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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1일 오전 마포구 홍익대 정문에 인터넷 커뮤니티 '일베' 상징물 조각상이 설치되어 있다. 조각상은 일베를 상징하는 자음 'ㅇ'과 'ㅂ'으로 회원을 인증하는 손가락 형상이다. 이 조각상은 조소과 4학년 홍기하씨가 '환경조각연구' 수업 과제로 제작해 '환경조각연구 야외조각전'(5.31~6.20)에 출품한 것으로 '어디에나 있고, 아무데도 없다'는 제목을 붙였다. 30일 오후 설치된 작품에는 음료수와 달걀을 던진 흔적과 자진철거를 요구하는 항의 메모지도 붙어 있다.
▲ 홍대 정문에 설치된 '일베' 상징물 조각상 5월 31일 오전 마포구 홍익대 정문에 인터넷 커뮤니티 '일베' 상징물 조각상이 설치되어 있다. 조각상은 일베를 상징하는 자음 'ㅇ'과 'ㅂ'으로 회원을 인증하는 손가락 형상이다. 이 조각상은 조소과 4학년 홍기하씨가 '환경조각연구' 수업 과제로 제작해 '환경조각연구 야외조각전'(5.31~6.20)에 출품한 것으로 '어디에나 있고, 아무데도 없다'는 제목을 붙였다. 30일 오후 설치된 작품에는 음료수와 달걀을 던진 흔적과 자진철거를 요구하는 항의 메모지도 붙어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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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도로 혐오한다'는 뜻의 '극혐'이라는 신조어가 있다. 지난 한 주간 대중은 홍익대 정문에 등장한 조각상을 보고 '극혐'했다. 조각상은 일베를 상징하는 형상이었다. 평소 일베를 '일베충'쯤으로 여기던 대중 사이에서 조각상을 철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작가는 실체가 없지만 이미 사회적 현상으로 만연한 일베를 실체화해 공론을 이끌어낼 의도였다고 해명했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게 아니며 '표현의 자유'를 인정해 달라고도 덧붙였다.

하지만 일베부터가 평소 패륜적 행위를 해왔으므로 일베 상징은 '표현의 자유'로 인정할 수 없다는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랩퍼 성큰은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든 다짜고짜 '혐오'스런 일베 상징을 등장시킨 채 '표현의 자유'라고 주장하는 건 무책임하다며 조각상을 파괴했다. 논란은 '혐오'로 시작해 '표현의 자유'를 거쳐 다시 '혐오'로 귀결됐다. 정작 일베의 '혐오'가 왜 나쁜지, '표현의 자유'란 정확히 무엇인지, 일베의 '혐오'가 나쁘다면 '혐오'로 되받아도 좋은지 탄탄한 주장들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정리1] 타인의 표현 자유에 간섭하는 사람도 자격이 필요하다

현재 한국에서 표현의 자유는 이슈를 삼키는 소용돌이다. 추상적인 개념에 갇혀 대중은 표현의 자유가 정확히 무엇인지,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논의하기 보다 '표현의 자유냐 아니냐'만 따지기 바쁘다. 표현의 자유는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전통이 짧다.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로서 자유는 서양의 철학적 전통과 정치 체제 발달과 맥락이 닿아있다. 맥락을 이해하려면 '자유'와 '자율'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자율성(Autonomy)은 어원적으로 그리스어 아우토스(Autos)와 노모스(Nomos)에서 유래한 용어다. 아우토스는 '자기 자신', 노모스는 '규범'을 뜻하므로, 자율성은 '자기 자신에게 규범을 부여할 수 있음' 즉 '스스로를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이다. 따라서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든 타인이 비도덕적인 표현을 했다고 간섭하든 스스로부터 '자율성'을 갖춰야 한다. 스스로를 지배하지 못하면서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 주장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고, 스스로를 지배하지도 못하면서 타인의 표현의 옳고 그름을 따지며 간섭하는 건 섣부르다.

그렇다면 자율성은 어떻게 갖출 수 있을까. 자율성이 넓은 의미의 일반적인 능력을 뜻한다면 '자유'는 그 능력이 구체적인 상황에서 발휘될 경우를 뜻한다. 구체적인 상황도 종류가 여러가지인데 표현의 자유에는 행위의 자유, 의지의 자유 정도가 엮일 수 있다. 행위의 자유란 외부로부터의 직간접적인 강제 없이 행동할 수 있을 때다. 의지의 자유란 자신의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감정과 이성을 적절히 조화시켜 의지를 발휘할 때다.

