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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호게이트'가 세간의 화제다. 해외원정 도박사건에서 비롯한 폭행사건이 전관비리, 횡령, 탈세, 군납비리, 면세점 비리로 일파만파 번지고 있다. 한마디로 종합비리세트다. 마당발 정운호의 마당극은 여기서 그칠 것 같지 않다. 정운호의 장풍이 정치권으로 향하고, 백악산 아래 최고 권부로 날아갈 기세다.

구치소에 수감된 정운호가 면회 간 최유정 변호사의 손목을 비틀었고, 최 변호사가 정운호를 폭행 혐의로 고소하여 묻힐 뻔한 사건이 양지에 나왔다. 최 변호사가 고소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우리는 서초동에서 공연되고 있는 법(法)조 막장 드라마를 구경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물(水)은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去) 규칙이 있지만 음지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재물은 근본적으로 무도덕하다. 욕망은 본질적으로 영원히 충족될 수 없다. 물신이 강림하면 잘 나가던 사람들도 한방에 보낸다. 그것이 물신의 괴력이다. 천민물신주의가 무한 질주하면서 빚어낸 이 시대의의 풍속화다.

최유정 변호사가 받은 수임료 100억은 서초동 법률가들의 입에서도 '억' 소리 나는 큰돈이며 소시민들에게 '헉' 소리 나는 천문학적인 금액이다. 홍만표 변호사의 오피스텔 110여 채 소유 설은 서민들의 입에서 '헐' 소리 나오게 하며 고시원을 전전하는 청춘들을 절망케 한다.

남대문 시장에서 잔뼈가 굵은 정운호는 자연주의 화장품을 출시하면서 돈방석에 앉았다. 100억 원대 해외 원정 도박혐의로 입건된 그는 과거 300억 원대 도박 혐의로 수사를 받았지만 두 번 모두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전방위 로비 때문이 아니었냐는 의혹도 제기된다.

전(錢)의 위력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돈이면 다 된다고 생각하는 졸부와 법을 요리할 줄 아는 전관들이 벌이는 블랙 코미디다.

세종도 어쩌지 못한 조선 법조 비리

광장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
▲ 광화문 광장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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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근본적으로 반상 계급사회다. 양반과 상놈 사이의 착취구조가 공고했던 조선시대에도 이와 유사한 사건이 있었다. 세종 8년 3월 4일. 사헌부에서 보고가 올라왔다.

"송사에서 제 힘으로는 이길 수가 없다고 생각한 김도련이 힘 있는 사람에게 뇌물을 공여하여 승소판결을 받아냈습니다. 우의정 조연은 15명을 받았고 곡산부원군 연사종은 10명을 받았으며 병조판서 조말생은 24명을 받았습니다. 조말생은 당시 형방 대언으로 노비소송 문제를 도맡아 왕명을 출납하였는바 그는 뒤에서 김도련을 조종하여 그로 하여금 유리한 판결을 받게 한 뒤 뇌물을 받았습니다. 전 우의정 정탁과 평성부원군 조견, 공조참의 조숭덕은 이미 죽어 죄를 물을 수 없는 것이 한입니다."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소상히 조사하여 보고하라."

사건의 발단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철원호장 김생이 간성호장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김송과 김진의를 낳고 함흥 홍원으로 이주하여 농사와 장사로 부를 쌓았다. 그의 휘하에는 자손과 노비가 426명이나 되었다. 함흥일대에서 잘나가는 신흥토호다. 당시 부의 척도는 토지와 노비 숫자다. 노비는 소와 말처럼 사고파는 물건이었다.

김도련의 아버지 김원룡이 장사하러 흥원을 방문할 때면 김생의 집에 묵었다. 그들은 호형호제하며 절친이 되었다. 사이가 가까워질수록 자수성가하여 거하게 살고 있는 김생이 부러웠고 또한 그의 재산이 탐났다. 그의 아들 김송의 이름에서 허점을 발견한 김원룡은 김송이 도망한 종 허송의 소생이라고 문천 관아에 참소하여 천인으로 만들어 버리고 그의 재산과 노비를 손에 넣어버렸다. 이 때 그의 뒤를 봐준 사람이 당대의 세력가 임견미다.

여말선초((麗末鮮初).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하던 초기. 사회혼란을 틈타 권력을 이용하여 양민을 천민으로 만들어 버리고 만만한자를 무함하여 노비를 빼앗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노비는 노비들대로 도망하여 양인행세를 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변정도감을 설치하고 노비송사만 전담하게 했다. 이 때 노비로 전락한 김송이 억울하다고 소를 제기하여 김원룡의 아들 김도련과 송사가 벌어진 것이다. 아버지 대에 이은 2회전이다. 수세에 몰린 김도련이 재물을 지키려고 뇌물을 뿌린 것이다. 정밀 조사를 마친 사헌부가 보고했다.

"이미 사망한 평성부원군 조견에게 17명, 돌아간 우의정 정탁에게 7명, 현 우의정 조연에게 6명, 곡산부원군 연사종에게 7명, 이원에게 4명, 고 참의 조숭덕에게 8명, 조말생에게 36명, 정주목사 남궁계에게 2명, 총제 이흥발에게 4명, 지선천군사 윤간에게 14명, 지안산군사 김이공에게 3명, 소경 최득비에게 1명, 대호군 이을화에게 1명, 전 정랑 오비에게 1명, 전 사정 신득지에게 8명, 변귀생에게 12명, 전 판사 이열에게 1명입니다."

