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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6월이라 한낮 기온이 30도까지 올라간다. 사람들은 시원한 그늘을 찾기에 바쁘지만 불볕 아래 서서 1인 시위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한 모임 '리멤버0416' 회원들이다. 참사가 일어난 지 2년이 지났지만 그들은 꿋꿋이 서 있다.

2년이란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유가족도 아니다. 어떻게 계속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지 궁금했다. 매주 수요일 점심,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는 '리멤버0416'의 임은주씨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다음은 지난 1일 그와 나눈 일문일답을 정리한 것이다.

"'아직 있다'는 마음으로 나선다"

국화 앞에서 1인시위하는 임은주 씨
 국화 앞에서 1인시위하는 임은주 씨
ⓒ 이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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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주 수요일 국회 앞에서 1인 시위하시잖아요, 반응이 있나요?
"제가 점심시간 즈음에 서 있는데 국회는 일반인들이 거의 지나다니지 않아요. 더구나 이제 참사가 일어난 지 2년이 넘어서 큰 반응은 없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세월호 참사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으며 유가족과 함께 한다는 뜻으로 계속 하고 있습니다. 국회의원이나 나랏일을 보는 사람들이 저희의 존재 자체를 알길 바라는 마음으로 서 있습니다."

- 언제부터 하신 건가요?
"정확한 날짜는 기억 안 나지만, 2014년 6월 초 서울 광화문에서 처음 시작한 것 같아요. 오지숙씨가 첫 피케팅을 한 뒤 여러 분이 그분 뜻에 동참하는 의미에서 피케팅을 시작했거든요. 광화문부터 언론사, 당사, 국회 등 저희가 자발적으로 피케팅 하는 장소가 점점 늘었어요.

전국의 많은 분이 그 지역에서 자기가 시간 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곳을 찾아서 노란 피켓을 들었습니다. 저도 그때 광화문에서 처음 피케팅을 시작하면서 광화문은 이미 여러 사람이 서있으니 새로 피케팅을 했으면 좋겠다는 곳에 제가 같이 하게 된 거죠."

- 집에 있는 의정부에서도 할 수 있었을 텐데 국회로 나오신 이유가 있나요?
"첫 피케팅 시작할 때 의정부 분들과 인연이 닿았어요. 그 이후로 의정부에도 세월호 대책회의가 있다는 걸 알았고, 지역에서 활동도 함께 했죠. 그런데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는 사람이 없고, 의정부에는 사람이 있어요. 그래서 따로 또 같이 하는 마음으로 제가 여력이 될 때는 의정부에서도 같이 하고, 제가 바쁠 때는 국회를 우선으로 서게 됐죠."

- 기억에 남는 일이 있을까요?
"국회 앞에서는 집회를 할 수 없어요. 가끔 시민단체가 기자회견을 하면 시민보다 경찰 숫자가 더 많을 때가 있죠. 그래도 집을 나설 때마다 '내 발걸음 하나가 선을 만드는 작은 점 중 하나야'라고 생각하면서 꿋꿋하게 오고 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와보니 경찰이 쫙 깔려 있는 거예요. '이 틈에서 내가 어떻게 1인 시위를 하나?'라고 생각될 때가 있어요.

어떤 날 보면 경찰이 저를 빙 둘러싸서 제가 그 안에 갇혀요. 그럴 땐 갇혔다고 생각 안 하고 제가 그들 사이에서 돋보이는 존재라고 생각해요. 제 피켓을 가리는 경찰에게 비켜 달라고 당당하게 소리치기도 하고요. 그럴 때 '내가 점점 용감한 시민이 되어가는구나'하고 느껴요.

어버이연합 등 보수 단체나 교회 신자들이 올 때도 있어요. 그 때는 완전히 도를 닦는 심정으로 서있어요. 그분들은 구국 기도회라고 해서 두 시간씩 찬송가 부르고 설교하는데 그걸 지켜보는 사람에게는 엄청난 소음이잖아요. 그리고 그 내용이 제가 가진 가치나 철학과 동떨어진 내용이면 더더욱 그렇고요. 도를 닦는 심정으로 두 시간을 버틸 때가 종종 있었어요."

- 보수 단체가 시비를 걸진 않았나요?
"기자회견 등이 있으면 경찰 중 직급 높은 사람이 제게 와서 '이거 끝날 때까지만 피케팅을 접어 달라'고 말을 해요. 혹시 충돌이 있을지 모른다고요. 그럴 때 저는 굉장히 당당하게 '경찰들이 많으니 지켜달라'고 답해요. 다행히 전 한 번도 직접 폭언이나 해코지를 들은 적이 없어요. 그러나 함께 활동하는 '리멤버' 엄마들 경우에는 모욕적인 언사를 들은 적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 경찰이 있는 게 오히려 이점이네요.
"전 그렇게 마음 먹었어요. 경찰은 중립적이어야 하잖아요. 시민을 지킬 가장 큰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잖아요. 제가 하는 일이 국가의 안전을 위협하는 일이 아니라 국가가 안전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경찰의 의무나 책임에도 일조하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한 번도 경찰을 적대시해본 적 없고요. 그들이 충분히 저를 지켜줄 것이라고 믿어요."

