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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모여 살다보면 '문제'가 생기게 마련이다. 그런데 사회 전반에서 비슷한 문제가 반복된다면 그건 그 문제가 이미 '사회적 현상'이라는 징후일 수도 있다. 왜 같은 일이 반복되는지 진지하게 머리를 맞대고 토론하고 마침내 사회 구조를 바꾸겠다는 결단을 내리지 않는 이상, 사라지기 힘든 현상. 나는 '일베'를 그렇게 본다.

"본고는 일베, 혹은 일베 이용자들이 한국 사회의 '돌연변이'이거나 '일탈자'이기는커녕 가장 성공적으로 체제가 작동했을 때 산출되는 주체라고 주장한다. (중략) 일베를 넘어서 한국 사회 전반에 걸쳐 '일베적 멘탈리티'라 부를 수 있는 사회적 삶의 태도가 형성된 것이 아닌지 질문을 던진다" -김학준(2014) <인터넷 커뮤니티 '일베저장소'에서 나타나는 혐오와 열광의 감정동화>, 국문초록, 6쪽.

왜 일베 조각상은 이틀 만에 파괴됐을까?

지난 30일 페이스북 '홍익대 대신 전해드립니다(홍대전)' 페이지에 홍익대 정문에 일베를 상징하는 조각상이 설치됐다는 제보 하나가 올라왔다.
 지난 30일 페이스북 '홍익대 대신 전해드립니다(홍대전)' 페이지에 홍익대 정문에 일베를 상징하는 조각상이 설치됐다는 제보 하나가 올라왔다.
ⓒ 페이스북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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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30일 페이스북 '홍익대 대신 전해드립니다(홍대전)' 페이지에 제보 하나가 올라왔다. 홍익대 정문에 인터넷 커뮤니티 '일베'를 상징하는 조각상 하나가 설치됐다는 제보였다.

일베를 상징하는 자음 'ㅇ'과 'ㅂ'으로 회원임을 인증하는 손가락 형상이었다. 댓글 창에는 '불쾌하다' '부끄럽다'며 격노한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조각상엔 음료수가 뿌려지고 달걀을 맞고 자진 철거를 요구하는 항의 메모지가 붙었다.

이 조각상은 조소과 4학년 홍기하씨가 '환경조각연구 야외조각전'에 출품한 <어디에나 있고, 아무데도 없다>라는 작품이다. 홍씨의 입장은 ① 일베가 이미 그 존재를 부정할 수 없고 만연한 사회적 현상임에도 실체가 없어 이를 실체화해 논쟁을 일으키려 했다. ② 단순히 일베를 옹호 혹은 비판하려는 게 아니다. ③ 외부인도 많이 보는 정문에 설치한 건 공공성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④ 작가·작품에 대한 마녀사냥식 비난·훼손이 일어난다면 일베의 폭력과 뭐가 다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홍씨의 입장에 대한 반발도 있었다.

① 작가와 같은 의도라면 독일에서 네오나치, 한국에서 일본의 신제국주의 상징이 전시돼도 상관없냐. ② 의도가 무엇이든 사전고지 없이 대중을 (존재 자체가 혐오스러운) 불편한 대상과 마주치게 하는 건 예술의 표현의 자유를 넘어선다. ③ 홍익대 구성원 동의 없이 정문에 설치했고 학교의 명예 실추가 될 수 있다. ④ 일베가 부정할 수 없는 사회적 현상·실재라면 조각상을 없애려는 대중의 존재도 사회적 현상·실재임을 받아들여라.

결국 위와 같은 반응들은 일베가 혐오스럽고 불편한(심지어 네오나치와 일제에 비견되고 학교의 명예를 실추시킬 정도의) 존재이며 따라서 조각상은 철거돼야 한다는 생각을 공통적으로 깔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이 일어났다. 조각상이 불과 이틀만에 파괴됐다.

홍익대생 두 명이 조각상 일부를 훼손했으나 현장에서 저지됐고, 1일 새벽 '랩퍼 성큰'이라는 인물이 최종적으로 파괴시킨 것이다. 성큰은 자신이 홍익대생이 아니라고 밝혔으므로 파괴의 과정과 결과에 홍익대생과 비홍익대생이 모두 관여한 셈이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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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이스북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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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일베' 직시 못하면, 다음 단계로 못넘어간다


31일 오전 마포구 홍익대 정문에 인터넷 커뮤니티 '일베' 상징물 조각상이 설치되어 있다. 조각상은 일베를 상징하는 자음 'ㅇ'과 'ㅂ'으로 회원을 인증하는 손가락 형상이다. 이 조각상은 조소과 4학년 홍기하씨가 '환경조각연구' 수업 과제로 제작해 '환경조각연구 야외조각전'(5.31~6.20)에 출품한 것으로 '어디에나 있고, 아무데도 없다'는 제목을 붙였다. 30일 오후 설치된 작품에는 음료수와 달걀을 던진 흔적과 자진철거를 요구하는 항의 메모지도 붙어 있다.
▲ 홍대 정문에 설치된 '일베' 상징물 조각상 31일 오전 마포구 홍익대 정문에 인터넷 커뮤니티 '일베' 상징물 조각상이 설치되어 있다. 조각상은 일베를 상징하는 자음 'ㅇ'과 'ㅂ'으로 회원을 인증하는 손가락 형상이다. 이 조각상은 조소과 4학년 홍기하씨가 '환경조각연구' 수업 과제로 제작해 '환경조각연구 야외조각전'(5.31~6.20)에 출품한 것으로 '어디에나 있고, 아무데도 없다'는 제목을 붙였다. 30일 오후 설치된 작품에는 음료수와 달걀을 던진 흔적과 자진철거를 요구하는 항의 메모지도 붙어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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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베가 상식을 벗어난 행동으로 물의를 일으켜 왔지만, 일베에 대한 단편적인 사실만 아는 대중이 제대로 된 윤리적 판단과 실천을 하는 건 불가능하다. '홍익대 구성원의 동의가 없었다, 학교의 명예를 실추시킨다'는 주장도 부차적이다.

