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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서울시장이 12일 오후 서울시청 대회의실에서 열린 구의역사고 해결을 위한 토론회에서 시민의 발언을 듣고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12일 오후 서울시청 대회의실에서 열린 구의역사고 해결을 위한 토론회에서 시민의 발언을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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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우리에게 우연히 살아남았다는 상황을 인지하게 해준 사건이었다.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 불안의 총체를 다시 확인한 것이다."

12일 오후 열린 '구의역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토론회'에서 자신을 '서울 시민'으로 소개한 한 참석자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지난달 28일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 스크린도어(안전문)를 수리하다 1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청년 노동자 김아무개씨. 그의 죽음이 드러낸 한국 사회 속 비정규직 노동 실태의 민낯과 불합리한 노동 구조는 많은 시민들의 분노와 공감을 샀다.

서울시는 이 같은 시민들의 비판과 의견을 현장에서 직접 듣고 해결책을 함께 고민하는 시민대토론회를 서울시청 대회의실에서 개최했다. 전문가와 실무자를 동원한 진상 규명  이전에, 시민의 충고를 수렴해 현실적인 대책을 마련하겠다는 취지다.

이날 토론회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참석한 가운데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의 사회로 진행됐다. 주말임에도 100여 명의 남녀노소 시민들이 토론 자리를 가득 메웠다.

비정규직, 청년 문제... 한국 사회의 민낯 드러나

토론의 주제는 김씨의 사망 원인을 둘러싼 여러 사회적 문제로 가지치기됐다. 그 원인은 곧 김씨의 사회적 위치와 맞닿아 있었다. 청년, 노동자, 공동체로부터 외면받아 온 삶. 각계 각층의 전문가 패널과 시민 참가자들도 그의 죽음 속에 숨은 한국 사회 구조의 모순을 짚어냈다.

먼저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은 '외주화의 위험'을 지적했다. 김 위원은 "생명 안전을 담보하는 업무를 외주, 하청 등 비정규직 업무로 맡긴 게 가장 큰 문제"라면서 "낮은 단가로 업무를 진행하는 외주 업체들이 (노동자들에게) 기술 훈련을 시킬 수도 없는 구조로까지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외주 계약 시 포함되는 '페널티(벌점)' 조항도 지적했다. 그는 "(업무가) 10분 지연되면 재계약 시 용역비를 삭감한다든지, 계약 과정에서의 불안정성이 직원들에게도 전가 되는 내적 원인이 있다"고 말했다.

실제 현장에 있던 서울메트로 노동자도 "(이번 사고는) 서울시 공무원들의 빨리빨리 지시 문화 때문"이라고 성토했다. 그는 "열차에 장애가 났을 때 10분안에 바로 조치하지 못하면 징계를 받는다"면서 "열차가 운행 중인데도 우리는 모든 걸 조치하려고 달려간다"고 호소했다.

안전 노동을 보장받지 못하는 비정규직의 노동 환경도 심도있게 논의됐다. 김진억 희망연대노조 국장은 "구의역 사고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것으로, 이미 수많은 비정규직 외주업체 노동자들이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없이 위험한 작업에 내몰려있다"고 강조했다. 물리적, 사회적 안전망에서 벗어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에 안전은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조성애 공공운수노조 조합원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현실을 전했다. 그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현장 이야기를 듣겠다고 창동·고덕 (지하철) 기지에 오기 전,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청소하고 페인트질을 했다고 한다"면서 "왜 책임은 항상 아래 사람들이 다 받아야 하나"라고 토로했다. 은수미 전 국회의원도 "하청 사회를 뿌리 뽑아야 한다"며 시민이 직접 "내 주변의 하청 정보를 모으고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으로 서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김씨는 박원순 시장이 반드시 구해야 했던 사람"


안수찬 <한겨레21> 편집국장은 가난을 세습 받은 김씨가 누구보다 자신의 삶을 일구기 위해 애썼던 '청년'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스스로 불완전한 노동자로 살 수밖에 없었던 청년으로, 주변의 모두가 자포자기에 빠져들 때 김씨가 삶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면서 "(김씨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꿈꾼 사회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구해야 했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고 비판했다.

구의역 추모행동을 주도했던 김종민 청년전태일 대표도 "대한민국 청년 모두가 겪고 있는 부분들을 공공기관이 앞장서서 방치했다"면서 "할 수 있는 것부터 서울시가 가장 먼저 나서 달라"고 요구했다.

박원순 시장 취임 이후 정규직으로 전환된 '무기계약직'의 한계와 설움을 토로하는 노동자의 목소리도 나왔다.

비정규직이었다 정규직으로 전환된 한 서울메트로 '지하철 보안관'은 "정규직에는 1급부터 9급까지의 일반 정규직과, 나같은 무기계약직이 있다"며 "무기계약직은 직급 승진이 없는데다 10년을 다녀야 겨우 9급 1호봉과 같은 월급을 받을 수 있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은성PSD 직원들도 정규직화 한다지만 우리와 같은 무기계약직으로 될 텐데, 절대 승진을 할 수 없는 정규직이 과연 진짜 정규직이라고 할 수 있냐"고 반문했다.

