구 산격동 연암공원 소재 구암서원 강당에서 내려다 본 대구의 풍경
 대구 북구 산격동 연암공원 소재 구암서원 강당에서 내려다 본 대구의 풍경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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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 중구 봉산동 230-1번지는 대구 전역 883.48㎢의 한복판이지만 평지가 아니다. 조선 말기인 순종 때는 들판 가운데에 홀로 우뚝 솟은 이 산에서 정오를 알리는 오포(午砲)를 쏘았다. 그래서 지금도 이곳에는 오포산(午砲山)이라는 이름이 남아 있다.

오포산이 대구의 중앙이라는 사실은 일제의 행위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1897년, 조선을 합병할 야욕을 품고 있던 일제는 오포산 정상에 토지 측량 원점(기준점)을 설치한 뒤 대구 전역의 토지를 조사했다. 또한 일제는 자신들이 거주하고 주둔할 건물을 세우느라 오포산 정상부를 납작하게 밀어버렸다.

1951년 들어 정상부가 평평해진 오포산에 중학교가 들어섰다. 그 결과 토지측량원점은 땅이 아니라 학교 건물 옥상 위에 놓이게 되었다. 그때 신설된 학교의 이름은 제일여자중학교였다. 제일여자중학교는 2004년 남녀 공학으로 개편되면서 제일중학교로 교명이 바뀌었다.

지금의 제일중학교 자리, 조선 때는 구암서원 자리

하지만 조선 시대 대구 사람들은 1665년(현종 6년) 오포산에 학교를 세우면서 이름을 구암서원이라 했다. 당시에는 오포산이라는 이름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 산을 연구산(連龜山)이라 불렀다. '이을 연(連)'과 '거북 구(龜)' 두 글자를 쓴 것은 무엇인가를 이어주는 산이라는 뜻과, 산 안에 거북이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도심 가운데에 있는 산에 거북이 있다? 잔뜩 호기심이 자극되어 제일중학교 본관 앞으로 가본다. 본관 앞 화단에 등이 쩍쩍 갈라진 커다란 거북바위가 놓여 있다. 거북바위는 한자로 구암(龜巖)이다. 그래서 이곳에 건립된 서원에 구암서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국토지리정보원의 <한국지명유래집>은 '연구산은 <경상도지리지>를 비롯해 지리지 관련 고문헌 대부분에서 언급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연구산은 대구부 남쪽 3리에 위치한다, 대구의 진산(鎭山, 대구를 지켜주는 산)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읍을 처음 이룰 당시, 돌 거북이를 만들어 머리는 남으로 꼬리는 북으로 향하게 묻어 두어 지맥(地脈)을 이으려고 한 탓에 연구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대구읍지>를 보면 연구산이 앞산에서 뻗어 내린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즉 연구산에 묻어 둔 돌로 만든 거북이가 북쪽의 팔공산, 남쪽의 앞산을 연결해준다는 의미에서 연구산이라고 칭하였다'라고 설명한다.

지금의 제일중학교 자리는 본래 대구의 중심부에 솟은 연구산의 정상부였다. 대구에 불이 자주 나자 사람들은 이곳에 커다란 바위 형상의 돌을 놓으면 대구의 불기운을 억누를 수 있다고 믿었다. 지금도 그 바위는 제일중학교 본관 앞에 놓여 있다.
 지금의 제일중학교 자리는 본래 대구의 중심부에 솟은 연구산의 정상부였다. 대구에 불이 자주 나자 사람들은 이곳에 커다란 바위 형상의 돌을 놓으면 대구의 불기운을 억누를 수 있다고 믿었다. 지금도 그 바위는 제일중학교 본관 앞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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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찌를 듯한 고층 건물들이 즐비하게 들어섰지만, 오늘날에도 제일중학교 옥상에 오르면 대구 시내 전경을 시원하게 감상할 수 있다. '옥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앞에서 말했듯이, 일제의 침략 야욕에 밀려 연구산 정상부가 납작하게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본래 조선 시대까지의 연구산은 대구 중심부 일원에서 독야청청으로 불쑥 솟구친 산봉우리여서 전망을 즐기기에 아주 제격이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조선 시대의 연구산은 꼭대기가 뾰족했다. 그래서 당대의 문장가 서거정(徐居正)은 따뜻한 아지랑이가 폴폴 솟아오르는 봄철 어느 날 연구산 꼭대기에 올라 '구수춘운(龜峀春雲)'이라는 시를 읊조렸다. 구수춘운은 '거북산 봄 구름'이라는 뜻이다.

