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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 안으로 보이는 한천서원
 대문 안으로 보이는 한천서원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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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천서원(寒泉書院)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행정리 870번지에 있다. 번지로 나타내던 주소가 도로명으로 바뀌었는데도 한천서원 앞 안내판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가창동로 117' 대신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행정리 870번지'를 그대로 쓰고 있다. 나는 옛것이 그대로 남아 있는 이 안내판에서 한천서원의 오래된 역사를 예감한다.

한천서원은 전이갑, 전의갑 형제를 기려 1838년(현종 4)에 세워졌다. 전이갑, 전의갑 두 장수는 927년 동수대전 때 신숭겸, 김락과 더불어 왕건을 구해내면서 장렬히 전사한 고려 개국 공신들이다. 즉, 한천서원은 아주 오래된 실화가 깃들어 있는 서원이다. 대구에 남아 있는 서원들이 한결같이 조선 시대 선비들을 제사지내는 것과 견주면 한천서원은 기림을 받는 이의 신분과 시대가 아주 독특한 것이다.

사당 충렬사
 사당 충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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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을 기리는 서원으로 나라 안에서 가장 대표적인 곳은 경주의 서악서원이다. 무열왕릉 바로 옆에 있는 서악서원은 삼국 통일의 주역인 김유신을 제향하고 있다. 그러나 설총, 최치원도 함께 모시고 있으므로 단순히 김유신만 섬기는 서원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김유신, 설총, 최치원이 삼국 시대 인물이므로 서악서원 또한 한천서원과 더불어 옛이야기를 해주는 유적지라 할 만하다.

당연히 한천서원의 안내판은 고려 건국과 동수대전에 대한 해설을 담고 있다. 안내판은 찾아온 답사자에게 '이 서원은 고려 개국 공신 태사 충렬공 전이갑과 충강공 전의갑 형제를 배향하는 곳이다, 양 공은 서기 918년에 장절공 신숭겸 장군 등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를 개국하였다'라고 강조한다.

이어 안내판은 '서기 927년(태조 10) 후백제 견훤의 침공을 받은 신라를 돕기 위해 왕건과 함께 출전하여 견훤군과 팔공산 동수에서 대혼전 중에 왕건 태조가 위급하게 되자 신숭겸, 김락 장군 등과 의논하여 미복(微服)으로 탈출케 하고 장렬히 전사하여 영명(英名)을 천백세(千百世)에 남기었다, 뒷날 태조가 몹시 슬퍼하여 전이갑은 통합 삼한 개국공신 태사 충렬공으로 추증하고 전의갑은 시중 개국공신 충강공으로 봉하였다'라고 말한다.

한천서원 전경
 한천서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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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지금의 한천서원 강당과 사당이 고려 때 지어진 고건물인 것은 아니다. 처음 지어진 1838년 당시 건축물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답사할 가치가 현격히 떨어진다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서원의 대부분이 훼철의 운명을 피해가지 못한 것처럼 한천서원도 1864년(고종 8) 서원철폐령에 휩쓸려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 가문의 후손들은 제사를 지내는 단을 설치하고 재실을 지어 전이갑, 전의갑 양 공의 높은 충의를 기려왔다. 한천서원이 재실 수준을 뛰어넘어 다시 서원의 위상을 되찾은 때는 1989년이다.

한천서원은 경내 배치가 상당히 특이하다. 보통의 서원은 학생들이 공부도 하고 숙식도 하는 동재와 서재가 강당 앞에 있고, 사당이 강당 뒤편에 있다. 그에 비해 한천서원은 동재가 없다. 동재가 없는 까닭은 그 자리에 사당이 지어져 있기 때문이다. 즉, 한천서원은 경직된 사고에서 벗어나 서원의 여러 건물을 지혜롭게 배치한 선조들의 유연한 자세를 보여준다. 그러나 타계한 분을 모시는 사당과 살아있는 후손들 간에는 엄연한 경계가 있으므로 강당과 사당 사이에는 담장이 설치되어 있다.

