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편집자말]
 영화 < 4등 > 한장면

영화 < 4등 > 한장면 ⓒ (주)프레인글로벌


영화 < 4등 >에는 보기 불편한 캐릭터들 투성이다. 자식한테 저주를 퍼붓고 괴롭히면서 그게 희생과 교육이라는 망상을 품는 편집증 환자인 엄마(이항나)나, 자기 극복을 하지 못하고 매질로 존재감을 과시하는 피해망상증 코치(박해준)는 말 할 것도 없다. 누가 봐도 병자고 악인이니까.

준호(유재상)는 어떤가. 마냥 피해자인가? 아니다. 맞기만 한 건 아니다. 코치에게 맞았던 방식대로 동생을 때린다. 코치의 스승은 어떤가. 애초에 잘못된 습관을 바로잡아주지 않았고 충분한 통제력을 발휘하지 못했으므로 그도 선생으로서 옳다고 볼 수 없다. 미스김은 왜 애초에 코치의 폭력을 고발하지 않았고, 코치의 동네형들은 유망주의 앞길을 왜 막아섰던 건가. 악인이 끝이 없다.

하지만 이들이야말로 등수를 가려줘야 한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지만, 1등이 왜 1등인지 가려주지 않으면 모두가 1등에 납득하지 못하게 되므로 혼란이 발생한다. 모두가 인정하는 나쁜 1등에게는 비난을 집중해 주어야 한다. 그래야 이 세상 진일보가 가능하지 않겠는가.

내가 뽑은 영예의 악인 1위는 아버지(최무성)다. 기자생활 외벌이로 4식구 먹여 살리기 바쁜 평범한 그 아버지 말이다.

그 평범해 보이는 아버지가

 영화 < 4등 >의 한장면. 아버지 영훈은 체벌에 대해 이중성을 보일 뿐 아니라 아들을 키우는데 있어서 완전한 방임적인 태도를 보인다.

영화 < 4등 >의 한장면. 아버지 영훈은 체벌에 대해 이중성을 보일 뿐 아니라 아들을 키우는데 있어서 완전한 방임적인 태도를 보인다. ⓒ (주)프레인글로벌


왜 아버지가 가장 나쁘냐하면, 그가 이 모든 사건의 발단이고 추동자이기 때문이다. 자, 보자. 영화 첫 씬부터 아버지는 폭력을 키우는 거름을 뿌린다. 포장마차에 불쑥 들어온 미성년인 코치에게 술잔을 건넸다. 어른으로 인정한다는 표시다. 그 술 몇 컵은 코치의 좌절과 그 후의 폭력성까지 만들어내는 밑바탕을 상징한다.

코치의 폭력성은 어디서 기원하는가? 경험이다. 코치 스스로 자백했듯이, 엘리트로서 누리던 호사와 순탄함이 일순간 부정되었을 때 그것을 이겨내지 못하고 한 순간에 무너졌다. 그때 매질을 참고 견뎠더라면, 혹은 그 전에 참아낼 만큼의 매질로 단련되었다면, 1등은 계속 자신의 것이었을 거라는 믿음에서 폭력은 미화된다. 적당한 폭력은 약이란 식이다.

반면 코치가 한 번 매질에 무너질 만큼 나약했던 건 왜일까? 특별한 칭찬과 떠받듦이다. 수영계 내부의 특별대우가 사무실에서 먹는 떡볶이와 순대였다면, 외부의 특별대우는 어른(아버지)의 컵소주였다. 너는 인정해 준다는 증표다. 하지만 그것이 소년에게는 과분했고, 그 과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유망주 대열에서 튕겨져나와 선수에서 폭력 코치로 커간다.

아버지의 이중성 또한 인물 사이의 갈등을 격랑 속으로 밀어 넣는다. 즉, 코치 너는 맞을만 해서 맞은 거고, 내 고귀한 자식은 맞고 사는 가축이 아니라는 폭력에 대한 이중성이다.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멘스. 내가 때리면 눈물 삼킨 훈육, 남이 나를 때리면 폭행. 이 추잡한 폭력에 대한 이중성은 시대의 산물이기도 하다. 우리 뼛속과 정신까지 장악한 매질의 추억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내가 가장 의외였던 장면은 코치가 무단이탈을 했다는 이유로 매를 맞던 씬이다. 뭐 저 정도 맞는 걸 못 참아서 도망쳐 나오냐?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선생이 당구 큐대가 부러질 정도로 학생을 팼는데 그 이유가 잡담. 성기를 꼬집는 추행을 하는데 그 이유가 졺. 복도 이쪽에서 저쪽까지 뺨을 후려갈겼는데 그 이유가 대답 안 함. 고등학교 교실에서 선생에게 맞아 학생이 죽어나가고 장애를 얻는 일이 왕왕 있었음에도 그 시작은 학생의 잘못일 거라고 수군대던 90년대를 통과한 나는, 도대체 코치의 말랑말랑함이 수긍되지 않았다. 내 속에도 악마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 악마는 내면화 되었음에도 21세기에는 멸절된 것처럼 부정되고 꼬리를 숨겨야 한다.