龜岑隱隱似鰲岑 거북뫼 아득하여 자라산을 닮았고
雲出無心赤有心 산에서 나오는 구름 무심한 듯 유심하네
大地生靈方有望 대지의 생명들이 살아나기를 모두가 바라노니
可能無意作甘霖 가뭄에 단비를 내려주려 하심이라네

시의 전체적 의미는 가뭄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하늘이 나서서 구원해 달라는 것이다. 단순한 서정시가 아니다. 서거정은 왜 다른 곳 아닌 연구산에 올라 이같은 소망을 노래했을까? 답은 자명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듯이, 옛날 대구 사람들은 연구산을 대구를 지켜주는 진산(鎭山)으로 숭배했다.

연구산 정상부에 길이 170cm, 폭 120cm, 높이 60cm, 무게 2t 가량의 화강암으로 된 거북바위가 놓인 것도 그래서였다. 즉, 연구산 거북바위는 태초부터 그곳에 존재했던 자연산이 아니다. 대구 사람들이 민속신앙 차원에서 의도적으로 가져다 놓은 물건이다.

불기운을 누르려고 연구산 정상에 거북바위 설치

이에 대해서는 15세기에 편찬된 <경상도 지리지> 등에 증언이 실려 있다. 큰 불이 자주 발생하는 데 두려움을 느낀 대구 주민들이 연구산에 거북 모양의 바위를 얹어놓았고, 그 이후로는 대형 화재가 줄어들었다는 내용이다. 옛날 사람들은 십장생(十長生)의 하나로서 깊은 바다에서 사는 거북을 불을 제압하는 상징으로 숭상했다.    

따라서 대구의 진산에 대구를 대표하는 서원이 들어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대구 사람들이 구암서원을 세운 것은 서침(徐沉)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정몽주의 제자인 서침은 여러 벼슬을 역임한 성리학자인데, 그가 특히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은 백성을 사랑하는 깊은 마음씨의 소산이었다.

지금 대구의 달성공원 일대는 고려 중엽 이래 달성서씨 문중 소유지였다. 세종이 서침에게 '(달벌성이 축조된 서기 261년 이래 줄곧 대구 지역의 요새 역할을 해온) 달성 일원의 땅을 나라에서 군사용으로 사용하고자 한다'면서 '그 대신 다른 땅을 주고, 후손들에게 대대로 벼슬을 내리겠노라' 하고 제안했다. 서침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으며, 다만 대구 사람들의 환곡(還穀, 정부로부터 꾼 곡식) 이자를 경감해 주십시오' 하고 흔쾌히 대답했다.

대구 중구 대신동 달성공원 가운데에 있는 '서침나무'의 겨울과 봄 모습. 서침은 본래 서씨문중의 땅이었던 달성을 정부에 헌납했다.
 대구 중구 대신동 달성공원 가운데에 있는 '서침나무'의 겨울과 봄 모습. 서침은 본래 서씨문중의 땅이었던 달성을 정부에 헌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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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재산을 국가에 헌납한 대신 대구 백성들의 세금을 줄여준 서침의 은혜에 사람들이 감동한 것은 당연했다. 1665년, 사람들은 구암서원의 최초 건물인 숭현사(崇賢祠, 대구시 문화재자료 2호)를 세워 서침 선생을 모셨다. 그래서 문화재청 누리집은 '구암서원은 구계(龜溪) 서침의 덕을 기리기 위해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서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후대 사람들이 서침 선생을 숭모하는 일은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971년에는 그가 국가에 헌납했던 달성 성내의 중심부에 '달성 서씨 유허비'가 세워졌다. 그리고 유허비 인근의 300년 넘은 회화나무에는 '서침 나무'라는 별명이 주어졌다. 또 2015년에는 달성종합스포츠파크 인물동산에 선생의 흉상이 제막되기도 했다.

구암서원 강당
 구암서원 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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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암서원은 1718년(숙종 44) 동산동 229번지로 옮겨졌다. 이때부터 서거정(1420∼1488) 선생을 추가로 모셨다. 서성(徐渻, 1558∼1631), 서해(徐嶰, 1537∼1559) 두 분을 모신 것은 각각 1741년과 1757년부터였다. 2008년부터는 임진왜란 당시 대구 의병대장이었던 서사원(徐思遠, 1550∼1615) 선생도 모셨다.