전 방위 로비다. 뇌물을 받은 자가 늘어났고 조말생 경우에는 24명에서 36명으로 뇌물 금액이 불어났다.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옛말에 정권을 오래 잡고 있으면 안 된다는 말이 있는데 이제 생각하니 이해가 간다. 말생과는 지신사부터 병판까지 10여 년간을 같이했는데 오늘과 같은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세종은 탄식했다. 조말생이 누구인가? 현직 병조판서다. 선왕 대부터 총애를 받은 구신(舊臣)이다. 지신사(비서실장)로 가까이 두었고 영상자리에 찜해놓은 신하다. 헌데, 그가 부정부패에 연루되었고 비리의 뒷배라니 믿어지지 않았다.

"조연은 황해도 수안에 부처하고, 연사종은 강원도 인제에 부처하고, 조말생은 직첩을 빼앗고 충청도 회인에 부처하라."

솜방망이 처벌에 조정이 들끓었다. 사헌부에서 상소가 올라왔다.

영어를 알았다면 '헬조선'이라고 탄식했을 수도

세종이 신하들과 국사를 논하던 편전, 경복궁에 있다
▲ 천추전 세종이 신하들과 국사를 논하던 편전, 경복궁에 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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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말생은 임금의 은혜를 입어 관위가 재상에 이르고, 오랫동안 정권을 잡고 있어서 부귀가 극에 달했는데 재물을 탐하는 데는 끝이 없어서 매관매직하여 전지를 많이 소유하고 양민을 억압하여 천인을 만드는 등 못하는 일이 없었으니 선비의 기풍을 더럽힘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그가 법을 굽혀서 증유를 받은 전지와 노비는 장물로 계산하면 합계 7백 80관이나 되는데 형률에 의거하면 교형에 해당되고 장물은 몰수해야 될 것입니다."

당시 대명률에 의하면 뇌물이 80관 이상이면 교수형에 처하게 되어 있었다.  

"여러 대신과 의논하여 처리하겠다."

세종은 장고에 들어갔다. 덮어두자니 벌떼 같은 간원들의 목소리가 우려스러웠고 버리자니 아까운 패였다. 하명이 없자 사헌부 집의 정연이 상소장을 들이밀었다.

"조말생은 오랫동안 권력의 지위에 있으면서 송사를 판결하는 관리를 마음대로 움직여 법의 권위를 무너뜨렸으니 그의 죄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하온데 전하께서는 형률로 처단하지 않으시고 지방으로 귀양만 보내시니 실로 국법에 어긋납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형률에 의거하여 죄를 논단하시와 뒷사람을 경계하소서."

비답이 없자 우사간 박안신이 나섰다.

"조말생은 선비의 기풍을 더럽혔으니 죄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가 취한 장물이 거의 8백 관에 이르니 죽어도 죄가 남을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형률에 의해 단죄하시고 선비의 기풍을 바로 잡아 뒷사람을 경계하소서."

"조계 하는 날에 친히 보고 설명하겠노라."

아무리 임금이라도 보호해주는데도 한계가 있다. 어전회의에 대사헌 권도, 장령 이안경, 서성, 지평 정갑손이 예궐했다.

"조말생의 죄는 장물이 780관이나 되므로 이것은 80관의 수십 배나 되니, 이를 용서하고 다스리지 않는다면 뒷사람을 무엇으로 징계하겠습니까. 삼가 바라옵건대 형률에 의거하여 뒷사람에게 법의 지엄함을 보여주소서."

"경등이 법에 의거하여 아뢰니, 내가 어찌 감히 그르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말생은 태종 때로부터 그 직책을 수행한 지가 20여 년이 되었으니 어찌 공로가 없다고 하겠는가?"

공과 과를 가르자는 것이다. 대사헌 권도가 나섰다.

"다른 신하에게도 어찌 그 정도의 공이 없겠습니까. 그런데도 그의 죄를 청하는 것은 뒷사람에게 탐오를 경계하기 위한 것이오니 청컨대 형률 조문에 의거하여 법대로 처리하소서."

"탁월한 공이 있었다면 어찌 먼 지방으로 귀양을 보냈겠는가. 나는 그를 죽이면 지나치고, 귀양 보내면 중도를 얻게 되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중도, 세종의 최후 버팀목이다.

"차마 죽이지 못하신다면 옛날의 제도에 의거하여 사사하소서."

예봉산을 바라보며 한강을 굽어보고 있다.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 석실마을에 있다
▲ 조말생 묘 예봉산을 바라보며 한강을 굽어보고 있다.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 석실마을에 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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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헌도 물러서지 않았다. 하지만 왕조시대, 임금은 갑이고 신하는 을이다. 1년 후, 유배를 풀어준 세종은 조말생을 가까이 두고 중용했다. '법대로 하라'고 삼사(三司)가 들고 일어났지만 세종은 외면했다. 사헌부와 사간원의 협공을 받아 교형과 사사(賜死)의 대상으로 내몰렸던 그는 78세까지 천수를 누렸다.

재물을 앞세워 법을 유린한 김도련은 노비 132명만 압수당했을 뿐, 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김생의 후손들은 신분을 회복하지 못하고 계속 노비로 살다 세상을 떠났다. 그들이 영어를 알았다면 죽어갈 때 헬(Hell) 조선이라 불렀을 것이다.


태그:#세종대왕, #조말생, #변정도감, #김도련, #김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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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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