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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암서원 전경
 화암서원 전경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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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암서원은 대구광역시 북구 노곡로3길 16-5에 있다. 본래 경상북도 달성군 성서면 장기동, 즉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서구 장기동에 있었지만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 훼철되었다가 1921년 복원되면서 지금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1921년부터 화암서원이 현재와 같은 면모를 두루 갖춘 것은 아니었다. 서원의 핵심 시설인 강당과 사당, 그리고 동재와 서재 등의 부속건물을 한꺼번에 모두 새로 짓는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닌 까닭이다. 결국 처음에는 재실인 경선재(景禪齋)만 일단 건립되었다. 그 후 시간이 흐르면서 건물의 노후가 심해지자 아예 서원을 복원하자는 중의가 모아졌다. 그 결과 1993년 12월에 착공을 하여 1997년 3월에 서원 복원이 완료되었다.

화암서원이 현재 위치에 자리를 잡은 것은 1921년

재실 이름에 선(禪)이 들어 있는 것은 화암서원이 선정(禪亭) 백인관(白仁寬, 1341~1421)을 기려 세워졌기 때문이다. 물론 1921년과 마찬가지로, 1789년(정조 13) 영남 지역 사림들이 장기동에 처음 서원을 세울 때에도 강당 등을 완비한 거대 규모로 추진되지는 못했다. 백인관 선생의 학식과 덕망을 추모하여 건립한 사당 화암사(華巖祠)가 시초였다. 그후 서원에는 6세손 백문련과 13세손 백용채를 더불어 모셨다.

 화암서원 현판
 화암서원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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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서원 경내에는 외삼문인 모송문, 묘우(廟宇, 사당)인 숭의사(崇義祠), 강당인 경선당, 동재 수덕재(修德齋)와 서재 박학재(博學齋) 등이 있다. 외삼문, 사당, 강당, 동재, 서재 등을 모두 아우르는 이름이 화암서원이다. 화암(華巖)은 고려의 서울인 송도(松都)를 그리워하는(華) 마음이 바위(巖)와 같이 변함이 없다는, 일편단심이라는 뜻이다. 외삼문의 이름 모송문(慕松門)도 마찬가지이다. 

고려의 서울(松)을 그리워하는(慕) 사람은 누구인가? 그는 이성계의 조선을 거부하고 여전히 고려 왕조에 충성을 맹세하는 신하, 많이 쓰는 말로 고려 유신(遺臣)이다. 고려가 남긴(遺) 진정한 신(臣)하라는 의미이다, 즉 화암서원과 모송문의 이름은 백인관의 학문적 벗들이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등이라는 사실을 짐작하게 해준다.

백인관은 1368년(공민왕 17) 과거에 합격하여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는데 나중에는 대제학에 이르렀다. 대제학이라면 대략 현대의 서울대학교 총장 정도에 해당된다. 하지만 그는 나라가 어수선해지고 벼슬아치들이 권력을 쫓아 해바라기처럼 오락가락하는 것을 보고는 스스로 조정을 떠나 수원으로 낙향하였다. 그는 수원 백씨였다.

길재와 함께 금오산에서 고려의 멸망을 한탄하다

 화암서원 동재
 화암서원 동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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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부모를 모시고 수원의 외진 산골에 묻혀 살았다. 직접 밭을 갈고 곡식을 심었으며 추수를 하여 부모님을 봉양했다. 고려를 무너뜨린 이방원이 왕위에 오른 후 백인관을 세 차례나 불렀다. 태종은 백인관을 새 나라의 신하로 끌어들이는 것이 정권의 안정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지만, 실제로 그의 능력과 덕망을 존경하기도 했다. 하지만 백인관은 태종의 심부름꾼이 자꾸 찾아오자 아예 경상도 금오산으로 거처를 옮겨버렸다.

금오산은 길재가 숨어 산 도선굴이 있는 곳이다. 백인관은 금오산에서 길재와 더불어 고려가 남긴 마지막 충신의 한을 나누며 은거했다. 하지만 자신보다 12세 연하인 길재가 67세의 나이로 1419년에 타계해버렸다. 당시 백인관은 이미 79세의 고령이었고, 임금도 세종으로 바뀌어 있었지만, 그래도 그는 다시 금오산을 떠나 대구의 노곡동까지 이주하였다.

