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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17일 새벽 1시, 강남역 근처 화장실에서 23세의 한 여성이 34세의 김아무개씨에게 살해당하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김씨는 화장실에 대기하고 있다가 남성 6명은 그대로 보내고 여성이 오자 이와 같은 짓을 저질렀다. 김씨는 진술에서 "평소 여자들에게 무시를 많이 당해 왔는데 참을 수 없어 범행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이후 이 사건에 대해 '여성 살해'(페미사이드femicide,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성이 남성에게 죽임을 당하는 일)다, '묻지마 살인'이다,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대부분의 여성은 이 사건은 젠더에 기반한 '여성 살해'라 인식했고, 일부 남성들과 경찰, 주류 언론은 정신질환자의 일탈쯤으로 이 사건을 축소했다.

미국에서도 비슷한 갑론을박이 벌어졌던 적이 있다. 2014년 5월 23일 금요일 밤,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쌘타바버라 분교에서 살해 사건이 발생한다. 22세의 엘리엇 로저가 교내에서 남학생 셋을 칼로 찔러 죽인 뒤 여학생 셋을 총으로 더 쏴 죽이고 행인들에게도 무차별 총격을 가하다 자살한 사건이었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에서 리베카 솔닛은 이 사건 직후 미국에서 벌어진 상황을 아래와 같이 묘사한다. 

그 시합은 아이디어 월드컵의 핵심 경기였다. 양 팀은 공을 놓고 맹렬하게 다퉜다. 올스타 페미니스트 팀은 '만연한 사회문제'라고 표기된 골대에 공을 차 넣으려고 연거푸 시도했고, 주류 언론과 주류 남성들이 포진한 상대 팀은 '고립된 사건'이라는 예의 많이 본 골네트에 공을 집어넣으려고 애썼다. 주류 팀의 골키퍼는 공을 자기 골네트로부터 멀찌감치 떨어뜨리기 위해서 '정신질환'이란 말을 외치고 또 외쳤다. - 본문 중에서


겉으로 얼핏 보기엔 '묻지마 살인' 같아 보이는 이 사건을 페미니스트들이 '여성 살해'라고 주장하게 된 데에는 증거가 있었다. 바로 피의자 엘리엇 로저의 그간의 폭력행위들과 글이었다. 피의자는 자신의 미소에 미소로 응답하지 않은 여자들에게 들고 있던 라떼를 들이부은 뒤 아래와 같은 글을 남겼다. 그가 실제로 노렸던 피해자는 총으로 쏴 죽인 특정 클럽 '여자들'이었다.

"계집애들이 감히 나를 그딴 식으로 무시하다니! 감히 나를 그딴 식으로 모욕하다니! 나는 속으로 몇 번이나 분노했다. 그 애들은 내가 가한 벌을 받아 마땅했다. 라떼가 그 애들을 태울 만큼 뜨겁지 않았던 게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그 계집애들은 내가 마땅히 받아야 할 관심과 흠모를 주지 않은 죄로 끓는 물에 처박혀야 옳았다!" - 본문 중에서


여자가 자기를 무시한다는 이유로 죽어 마땅하다고 판단한 뒤 실제로 죽여버린 살인자들은 남자였다. 하지만 지금의 한국 사회와 2년 전의 미국 사회는 이러한 살인 사건들에서 살인의 가장 강력한 동기인 젠더는 제거하고 그 외의 것들을 부각하기 바빴다. 죽임을 당한 사람이 '여성'이고 죽음을 부른 사람이 '남성'이라는 사실이 아닌 모든 사실이 중요한 듯 굴면서.

이런 경향에 대해 5월 25일자 <한겨레> 신문 이라영 칼럼니스트는 이 사회엔 "'여자라서' 죽은 사건이긴 하지만 '여성혐오는 아니어야' 한다는 정답이 있다"라는 말로 맞받아 쳤다. 그리고 이러한 정답이 있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성차별적 의식과 여성혐오는 가부장제 사회를 굴러가게 하는 중요한 동력이다."