이성과 감정의 조화.
 이성과 감정의 조화.
ⓒ 하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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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의 자유, 의지의 자유를 갖춘 사람은 외적·내적 강제 없이 표현할 수 있다. 따라서 표현의 자유는 '사람이 외적, 내적 강제를 받지 않고 표현할 수 있는 능력' 정도로 요약된다. '자유롭게 표현했다'는 건 '자율성을 발휘했다'는 사실을 전제하므로 도덕적인 책임을 물을 근거가 된다. 사람은 누구나 자율성을 잠재하지만 현실에서는 발휘하는 수준에 차이가 있다.

따라서 여러 사람이 모여살다보면 종종 갈등이 생기고 더 자율적인 사람들이 덜 자율적인 사람들에게 도덕적인 책임을 종종 묻는 경우가 생긴다. 일베, 작가, 대중, 성큰의 자율성은 어떤 기준으로 비교할 텐가. 프랑크푸르트대 사회연구소 악셀 호네트 소장은 <인정투쟁>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인정받는 방향'이 자율성의 기준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리2] 분노는 '도덕적인 감정'이다

호네트에 따르면 사람은 누구나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 무시를 당하면 인정욕구는 종종 분노로 드러나 '나 또는 우리를 인정하라'는 인정투쟁의 원동력이 되면서 '더 많은 사람이 인정받는 사회로의 진보'에 기여하게 된다. 따라서 분노할 줄 아는 사람은 자유로운 사람이다. 인정투쟁이 가능하려면 우선 자신의 내면을 '표현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 자율성 있는 인간이 '진정성' 있는 인간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진정성(Authenticity)은 어원적으로 그리스어 아우토스(Autos)와 헨테스(Hentes)에서 유래한 용어다. 아우토스는 '자기 자신', 헨테스는 '되다'를 뜻하므로 진정성은 '자기 자신이 됨'이다. 자신의 내면을 표현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인정할 때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된다. 그런데 앞에서 자율성 있는 인간이 되려면 이성과 감정이 조화도 이루어야 한다고 했다.

사람들은 이성과 감정의 밸런스가 붕괴되는 경우가 자주 있다. 그래서 '분노'해야 할 때와 장소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거나 화를 내기도 한다. 분노와 화는 다르다. 분노는 적절한 수준의 이성적 판단을 동반하기 때문에 '도덕적인 감정'으로서의 격을 갖춘다. 자신이 처한 문제를 정확히 인식하고, 문제를 낳는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고, 감정 에너지로 타격해야 할 상대를 정확히 탐지해 필요한 만큼 필요한 때와 장소에서 분출하는 고급 기술이다.

이성적 판단이 결핍돼 엉뚱하게 파편이 튀는 노기는 분노가 아니며 그냥 '화'를 내는 것에 불과하다. 이성과 감정을 리듬감 있게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인간다움'을 발휘하는 사람이며, 스스로를 지배할 줄 아는 높은 정신의 소유자, 자율적 주체, 즉 '도덕적인 인간'이다.

악셀 호네트 <인정투쟁> 참조.
 악셀 호네트 <인정투쟁> 참조.
ⓒ 하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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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3] 혐오하지 말고 분노하라

그렇다면 일베, 작가, 대중, 성큰은 과연 도덕적이었나. 우선 일베, 대중, 성큰은 공통점이 있다. '혐오'가 원동력이다. 일베는 평소에 사회적 약자들을 혐오했고, 대중은 그런 일베를 혐오했으며, 성큰은 혐오감이 느껴진다며 조각상을 파괴했다. 법철학자 마사 너스바움은 <혐오와 수치심>에서 혐오는 공적 지침으로 삼아서는 안 되는 감정이라고 경고한다.

분노는 어쨌든 분노가 향하는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고 분노를 해소하고자 다가가는 감정이지만, 혐오는 상대를 벌레처럼 여기며 '생각하는 일 자체를 꺼리며' 배제시키려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분노는 진보를 이끌어내지만 혐오는 악순환을 낳는다.