- 아무리 의미 있는 일이라지만 무반응이면 계속해나가기 어렵지 않나요?
"어려웠죠. 가장 큰 건 정말 안전한 사회를 만들고 싶고 억울한 마음을 풀어주고 싶은 거죠. 마음이 편해야 희생자들이 다른 세상으로 갈 수 있거든요. 남은 가족 또한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는 건 엄청난 고통이에요. 저는 직업이 다른 사람의 트라우마를 치료해 주는 일이기 때문에 별 흔들림 없이 쭉 활동했던 것 같아요.

정치사회적 문제는 이른 시일 안에 원하는 대로 척척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굉장히 끈질기게 지켜내야 하는,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직접 세월호 유가족분들이 희망을 놓지 않고 계속 열심히 하시니까 그분들을 돕는 마음으로 하고 있어요. 제가 받은 고통은 그들에 비하면 미미한 것이잖아요. 물론 마음속으로 '이거 언제 끝나나'하는 고민은 있죠. 그러나 크게 동요한 적은 없어요."

"혼자였다면 오래 못했을 것"

- 그래도 가장 힘들었던 때가 있었을 것 같아요.
"혼자였다면 힘들어서 오래 못했을 거예요. 그러나 힘들 때마다 함께 피켓을 드는 엄마들을 보며 많이 위로 받았어요. 그분들은 각자 자기의 현실에 살면서 이 문제를 잊지 않기 위해 실천하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런 분들과 같이 하기 때문에 계속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 2년이 지나다 보니 언론 보도도 줄었고 '아직도 세월호냐'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저도 잠시만 활동했다면 '아직도 세월호냐'고 말할 것 같아요. 자기 현실을 살다 보면 다른 일에 관심을 많이 못 주잖아요. 그래서 서운하긴 하지만 그런 목소리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진 않아요. 그분들에게 '아직 아무것도 해결되지 안 됐다'라고 알리는 사람이 저희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희조차도 안 움직이면 묻혀 버릴 가능성이 크잖아요.

그러나 저희가 각각 하나의 점이라는 생각으로 곳곳에서 피켓도 들고 노란 리본도 놔두니까 사람들이 자기 삶에 빠져 있다가도 다시 관심 가질 수 있잖아요. 그래서 우리 행동이 가치 있다고 믿어요. 또 엄마들이 개인 사정으로 이번 주는 못 나간다고 미안해 하는데 그럴 때마다 '그건 미안한 일이 아니다, 함께 할 수 있는 게 감사한 일이고 당신 때문에 나도 할 수 있다'고 서로 격려해요."

- 이제 여름이라 햇볕이 뜨거울 텐데 힘들지 않나요?
"4계절 내내 힘들죠. 서는 곳마다 사정이 다르지만 제가 서는 국회는 허허벌판이잖아요. 차가 다니고 골짜기에서 부는 바람이 지나는 길이라 겨울엔 더 춥고 여름엔 더 더워요. 그러나 언제나 피케팅하기 좋은 날이란 생각으로 해요.

여름에 조금 괴로운 건 두피가 너무 뜨거워요. 피켓이 바람에 접히지 않도록 집게로 고정 시켜 놓는데, 그게 해를 받으면 손대자마자 '아 뜨거' 할 정도로 뜨겁거든요. 머리로 해를 받고 있어서 모자를 쓰거나 양산을 들어야 하는데, 피켓 내용을 온전히 전하려면 손이 자유로워야 해요. 그래서 대부분 모자를 쓰죠.

하지만 모자 안이 너무 뜨거워서 한두 시간 되면 김이 날 것 같아요. 그래서 얼음팩을 모자 안에 넣고 있기도 해요. 노하우가 생겼어요. 겨울엔 핫팩을 붙이고 여름엔 얼음팩을 넣거나 수건을 적셔서 목에 둘러요. 안 그러면 화상 입어요."

- 국회는 일반인이 쉽게 오는 곳이 아니잖아요. 임은주씨도 전에는 국회에 와 본 적 없을 것 같은데, 그런 것에 대한 고민은 없었나요?
"제가 단순한가 봐요(웃음). 그런 고민은 없었어요. 국회는 우리나라 정치를 대표한다는 상징성이 있잖아요. 저희가 시작할 당시에는 간절함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걸 빨리 받아들여지길 염원하는 마음 때문에 국회는 어려운 장소가 아니라 그걸 빨리 알아줄 수 있는 곳이었죠. 언론 앞에 서는 이유도 마찬가지예요. 언론이 빨리 깨달아서 제대로 된 정보를 알려주기를 원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할 새가 없었어요."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해 주세요.
"제가 하는 일이 있어서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도 고민이에요. 해야 하는 일인데도 여러 가지 갈등이 생길 때도 있어요. 한 2년 즈음 되어서 주변은 많이 알잖아요. 고생한다고 칭찬하는데 그게 부담되거나 부끄러울 때가 많아요. 마음속으로 '시간도 없는데 가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 때도 많아요. 그런데 친구들이 칭찬하니까 '내가 그것 때문에 다음주 못 빠진다'라고 농담을 해요.

40대가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잖아요. 맞는 것 같아요. 그 정도 되면 제가 사는 가족뿐만 아니라 제가 속한 사회나 국가가 제 얼굴인 거예요. 그래서 그게 어떤 행동이든 각자 위치에서 각자가 할 수 있는 만큼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다행히 다른 사람보다 쉽게 움직여지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움직였을 뿐이에요. 다른 분들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자기 얼굴은 자기가 잘 가꾸잖아요. 마찬가지로 사는 곳에 관심을 가지는 게 당연하죠."


태그:#임은주, #세월호, #1인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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