코치가 그 악마의 이름을 들추어 부르자 아버지는 기겁했고, 그 악마를 감추기 위해 코치에게 돈봉투와 언론 권력이라는 21세기형 주문을 걸었다. 입 닥쳐라 얍! 하지만 그 주술은 먹혀들지 않았다. 코치의 폭력성은 더 상승했고, 아이는 더 맞았으며, 자신의 세계에서 탈출하기에 이른다. 그 때문에 가정의 불안은 커져갔고, 편집증 엄마는 모성애마저 잃어버렸고, 준호는 더욱 몰락했다. 아버지가 자신의 이중성 혹은 내부의 악마를 인정하고 코치와 대화를 시도했다면 이후의 혼돈은 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가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았던 것

 영화 < 4등 >의 한장면. 영화에서 아버지 영훈은 평범한 가장으로 보이지만 모든 사건의 발단이고 추동자다.

영화 < 4등 >의 한장면. 영화에서 아버지 영훈은 평범한 가장으로 보이지만 모든 사건의 발단이고 추동자다. ⓒ (주)프레인글로벌


하지만 이런 악행은 그나마 뭔가를 했다는 점에서 이후 수정과 개선의 빈 틈이라도 있다. 이에 비해 아버지의 가장 큰 악행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즉, 평범하고 바쁜 직장인으로 살면서 애 엄마에게 자식 교육을 다 맡기고 자신은 돈만 벌어다 주면서 경사가 났을 때만 축하와 사례를 하면 그 뿐인 방치와 무관심. 그게 가장 나쁘다.

그는 아내를 절제시키고 막을 수 있었으며, 아이와 대화할 수 있었고, 선생님을 찾아뵙고 아이에 대해 묻고 아이의 현재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것을 행사하지 않았다. 아내의 전화 보고에 실없는 소리만 내뱉는 게 고작이었다.

가축을 기를 때 방목을 한다. 하지만 울타리는 정해 놓고 동물을 풀어 놓는 거다. 경계가 없는 허허벌판에 가축을 놔두고 모른 체 하는 건 방목이 아닌 방치다. 아버지가 하던 게 그거다. 엄마라는 대리인을 조종해 좋은 결과물만 제 것으로 돌려놓으려는 게으름과 어리석음. 능력 없는 사람도 열심히 하면 언젠가 학습효과가 나타나 어떤 수준이든 성취가 있을 수 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에게는 몰락과 퇴행만이 주어진다. 그게 영화 < 4등 >의 아버지다.

 영화 < 4등 >의 한장면

영화 < 4등 >의 한장면 ⓒ (주)프레인글로벌


아이에게 극성스러운 엄마들 이야기는 흔하다. 너무나 대단해서 종종 웃음거리로 치부되기도 하고 부러움을 사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에서 아버지는 없다. 잘하거나 못하거나 다 엄마의 몫이란다. 아이 성공시키는 비법이라고 떠도는 '엄마의 정보력, 할아버지의 재력, 아빠의 무관심'이 정답이기라도 한 걸까?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이의 성공 여부를 떠나서, 그렇게 애를 키우면 아이는 더 이상 아버지의 자식이 아니게 된다. 과거 80~90년대 선생들은 학생을 때리면서 다 너를 위해 이러는 거라는 사회통념을 암묵적으로 들이밀었다. 하지만 난 이제껏 살면서 나를 팼던 선생들에게 지금 잘 살고 있는지 물어오는 전화 한 통 받지 못했다. 그렇게 잘되라고 눈물을 머금고 때렸으면, 어떻게 컸는지 궁금할 만도 한데 말이다.

뭐 시절이 그랬고 살아남기에 급급했다고 하니 넘어가기로 하자. 하지만 21세기의 아들과 아버지는 시대를 방패 삼거나 외면해서 해결 날 관계가 아니다. 내 정서와 사랑과 세계관을 넘겨주지 못하고 무관심으로 키운 아이는 옆에 있어도 내 자식이 아닌 남의 자식이다.

하여, < 4등 >의 아버지는 최고의 얼간이이자 가장 서글픈 캐릭터다.

성장 영화 <4등>의 한 장면. 준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수영의 열정과 실력을 체득하고 나아간다.

▲ 성장 영화 <4등>의 한 장면. 준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수영의 열정과 실력을 체득하고 나아간다. ⓒ CGV아트하우스



4등 영화 교육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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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 기업하면서 세상 사람들과 소통하려고 글을 씁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 정신차리고 보니 기자 생활 20년이 훌쩍 넘었다. 언제쯤 세상이 좀 수월해질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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