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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술을 마시기도 하고 정오 무렵 비둘기떼가 역으로/교회로 가방을 챙겨 떠나고 나면/나는 오후 내내/순환선 열차에 앉아 고개를 꾸벅이며 제자리걸음을 했다/가고 싶은 곳들이 많았다 산으로도 가고 강으로도/가고 아버지 산소 앞에서 한나절을 보내기도 했다/저녁이면 친구들을 만나 여느 날의 퇴근길처럼/포장마차에 들러 하루분의 끼니를 해결하고/아무렇지도 않게 과일 한 봉지를 사들고/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아름다웠다 아내와/아이들의 성적 문제로 조금 실랑이질을 하다가/잠자리에 들어서는 다음날 해야 할 일들로/가슴이 벅차 오히려 잠을 설쳐야 했다

이력서를 쓰기에도 이력이 난 나이/출근길마다 나는 호출기에 메시지를 담는다

'지금 나의 삶은 부재중이오니 희망을 알려주시면 어디로든 곧장 달려가겠습니다'- 여림 '실업' 전문.

아마도 시 또는 시집을 어지간히 읽었다는 사람들에게도 낯선 이름일 가능성이 많은 '여림'이라는 시인의 '실업'이란 시다. 여림은 이 시로 신촌 문예에 당선(한국일보, 1999년), 시인으로 등단했다.

IMF의 여파로 다들 쓰리던 때였다. 그 무렵, 일자리를 잃거나 빚에 허덕이며 자살했다거나, 생계가 막막해 아이들을 보육원에 맡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등과 같은 어두운 뉴스들이 종종 보도되곤 했다.

 <비 고인 하늘을 밟고 가는 일> 책표지.
 <비 고인 하늘을 밟고 가는 일> 책표지.
ⓒ 최측의 농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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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 당선 소감에 실업이나 파산 등으로 어렵고 힘든 사람들이 하루빨리 고통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고 쓸 정도로 여림은 가진 것 없고 고통 받는 삶에 대한 시를 주로 썼다. 자신 또한 그처럼 불우한 처지였던 1967년생 여림. 그는 2002년 11월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견디고자, 좀 더 괜찮게 견디고자 놓지 못한 술로 인한 간경화 때문이었다.

전화는 언제나 불통이었다. 사람들은/늘 나를 배경으로 지나가고 어두워진/하늘에는 대형 네온이 달처럼/황망했었다. 비상구마다 환하게 잠궈진/고립이 눈이 부셨고 나의 탈출은 그때마다 목발을 짚고 서 있었다./살아있는 날들이 징그러웠다. 어디서나/계단의 끝은 벼랑이었고 목발을 쥔 나의 손은 수전증을 앓았다.- '계단의 끝은 벼랑이었다' 전문.
 
시집 한 권 내고도 남을 110편의 시들을 쓴 후였다. 하지만 단 한 권의 시집도 내지 못한 상태였다. 뒤늦게 시인의 죽음을 알게 된 친구들이 찾아가 시신을 수습해 뿌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쓰던 컴퓨터에 수록된 시들을 수습해 다듬어 책으로 낸다. 타계 1주기에. 여림 시인의 유고 시집 <안개 속으로 새들이 걸어간다>(2003년, 작가 펴냄)는 이렇게 나왔다.

하지만 이 유고 시집은 크게 빛을 보지 못하고 묻히고 만다. 그리하여 여림이란 이름과 그가 쓴 시들은 어쩌다가 그의 시를 만나 가슴에 품게 된 누군가가 자신이 좋아하는 다른 누군가에게 들려주거나 하는 등으로, 그래서 몇몇 사람들에게 겨우 기억되는 정도로 존재할 뿐이었다. 내가 시인 여림을 알게 된 건 우연이었다. 어느날 출판사 최측의 농담 관계자가 나를 찾아와 여림과 시 그리고 이번 시집에 대해 1시간 반을 이야기 한 것. 하면서다. 그는 간절했다.

"제게 책의 가치를 알게 해준 친구가 소개해줘 여림의 시를 알게 됐는데 와 닿는 게 너무나 많은 겁니다. 그런데 몇 년을 찾아도 시집을 구할 수가 있어야죠. 초판이 잊혀지다시피 겨우 팔리다가 절판된 후에야 유명해진 경우라, 우리나라 대부분의 시집들이 그런 것처럼 어떤 도서관에서도 찾을 수 없는 그런 기이한 시집이었어요. 뭐랄까. 시인을 따라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발화해버린 것만 같은 그런 아득함? 그런데 어느 날 한 고등학생이 책을 판다고 내놨는데, 그렇게 찾아 헤매던 제목이 보이는 겁니다. 한 마디로 충격이었죠. 그 순간부터 5년 동안 가방에 넣고 다니며 매일 읽었습니다. 그 친구랑 "여림의 시들은 우리만 알고 말까?" 얼마나 좋았으면 이런 어리석은 욕심까지 내봤겠어요. '살아야 한다는 근사한 이유', 특히 많이 읽은 시입니다."
 