일베 연구자들이 지적해왔듯 일베는 몇 가지 사회적 요인 때문에 왜곡된 인식을 갖게 된 탓에 인정욕구를 '분노'로 분출하지 못한다. 응어리진 인정욕구는 주로 사이버 공간에서 사회적 약자들을 향한 '혐오'로 굴절된다. 혐오의 징후는 일베에게만 나타나는 건 아니다. 아래는 '일베 조각상'을 비난하는 주장 중 하나를 간추린 내용이다.

'일베는 우리 안의 존재가 아니며 특정한 정치 성향을 가진 집단이다. 이미 사회과학에서 많이 다뤄졌으며 강남역 10분 출구에서도 자신을 드러냈다. 일베는 추상명사가 아니다. 조각상은 '사회적 물음'이 아니라 일베의 피해자들의 고통을 건드리는 '인증'일 뿐이다. 조각상 파괴에 대해 말하자면 우리는 최대한 자제할 망정 때에 따라 혐오도 할 수 있는 거다. 그렇다고 사회적 약자를 혐오하고 폭력을 행사하고 인증하는 이들과 같다고 볼 수는 없잖나.'

위와 같은 주장이 불성실한 이유는 일베가 충분히 사회적 현상으로 다뤄지고 있다는 잘못된 전제에 기대기 때문이다. 단순히 사회과학에서 일베가 연구되고 종종 일베가 특정한 정치 성향을 드러내거나 물의를 일으킨다고 대중에게도 제대로 '사회적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일베 관련 논문과 단행본을 꾸준히 접해왔고 기사를 수 차례 써온 입장에서 보건대 대중은 여전히 일베를 낳는 사회적 요소들을 과소 평가한다.

마사 너스바움 <혐오와 수치심>(민음사 / 2015/ 3만3000원)
 마사 너스바움 <혐오와 수치심>(민음사 / 2015/ 3만3000원)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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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째 댓글 창에서 일베 뉴스마다 베플이 되는 '일베충'이라는 조어를 생각해보라. 그러면서도 일베를 낳은 사회적 모순이 무엇인지 2개만 꼽아보라고 해도 제대로 못들 사람이 태반이다. 사회 전반적으로 일베는 여전히 '추상명사'다. 일베의 '구체적' 피해자가 존재하며 일베 상징만으로도 공포를 느끼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공포라는 감정을 공적 지침으로 삼는 데도 원칙이 필요하다(관련 기사: 여성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지 않았다).

문제와 문제를 환기시키는 행위 자체는 구분되어야 한다. 문제를 환기시킨다고 '일베' '데이트 폭력'과 같은 기표를 포함한 제목의 기사들이 내려져야 하는 게 아니듯 일베 조각상도 그렇다. 사람들이 일베를 정말 사회적 현상으로 받아들였다면 일베를 낳는 '사회적 모순'에 대해 충분한 이성적 판단을 하고 '분노'를 드러냈어야 했다. 일베나 일베 조각상을 '혐오'하고 마는데 그친 작금의 결과를 보라.

물론 '일베의 혐오'와 '일베의 혐오에 대한 혐오'가 질적으로 같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럼에도 어쨌든 둘 다 '사회적 모순'에 대한 불성실한 이성적 판단에 기댄다면 둘 다 도덕적인 감정으로 보기 힘들다. 한편 작가가 일베에 대한 옳고 그름부터 따지지 않겠다면서도 작품을 '표현의 자유'라고 주장한 건 '표현의 자유'라는 용어가 갖는 윤리적 무게를 잘 모르고 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일베를 사회적 현상으로 직시하자는 원래의 취지만 고수하는 편이 더 좋았다.

'우리 안의 일베'를 직시하자는 이야기는 다른 게 아니라 이런 뜻이다. 일베를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몇 가지쯤 공유하는 사회적 모순을 간파해야 한다는 것. 그걸 분노로 타격할 준비를 제대로 갖추지 않는 이상 사회는 바뀌기 힘들다는 것. 일베 조각상 파괴를 나치를 '철저하게 반성한' 독일인들의 하켄크로이츠 분노와 같은 단계로 보는 건 성급하다. 표현의 자유란 주어지는 게 아니며 매 순간 실천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혐오가 아닌 분노를 하자.


태그:#표현의 자유, #일베 조각상, #홍익대, #혐오, #인정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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