고인돌을 거느리고 있는 강당
 고인돌을 거느리고 있는 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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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 경내로 들어가는 길은 두 갈래이다. 서원 영역 안으로 들어서는 대문을 통과하면 뜰이 나오고, 그 뜰을 오른쪽으로 지나면 다시 사당으로 들어가는 내삼문이 나온다. 그렇게 내삼문을 거쳐 사당 경내로 들어갈 수도 있고, 또는 강당 앞을 지나 사당 뜰로 들어가는 협문을 이용할 수도 있다. 사당의 이름은 충절사(忠節祠)이다. 충절은 전이갑, 전의갑 두 분의 장렬한 죽음을 상징하는 어휘이다.

한천서원의 특이점은 강당 앞에서도 발견된다. '강당'이 아니라 '강당 앞'이다. 강당은 여느 서원에서 보는 건물이나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 커다란 와가이지만, 강당 앞은 어느 서원에서도 볼 수 없는 특이한 볼거리를 제공해준다. 고인돌이다. 강당 바로앞 뜰에 거대한 고인돌이 놓여 있다. 길이 265cm, 폭 260cm, 높이 45cm에 이르는 아주 큰 고인돌이다. 청동기 시대의 묘지 유적인 고인돌이 고려 초기의 충신들을 기리는 서원 강당 앞에서 위용을 뽐내고 있다. 본래는 받침돌도 뚜렷했었는데 근래 마당을 고르는 과정에서 약간 묻히는 바람에 몸돌과 땅이 약간 가까워졌다고 한다.

강당 앞의 고인돌
 강당 앞의 고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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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고인돌이 있는 것은 서원 이름과도 연관이 있다. 서원 이름 한천(寒泉)은 곧 냉천(冷泉)이다. 가창면 일대가 좌우로 깊은 산이 버티고 있는 협곡 속 들판이므로 신천 상류의 개울물은 응당 예로부터 차고 맑았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한천서원 인근의 냉천리 중심부에는 대구 시민들이 차를 몰고 와서 물을 담아가는 대규모 생수터가 있다.

그런데 이를 청동기 시대 사람들도 알았던 모양이다. 그들은 가창면 들판에서 농사를 지었고, 신천 상류의 물을 마시면서 살았다. 그 증거가 바로 고인돌이다. 강이 넘쳐도 물에 잠기지는 않는 지점, 청동기 사람들은 그런 곳에 묘소를 설치했다. 1945년 이래 대부분 없어져 버렸지만 본래는 고창, 화순, 강화 등지보다도 더 많은 3천 기 이상의 고인돌이 있어 '고인돌의 도시'로 세계에 이름을 떨쳤던 곳이 대구이다. 한천서원의 이 고인돌은 전이갑 장군의 후손들이 서원 경내의 고인돌도 고이 간직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음을 말해주는 증거물이다.

한천서원의 강당(왼쪽)과 사당이 함께 보이는 풍경
 한천서원의 강당(왼쪽)과 사당이 함께 보이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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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만큼은 아니지만, 한천서원 경내에는 여느 서원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또 다른 볼거리가 한 가지 더 있다. '대한민국 12대 대통령 전두환 2003년 10월 19일' 글자가 뚜렷하게 새겨진 기념식수 표지석이 바로 그것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사당 내삼문 앞에 심은 나무 한 그루는 오늘도 잘 자라고 있다. 그 옆에는 '2001년 3월 10일 경북경찰청장 치안감 전용찬'과 '2015년 4월 17일 제16대 전씨 대구지구 종친회 회장 전임효' 표지석이 세워져 있는 기념 식수들도 있다.

전두환 대통령 기념 식수
 전두환 대통령 기념 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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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전두환, #한천서원, #전이갑, #전의갑, #왕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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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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