1788년(정조 12), 경례재(동재)와 누학재(서재)가 세워지면서 구암서원은 면모가 두드러지게 갖춰졌다. 그 후 1868년(고종 5) 서원 철폐령 때의 훼철과 1924년 중건 등을 거쳐 1996년 지금 자리에 다시 웅장하게 들어섰다. 문화재청은 '구암서원 숭현사는 대구 시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서원 안에 있을 뿐 아니라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라고 설명한다.

포로 되었다가 탈출, 함경도에서 의병 활동을 한 서성

서거정은 1464년(세조 10) 조선 최초로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역임한 인물이다. 양관대제학은 홍문관 대체학과 예문관 대제학을 겸임한 대제학을 가리키는 관직이다. 홍문관은 궁중의 경서(經書)와 사적(史籍)을 관리하고, 문서의 처리 및 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던 조선 시대 관청이고, 예문관은 임금의 명령을 문장으로 짓는 일을 담당한 관청이다. 서거정이 양관대제학으로 일했다는 것은 그가 시대를 대표하는 대문장가였다는 사실을 잘 말해준다.

서해는 이황의 제자로서 류성룡, 김성일 등과 동문수학하였다. 9세 때 어머니, 14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하게 살았지만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20세가 되었을 때에는 문장과 학문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23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다. 문집으로 <함재집>을 남겼다.

구암서원 사당 숭현사
 구암서원 사당 숭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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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은 서해의 아들이다. 임진왜란 당시 처음에는 선조를 호종했는데 호소사(號召使, 임금의 명을 받아 의병을 모집하는 직책) 황정욱의 요청으로 함경도에서 활동하던 중 광해군의 형과 아우인 임해군, 순화군, 황정욱 등과 함께 반란 수괴 국경인에게 결박당하여 가등청정(加藤淸正, 가토 기요마사)에게 끌려가게 되었으나 혼자 탈출하였다.

선조가 머무는 행재소로 돌아와 국경인 등의 모반과, 왕자들이 왜적들의 포로가 되어 끌려다니고 있는 상황을 보고한 서성은 (함경북도) 길주와 명천에서 의병을 모아 왜적과 싸웠다. 전란 중 명나라 장수 유정을 상대하는 외교관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 그는 암행어사, 형조판서, 병조판서, 호조판서, 황해감사, 함경감사, 평안감사, 경기감사, 도승지, 대사헌 등을 역임했고,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과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는 임금을 호종하여 강화도 등지까지 다녔다. 그러나 광해군 시절에는 11년 동안이나 유배 생활을 했다.

뒤쪽에서 본 숭현사(구암서원 사당)
 뒤쪽에서 본 숭현사(구암서원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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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원은 임진왜란 당시 대구 지역 의병을 총지휘한 의병대장이다. 대구 선비들은 1592년 7월 6일 팔공산 부인사에서 대구 전역을 망라하는 의병 부대를 결성하였는데, 대장으로 지역 유림의 최고 지도자 정사철을 추대했다. 하지만 왜란 발발 이듬해에 병사하는 정사철(1530∼1593)은 당시 이미 63세의 고령인데다 병을 앓고 있었다. 정사철이 몸 상태 때문에 의병대장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고 사양함에 따라 선비들은 서사원을 다시 의병대장으로 뽑았다. (대구 지역의 의병 창의 전말에 대해서는 <임진왜란이 '갑자기' 일어났다는 선조의 변명> 참조)

서사원은 1592년 임진왜란과 1597년 정유재란 사이에 (충북) 청안현감 등을 역임하였지만 그 이후로는 선조가 여러 벼슬을 내려도 모두 사양하고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만 힘썼다. 도승지 이민구는 서사원의 묘갈명(墓碣銘, 묘비의 글)을 써서 그의 은퇴 후 진면목을 감칠맛나게 묘파했다. 이민구의 묘갈명 일부를 읽어본다.

'대구의 낙재(樂齋) 서공(徐公, 서사원)은 숨어서 착한 도를 닦은 선비이다. (중략) 공이 살았던 (달성군) 이천은 금호 하류에 있는데, 산이 서려 있고 물이 고여 있어 어진 이가 숨어 살기에 적당한 곳이다. 푸른 솔이 집을 둘러싸고 집안에는 정결한 대나무와 향기 높은 매화가 가득하였다. 공은 거닐면서 해를 보내고 책과 뱃놀이로 즐거움을 삼았다. (중략) 매월 일정한 날에 학사(學舍, 이강서원의 전신 선사재)에 나아가니 (중략) 근방의 뛰어난 수재들이 다투어 와서 학업을 닦아 문채와 바탕이 함께 갖추어졌다.'

구암서원 현판
 구암서원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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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서사원, #구암서원, #서침, #서거정, #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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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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