여림 유고 전집 <비 고인 하늘을 밟고 가는 일>(최측의농간 펴냄)은 이런 인연으로 시작되어 나왔다. 쉽지 않은 출판이었다. 애초의 유고시집 그대로 내는 것보다 어딘가 흩어져 있을지도 모를 시인의 흔적들을 최대한 만나 수록하는 것에 가치를 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다. 적지 않은 시를 쓴 그였으나 살아있을 때 어느 지면에 단 한 편의 시도 발표한 적이 없었다. 신춘문예 당선 후 어떤 문학지가 잠깐 언급하기도 했으나 더 이상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유고시집이 발간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여림은 그를 알고 있던 사람들의 기억에만 딱 그만큼으로 존재하던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안개 속으로 걸어간' 시인 여림을 우리는 이제 '비 고인 하늘을 밟고 간' 시인으로 기억하고자 한다. 미완성 상태의 짧은 단락으로 남아 있는 유작 '비 고인 하늘을 밟고 가는 일'을 시인 자신의 운명과 그를 추적하는 우리들 삶의 한 컷에 대한 중층 은유로서 전집의 제목으로 수습하였다. 여림은 응답 없음의 시인이 아니었음을, 그의 전집이 말해 줄 것이다. '살아가는 일로서만/모든 것들이 이루어지질 않는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는 근사한 이유'를 고민했던 여림이 '비 고인 하늘을 밟고 가는 일'이라 썼을 때, 그는 이미 우리에게 응답하였다. 여림을 만나는 것은 비 고인 하늘을 밟고 가는 일이다. 그 하늘 길에 고여 있는 빗물이 우리가 걷고 있음을 알게 할 것이다. - '출판사 발간사'에서.

뚜렷한 것은 고인의 시집 한 권뿐인, 모든 것이 희미한 시인의 흔적들을 수습하고자 가족들을 수소문해 찾아 나섰다. 친했기 때문에 누구보다 많은 기억들을 뚜렷하게 가지고 있는 친구들과 지인들도 찾아 나섰다. 비록 짧은 삶이었으나 뚜렷하고 강렬한 흔적을 남긴 시인에 대한 '단 한 줄에 해당하는 이야기'만이라도 더 알고 싶어서였다.

그렇게 꼬박 계절이 3번 바뀌는 동안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들을 만나게 된다. 이제까지 발표된 적 없는 가족들이 간직하고 있던 60편의 시들과 수필, 편지, 자필 원고 등 10편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이번 유고 전집에 그 중 많은 분량(절반 정도)을 실었다.

이번에 나온 유고 전집은 2부로 되어 있다. 1부에는 2003년에 출판된 유고집에 실렸던 시와, 당시 미처 싣지 못한 시 일부를 선별한 52편. 그리고 2부에는 유족이 건네준 60편의 시에서 선별한 시 44편과 시작 메모, 편지, 수필, 자필 원고 등 그 밖의 글들을 실었다. 하마터면 영영 잊히고 말 법 한 시인이, 그가 쓴 시가 한 작은 출판사의 노력 덕분에 빛을 본 것이다.

지난날 우연한 기회에 여림의 시를 접한 '어떤 사람들'이 이미 절판이 되어버린 시집을 찾아 수많은 순간들을 목말라했던 했던 가장 절실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 여림이 쓴 시 한 편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종일,/살아야 한다는 근사한 이유를 생각해 봤습니다./근데 손뼉을 칠만한 이유는 좀체 /떠오르지 않았어요./소포를 부치고, /빈 마음 한 줄 같이 동봉하고/돌아서 뜻모르게 뚝,/떨구어지던 누운물.(…) 내게선 늘, 저만치 물러서 저 혼자 살아가는 세상이여,/ 풀빛 푸른 노래 한 줄 목청에 묻고/나는 그대 생각 하나로 눈물겨웁습니다. - '살아야 한다는 근사한 이유' 부분.

덧붙이는 글 | <비 고인 하늘을 밟고 가는 일>(여림) ㅣ최측의 농간 ㅣ 2016-05-25 ㅣ112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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