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가 개봉 하자마자 영화를 본 사람들 사이에서 몇 갈래 해석이 나오고 있다. 개인 욕망 실현이라는 평이 지배적인 가운데 이야기의 주체인 여성 역시 중요한 화두라고 수 있다. 193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과 따로 노는 것 같은 히데코(김민희 분)와 숙희(김태리 분)는 엄밀히 말하면 누구보다 시대적 비극에 치열하게 투쟁한 인물이었다. 남성적 폭압 내지는 이기심을 상징하는 코우즈키(조진웅 분)와 백작(하정우 분)을 극복해내는 모습에서 충분히 읽어낼 수 있다.

박찬욱(53) 감독의 전작을 함께 생각해보자. 그의 초기작을 관통해온 게 복수심이라는 감정이고 그래서 '복수 3부작'(<복수는 나의 것>(2002), <올드보이>(2003), <친절한 금자씨>(2005))이 등장할 수 있었다면, 근래에 박 감독은 여성에 집중하고 있는 건 아닐지. 지난 5월 31일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박 감독에게 <아가씨>와 여성에 대해 물었다.

깨어난 여성들

 영화 <아가씨>의 박찬욱 감독이 31일 오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아가씨>는 제목에서 예상할 수 있듯 여성이 주축이 된 이야기다.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남녀가 만나 서로를 속고 속이는 과정을 밀도 있게 그려냈다. 그의 전작 <박쥐> <사이보그지만 괜찮아> 등과 비교될만한 작품. ⓒ 이정민


우선 박찬욱 감독이 영화화 한 과정이 재밌다. 세라 워터스의 소설 <핑거 스미스>를 원작으로 했고, 공동 제작자 임승용 대표가 이를 추천하며 <아가씨>가 만들어졌다는 건 잘 알려져 있다. 다만 임 대표보다 먼저 그 책을 읽고 추천한 이가 임 대표의 아내였고, 박찬욱 감독의 아내 역시 박 감독에게 '차기작을 할 거면 <핑거 스미스>를 해보시라' 제안했다. 정리하면 <아가씨>는 두 여성이 먼저 알아봤기에 탄생할 수 있었던 작품이라는 사실.

단순히 동성애가 파격적으로 묘사됐기에 박찬욱 감독이 수긍한 건 아니었다. 박 감독은 "서로 속셈을 뻔히 알면서도 유혹하고 거기에 응하는 설정이 흥미로웠다"며 "두 여자의 관계가 거짓으로 이뤄진 것 같지만 동시에 서로를 탐하려는 욕망도 중요한 작용을 한다는 게 기막히다고 생각했다"고 원작에 대한 첫 느낌을 전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박 감독은 여성 캐릭터의 승리를 그렸다.

 영화 <아가씨>의 한장면

영화 <아가씨>의 한 장면. 숙희(김태리 분)는 히데코(김민희 분)의 하녀로 일하게 된다. 히데코가 백작(하정우 분)에게 반하게 하여 재산을 가로채는 게 목적이지만 일은 계산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 CJ엔터테인먼트

"흔히 동성애를 묘사할 때 누가 남자고 여잔지 물어보는데 이 작품은 그게 아니다. 일종의 게임을 즐기는 거다. (여성의 승리를 그렸다는 점에서) 내 전 영화에 비해 여성에 대한 관점이 발전했다고 보진 않는다. <친절한 금자씨> 이후부터 여성을 묘사할 때 공을 더 많이 들였다. 적극적인 사람, 투쟁하는 사람 등 그렇게 그리려고 늘 해왔다. <스토커>(2013) 역시 그 연장선이고. 다만 히데코가 당한 학대가 너무 끔찍하기에 결말 만큼은 행복하고 통쾌해야 한다고 생각한 거다."

박 감독이 말한 학대가 곧 시대의 비극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인이지만 일본인이 되고 싶어 했던 코우즈키에 의해 음란 소설 독해를 강요당했던 히데코는 그간 다른 작품이 묘사해온 숱한 독립투사들과는 다른 식으로 기지를 발휘한다. 박 감독은 "바로 그게 저항"이라며 <아가씨>가 철저히 개인 묘사에 집중한 나머지 시대성을 무시했다는 일각의 지적에 대해 답했다.

"코우즈키의 집에서 탈주하고 서재를 붕괴시키는 게 저항이다. 코우즈키는 스스로 여러 책과 자료를 모으면서 일제에 적극적으로는 협력하지 않는 사람이라며 일종의 자기 합리화를 하는 사람이잖나. 그의 서재를 돈 많이 들여 화려하게 지었으니 불태워버리면 더 멋있을 텐데 그게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책과 그림이 소중했으니 그것만 건드려도 무너질 수밖에 없는 존재니까. 일본으로부터 폭력적으로 강요된 근대화를 여성이 저항하는 거지."

상상의 쾌감

 영화 <아가씨>의 박찬욱 감독이 31일 오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여성 배우의 노출 비중이 상당한 작품이기에 사전 합의가 중요했다. 박찬욱 감독은 "일단 시나리오에 자세히 나와있었고 그걸 숙지한 다음 계약을 맺었기에 촬영 중 특별한 문제는 없었다"고 말했다. 김민희와 신인 김태리의 자연스러운 호흡이 무엇보다 중요했고, 두 배우는 감독의 기대 이상을 해냈다. ⓒ 이정민


정리하면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설정은 근대성을 표현하기 위한 것과 동시에 여성 캐릭터의 성장을 위한 장치였다. 박찬욱 감독의 다른 전작을 읊었다. <박쥐>(2009) <스토커>(2013) 같은 근작들이 모두 여성과 그의 욕망에 관한 내용이라는 사실을 알리며 '욕망 3부작'으로 묶을 수 있는지 물었다.