 화암서원 서재
 화암서원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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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노곡동에 생애의 마지막 정자 선정(禪亭)을 지어 수양과 학문에 힘쓰는 한편,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했다. 이는 '천하에 도가 있으면 세상에 나아가 벼슬을 하고, 도가 없으면 은거한다(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라는 공자의 가르침을 오롯이 삶의 좌표로 삼은 행동이었다. 정자의 이름을 선정이라 한 것 또한 정치 권력으로 어수선한 세상의 혼탁한 풍파 속으로는 생애를 마치는 그날까지 결코 들어가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뿐만 아니라 노곡은 어지러운 세파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무인지경이었다. 부산과 대구 사람들이 옷을 벗지 않고 금호강을 건널 수 있게 된 것은 서유교가 자기 재산을 털어 처음으로 다리를 놓은 때부터였다. 서유교는 1849년(헌종 15)부터 1851년(철종 2)까지 2년 동안 대구판관으로 근무했다. 백인관의 노정은 서유교의 다리보다 430년 전에 지어졌다. 백인관이 정자를 세울 무렵의 노곡은 속세의 권력에 물든 무리들이 쉽게 찾을 수 없는 곳이었다. 공자의 고향 노(魯)나라를 흠모하는 선비들이 사는 마을이라 하여 노곡(魯谷)이라는 이름을 얻은 곳에서 백인관은 흔들림없는 선비 정신을 실천하였던 것이다.

백인관이 은거한 노곡에 후손들이 서원을 옮겨짓다

노곡에 정착한 때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421년(세종 3) 백인관도 세상을 떠났다. 향년 81세,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들어선 지 어언 20년이 되는 해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백인관은 이제 고려의 시대가 끝나고 조선의 세상으로 완전히 바뀌었다고 생각했을까? 다시 그로부터 368년이나 지난 1789년에 이르러 백용채를 비롯한 후손들이 사당을 세우면서 편액을 화암사라 정한 것을 보면 백인관의 의지는 영세불망(永世不忘) 이어졌던 듯하다. 화암서원 낙성문은 백인관의 절의가 온전히 후손들에게 계승되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特地營移告闕成 좋은 땅에 옮겨지어 낙성을 이루고 나니
山增佳氣水增聲 산은 더욱 아름답고 물소리도 더욱 좋네
風來園竹塵紛絶 대밭에 바람 부니 세상 시끄러움 들리지 않고
月霽窓梧道意生 창가 오동에 환한 달 뜨니 도의가 살아나누나

노곡은 공자의 노나라 고향땅과 지형이 닮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마을에는 백인관만이 아니라 김문기를 모시는 태충각(泰忠閣)도 있다. 태충각은 큰(泰) 충(忠)신을 기리는 집(閣)이라는 뜻이다.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 1399~1456) 선생은 사육신 중 한 분이니 큰 충신이라 일컬어도 전혀 어색함이 없을 것이다.

 태충각 전경
 태충각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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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노량진의 사육신 묘역에는 7기의 묘소가 마련되어 있다. 이름은 사육신이지만 실제로는 일곱 분의 충신을 모시는 것이다. 이는 국사편찬위원회가 기존의 사육신묘에 김문기의 가묘(假墓)를 추가하는 결정을 내린 결과이다.

사실 사'육'신은 고유명사화되었을 뿐이다. 어린 조카를 죽이고 임금자리를 빼앗는 수양대군의 비인륜적 처사에 반발하다가 죽임을 당한 충신이 어찌 여섯 명 뿐일까! 결국 국사편찬위원회는 이미 굳어버린 사육신이란 명칭은 그대로 두되 김문기의 행적을 사육신과 동일하게 인정하여 사육신 묘역에 함께 모시는 조치를 취했다.

 태충각
 태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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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충각에 왔으니 당연히 사육신 사건이 발생한 때를 잠깐 돌이켜본다. 1456년(단종 4) 6월, 단종 복위를 노리며 기회를 엿보던 여러 선비들과 장군들은 명나라 사신의 환송연을 맞아 세조 일파를 처단하기로 작전을 세운다. 칼은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과 유응부이 잡기로 했다. 하지만 일이 사전에 누설되었고, 거사 동지였던 김질 등이 세조에게 밀고함으로써 모두들 체포된다.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이개는 고문 끝에 죽고, 하위지는 참살당한다. 유성원은 집에서 아내와 함께 자살하고, 김문기도 사지가 찢기는 형벌을 받아 죽는다.

태충각은 노곡마을을 가운데에 두고 화암서원과 서로 맞은편인 산기슭에 있다. 태충각에서 보면 화암서원의 서재가 보이고, 화암서원 강당 뒤에서 쳐다보면 태충각의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충의와 절의의 선비 정신이 가득한 노곡마을 앞으로는 금호강이 흐르고, 뒤로는 대구광역시 기념물 6호인 노곡산성이 적의 침입을 막겠다는 일념을 뽐내며 오늘도 높게 솟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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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 <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장편소설 <딸아, 울지 마라><백령도><기적의 배 12척> 등을 썼다. <집> 등 개인 사진전도 10회 이상 열었다.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다. 전교조 활동으로 5년간 해직교사 생활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