구의역사고 해결을 위한 시민 토론회가 12일 오후 서울시청 3층 대회의실에서 열리고 있다.
 구의역사고 해결을 위한 시민 토론회가 12일 오후 서울시청 3층 대회의실에서 열리고 있다.
ⓒ 서울시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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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메트로 "전동차 늦더라도 책임 추궁 않겠다 약속"

'누가 책임 질것인가'에 관한 논의도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임상혁 연구소장은 "서울메트로에 징벌적 손해배상 등 강력한 규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서 "시장이 현장 사람들을 해고하거나 직위해제하는 것은 전형적인 꼬리 자르기로,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발주처의 책임을 강화하고 시스템의 문제를 밝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핵심 책임 주체로 꼽히는 서울메트로 측도 마이크를 잡았다. 정수영 서울메트로 사장 대행은 "전동차가 정시 운행보다 늦더라도 책임을 추궁하지 않겠다고 직원들에게 약속했다"면서 "이번 일을 계기로 다시는 이 같은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기본 틀을 바꾸겠다"고 전했다.

구의역 진상규명위원회에서 활동을 시작한 박두용 한성대 교수는 "어떤 시스템을 갖출 것인가보다 책임을 찾는 데 집중하고 있는 것 같다"면서 "만약 책임을 묻는다면 하위직이 아닌 상위직이 책임지도록 하는 긴급 제안을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김민수 청년유니온 위원장도 "노동자가 작업 규칙을 어겼기 때문에 사고가 났다고 3시간 만에 정리해서 발표하는 그 유능함으로, (청년의) 그 삶을 주목하고 돌봤다면 어땠을까"라고 반문하면서 "하지만 이 문제가 특정 누군가의 책임을 단죄하는 방식으로 이어진다면, 절대 민주적인 방식이 아닌 채로 종결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을 안전사회시민연대 대표라고 소개한 한 시민은 "박 시장의 초기 대응에 실망했고 그런 일(메피아)이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는 말이 성립하지 않는다"며 "박 시장은 사퇴하라"고까지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이번 사고가 개인의 책임보다는 뿌리깊은 사회적 문제에서 비롯된 만큼 임직원들의 사퇴로 결론이 나서는 안된다고 반론을 폈다.

한 대학생 참가자는 "사퇴는 해결이 아니라 회피"라며 "가지고 있는 권한만큼 책임감을 통감하고 재발 방지를 위해 노력해달라"고 말했다. 한 백발의 시민도 "이번 사고는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를 중시하는 사회 때문에 생긴 것"이라며 "박 시장은 절대로 그들의 사표를 받지 말라"고 주문했다.

김군의 문제가 우리 사회 전반에 걸친 악습에서 비롯된 만큼, 시민들이 직접 나서 문제를 개선하자는 목소리도 있었다. 이영희 가톨릭대 사회학과 교수는 "내부자가 아무리 선의를 가지고 공익적 가치를 내세운다고 해도, 경우에 따라선 이익 논리에 빠지기 쉽다"면서 "외부 통제, 즉 시민들의 좀 더 적극적인 참여를 통한 안전 강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종진 연구위원은 김군이 사망한 5월 28일을 기려 528명의 시민감독관을 만들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김 위원은 "528명의 시민안전감독관제를 도입해 서울 도심의 위험성을 시민이 직접 모니터링할 것을 제안 한다"면서 "이후에 서울시가 이를 어떻게 반영했는지 살피고 이를 정책과 조례로 지정해 서울시가 안전 사회로 가는 과정으로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사람 목숨 담보한 우리의 편리, 정말 필요한지 돌아볼 때"

오후 2시부터 시작된 토론회는 장장 3시간 30분간 진행됐다. 발언 기회를 얻기 위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 참가자도 부지기수였다. 열띤 시민들의 발언은 "두 번 다시 이 같은 사고를 재발시키지 말라"는 공통의 목소리로 모아졌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시민들의 의견을 청취한 뒤 "귀하게 받아들이고 향후 서울시의 모든 정책에 반영하겠다"고 밝혔다. 박 시장은 "서울메트로뿐 아니라 도시철도공사, 시설관리공단 등 서울시 산하의 안전 업무도 돌아보겠다"면서 "결국 결단의 문제로 시민들의 이해와 공감이 필요하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안전만은 양보할 수 없다는 결의를 저부터 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날 토론회에서 가장 큰 공감을 얻은 제안은 "우리의 일상에서부터 위험을 제거하자"는 의견이었다. 박두용 교수는 "조금 느리게 살자는 것"이라면서 "브레이크를 걸고 큰 방향을 바꾸는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백발의 한 시민도 "배차시간이 정확히 지켜지는 것보다는 안전한 운행을 더 원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토론 마무리 즈음, 한 20대 청년이 손을 들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편리가 무엇이냐"고.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누군가의 죽음을 전제하고서라도 정확한 배차 시간이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지 물어야 한다.  일상을 어떻게 바꿔 나갈 것인가가 중요한 거다. 지하철, 비정규직-정규직 등의 문제로 끝낼 게 아니라, 우리한테 진짜 필요한 편리가 뭔지 스스로 되물어 봤으면 좋겠다."


태그:#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 #비정규직, #청년, #박원순,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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