"욕망으로 묶기엔 너무 큰 얘기 같고...(잠시 생각)... <사이보그지만 괜찮아>와 <스토커>에 이은 여성의 성장이라고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종속적이던 여성이 독립 주체로 성장해서 탈주하는 것이다."

<아가씨> 속에서 음란 소설을 독해하는 히데코와 이어지는 남성들의 변태적 반응 역시 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박찬욱 감독은 "그 남자들의 모습은 코우즈키의 상상일 수도 있고, 히데코의 상상일 수도 있게 편집했다"며 히데코의 주체성을 설명했다.

"강요된 낭독을 하는 히데코는 자칫 노예처럼 혹은 낭독 기계처럼 보이지만 나름 즐기는 것일 수 있다. 남자놈들이 내 이야기를 들으며 무슨 상상을 할지 생각하는 거지. 한편으론 백작(하정우 분)의 상상일 수도 있다. 히데코를 보고 반했기에 한 몸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담는 건데, 이 모든 상황을 주도하는 건 바로 히데코다. 마치 남자를 가지고 노는 것 같은 모습이다."

작가주의의 길

 영화 <아가씨>의 박찬욱 감독이 31일 오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미술, 문학 등 박찬욱은 다양한 예술 분야에 관심이 높았다. "영화를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 미술 비평가가 됐을 것"이라며 그가 웃어 보였다. "높은 대중의 관심이 여전히 낯설다" 말하면서도 그는 끊임없이 창작욕을 분출하고 있었다. ⓒ 이정민


이렇게 작품을 몇 개의 개념어로 분류할 수 있는 감독이 한국에선 아직 일반적이지 않다. 한국 영화계에서 작가주의의 선봉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는 박찬욱 감독은 시나리오와 기획을 모두 경험한 흔치 않은 이력의 소유자기도 하다. "지금도 기획하거나 연출하고자 하는 이야기들이 몇 개 있다"며 그는 멈추지 않는 창작 활동을 전했다. 혹시 데뷔 초기 평론가 생활(박 감독은 데뷔작 <달은 해가 꾸는 꿈> 이후 약 5년간 몇 개의 영화지에 평론을 기고하기도 했다 - 기자 주)이 이런 활력의 근거이진 않을까. 이에 박 감독이 당시에 대한 기억을 전했다.

"예전에 서부극을 하려다 무산된 적이 있다. 이젠 내 손을 떠나 다른 분이 할 수도 있는데 여전히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긴 하다. 기획하고 있는 것들 중에 미국영화도 있다. 평론가 생활? 사실 먹고사는 문제로 억지로 한 일이긴 하다. 감독 데뷔 후 일이 안 들어와서 하는 수 없이 쓰기 시작한 거다. TV나 라디오 출연도 꽤 했는데, 그 자체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원하지 않는 상태에서 억지로 하는 게 힘들었다는 거다. 내 영화를 만들고 싶은데 남의 영화를 분석하고 소개하려니 놀림 받는 기분이랄까. 차라리 커피를 만든다거나 건설현장에서 일했으면 마음이 더 깨끗했을 거다. 지금도 글을 써달라는 청탁이 오면 단칼에 거절하는 게, 그 시절이 너무나 괴로웠기 때문이다. 악몽 같은 시간이었다."

차분한 어조였지만 박찬욱 감독이 창작자의 길을 얼마나 갈망했고 지금도 얼마나 갈망하는지 엿볼 수 있었다. 그는 "(작가주의 감독이라는 세간의 평과 기대에) 어떤 거창한 소명의식을 갖긴 힘들지만 내가 죽은 뒤 다음 세대에서도 감상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며 "내가 남긴 작품들이 개별 작품 이상의 큰 세계를 형성할 수 있었으면 한다"고 지향점을 밝혔다.

"사실 영화하는 사람들이 TV드라마를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잖나. TV는 훨씬 많은 사람들이 보고 크게 화제가 된다. 그리고 영화보다 더 많은 캐릭터들이 나와서 사람들을 웃기고 울린다. 영화랑 다를 게 거의 없다. 단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TV보다 영화가 더 오래 살아남아 관객들을 꾸준히 만날 수 있다는 것? 물론 모든 영화가 오래오래 남진 않겠지. 그런 영화를 만들 자신이 없다면 TV 드라마를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시나리오 작가, 제작자 등 여러 분장을 거친 박찬욱 감독은 "제작자로선 당분간 별 활동이 없을 것"이라 말했다. 바꿔 말하면 더 활발하게 자신의 영화를 찍어가겠다는 의미다. 그의 행보 자체가 이젠 한국영화계의 자산이 되어가고 있다.

 영화 <아가씨>의 박찬욱 감독이 31일 오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내 작품을 성실히 잘 찍다 보면 어느새 내 세계관이 담겨 있을 것"이라고 그가 말했다. 감독의 꿈은 그런 것이다. 한 번 보고 잊히는 게 아닌 세대를 거듭해도 남을 수 있는 작품을 찍고 싶은 마음. 그가 영화를 하면서 바라는 것 중 하나였다. ⓒ 이정민



박찬욱 아가씨 김민희 김태리 조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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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 정신차리고 보니 기자 생활 20년이 훌쩍 넘었다. 언제쯤 세상이 좀 수월해질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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