"페미니즘은 호명하고 정의하려는 싸움"

책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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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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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의 무고한 시민이 무자비한 살인자에 의해 목숨을 잃은 이 참혹한 사건. 추모만 해도 모자랄 판에, 이 슬픈 사건을 어떻게 호명할 것이며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 의견이 분분한 이 상황을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도 있는 듯하다. 또 일각에선 이 사건에 큰 의미를 부여하며 갑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여성들에 대해 불편한 마음을 드러내기도 한다.

하지만 리베카 솔닛이 말하듯 "페미니즘은 예나 지금이나 호명하고 정의하려는 싸움"이었으며, 앞으로도 이런 싸움은 계속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리고 바로 이 싸움의 목적은 추모해야 할 상황이 더는 발생하지 않게 하는 데 있다.

재벌그룹의 한 명예회장이 카페에서 20대 여직원의 다리를 만진 사건을 두고 우리는 뭐라고 해야 할까. 옛날 우리 어렸을 적처럼 '예뻐서 그랬다, 어른이 예뻐하는 데 예민하게 굴면 못써'라며 도망친 20대 여직원을 나무라야 할까. 물론, 아니다. 이제 우리는 이 사건을 '성희롱'이라 부를 수 있게 됐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일, 그러니까 남자 또는 여자가 동의 없이 이성을 만지고 농락하는 일에 성희롱이란 단어를 붙여 이를 공론화하기까지도 20년이란 세월이 걸렸다는 걸 우리는 잘 모른다. 성희롱이란 단어는 미국에서 1970년대에야 처음 고안되었고, 1986년에야 법적 지위를 인정받았으며, 1991년이 되어서야 미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성희롱 사건으로 인해 대대적으로 알려졌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화배우가 두 번째 부인을 때린 사건을 두고 '가정 폭력'이라 부르고, 유명 개그맨이 원하지 않는 여자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성관계를 시도했던 사건을 '성폭력'이라 부르며, 부부 사이, 애인 사이에서 공공연히 벌어지던 폭력 또는 강간 사건을, '부부 강간', '데이트 폭력' 으로 부를 수 있게 된 것 모두 페미니즘 운동의 결과, 즉 "호명하고 정의하려는 싸움"의 결과였다. 전 세계적으로 매년 6만6000명의 여성이 남성에게 살해되는데 이 각각의 독립된 사건에 '여성 살해'란 이름을 붙여 공론화하게 된 것도 마찬가지다.

이런 용어들로 인해 각각의 개별 사건들이 사회적 의미를 띠게 되었고, 여성들이 매일 접하는 세상을 남성들과 여성 본인들도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조금씩 세상을 바꿔나가고 있는 게 지금의 우리 현실이다.

남성과 여성이 함께 만들어가는 이 세계는 평형을 유지하는 듯 보이던 시절에도 거의 언제나 기울기는 남성 쪽을 향해 기울어져 있었다. 그러다 간혹 평형이 깨지는 순간이 왔고 그때마다 기울기의 각도가 달라졌다.

이는 단지 그 순간을 불러온 하나의 사건 때문이 아니라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의미와 정의를 논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이해에 도달했기 때문이었다. 이번 사건으로 인해 여성이 얼마나 큰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지 알게 된 남성들이 얼마나 많은가.

누군가에겐 불필요한 싸움일 뿐이고, 또 누군가에겐 마음의 평화와 안락함을 빼앗아 가는 이 시끄러운 갑론을박이 이렇듯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면 우리는 조금 더 시끄러워도 되지 않을까. 우리 모두가 함께 잘 살기 위해 꼭 거쳐야만 하는 통과의례쯤으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민주주의는 원래 시끄러운 것이라 들었다. 모두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오히려 민주주의에 위배되는 모습은 어떤 사건이 사회의 어느 계층에게 큰 아픔과 상처를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어물쩡 조용히 넘어가라며 사람들의 입을 막는 행위일 테다. 일부 부유층, 일부 계층, 일부 성만 행복한 나라가 아닌 그 어떤 조건에 놓여있는 사람이라도 행복할 수 있는 사회가 내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 사회이다.

덧붙이는 글 |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리베카 솔닛/창비/2015년 05월 15일)
개인 블로그에 중복게재합니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창비(2015)


태그:#리베카 솔닛,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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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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