같은 자리에 일베 손가락이 아닌 애플 조각상이 설치됐어도 동의를 요구했을까. 홍익대 이름에 대중이 혐오하는 이미지가 묻을까 염려하는 게 본질로 읽힌다. 하지만 대중의 판단이 반드시 성실하진 않다.

2012년 대선을 기점으로 급부상한 일베에 대한 대중의 성찰은 일제에 대한 역사적 성찰과 같은 선상에서 비교할 수준이 못된다. 대중은 일베를 '사회적 현상'으로 직시하고 왜 그런 현상이 반복되는지 성찰하고 실천 방향을 갈무리하기보다, 애써 일베 이용자들의 인격을 부정하고 존재 자체부터 외면하는 데 그쳐왔다.

'일베충'과 같은 조어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일베 현상도 '사회적 맥락'이 있다. 논문과 기사가 꾸준히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일베 현상은 학부에서도 가끔 다루어지는 이슈다. 나도 2015년에 중앙대 철학과 4학년 과목인 응용윤리학 학기 논문으로 <표현의 자유와 인정윤리적 입장에서 본 일베>를 제출해 심사에 통과한 경험이 있다.

내 논문의 결론은 "일베가 추구하는 표현의 자유는 '진정한 의미'의 자율성에 따른 표현의 자유로 인정될 수 없다. 따라서 일베에 대한 도덕적 간섭주의는 정당하다"로 끝난다. 이 결론 전까지 나는 불편함을 초월해 일베의 사고 구조부터 관조했다.

내가 특별해서가 아니다. 스스로의 감정을 추스를 수 있는 자율적인 인간이라면 누구나 취할 수 있는 자세다. 주로 박가분의 <일베의 사상>과 김학준의 사회학 석사 논문(2014)을 참고했는데, 특히 김학준은 한국에 널리 퍼진 몇 가지 사회적 조건이 맞아 떨어지는 사람들이 '일베적 멘탈'를 지닌다고 본다(기사 말미 '일베적 멘탈리티 관련 기사' 참조).

내가 보기에 일베 조각상에 반발하는 대중의 반응은 역설적이게도 '일베적 멘탈'을 낳는 조건 중 하나인 '타자지향성'과 닮은 측면이 있다. 바로 이 점이 꾸준히 나치를 '철저하게 반성'하고 '사회 체제에 대한 맹목적인 순응이 위험하다는 인식'을 놓지 않는 독일인들의 성실함을 한국인들이 따라가지 못하는 원인이 아닐까.

타자지향성은 사회학자 리스먼이 <고독한 군중>에서 제시한 '타인을 자신의 삶의 기준처럼 지나치게 의식하는 성격'을 말한다.

리스먼은 타자지향적 인간이 자본주의와 대중 매체 발달기 미국으로부터 전 세계로 확산됐다고 보는데, 한국인처럼 '체면'을 중시하고 '눈치'를 많이 보는 경향이 큰 집단의 경우 정도가 더 심각한 듯하다(최상진 <한국인의 심리학> 참조).

생존 경쟁이 치열해지고 사회 변화가 빨라지며 자신의 행동에 대한 파급 효과가 커진 현대 사회에서 현대인은 불안을 느끼고, 살아남고자 남을 지나치게 의식하며 자율성이 약화됐다는 게 리스먼의 주장이다.

타자지향적 인간들은 타인에게 인정받지 못할 것 같은 감정은 숨기고(응어리뜨리고) 겉으로 친절한 이미지를 가장하는 경향이 있다(특히 자신보다 강한 사람 앞에서). 그러나 응어리진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변형'될 뿐이다.

응어리진 감정은 무대 뒤편(요즘 같은 경우 주로 사이버 공간)에서 수평 폭력으로 전도되며 분출되는데, 자신들의 강력한 보상심리를 사회적 약자들에게 굴절시키는 일베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따라서 일베는 어떤 미래지향적인 이상을 성찰하고 실현하기 위해 모인 '뜨거운 공동체'라기보다, 체제 순응적이고 파편화된 개인끼리 사이버 공간에서 '혐오와 냉소'나 주고받으며 '차갑게 열광'하는 군집이라는 게 김학준의 진단이다.

그는 일베 멘탈이 윤리적으로 옳은지 그른지, 그르다면 그 멘탈을 배태하는 사회 구조를 어떻게 바꿔야할지 방향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배경을 알고 윤리적 실천 방향을 결정하는 것과 안 하고 결정하는 것은 천지 차이다.

사회 구조를 바꾸자고 연대하는 것과 일베 이용자들의 단편적인 선정성만 보고 '일베충'이라 혐오하며 외면하고 마는 게 천지 차이듯 말이다. 박가분과 김학준의 글이 딱 윤리적 판단을 내리기 전까지 사람들의 성찰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하듯 홍기하씨의 <어디에나 있고, 아무데도 없다>도 딱 그 정도의 역할을 하는 작품으로서 가치가 있었다.

'사유의 공간'인 대학 정문에 일베에 대해서 사유하라고 조각상을 설치한 것 역시 참신하다. 하지만 대중은 역설적이게도 '일베'와 다를 바 없는 타자지향성 때문에 작품을 공격했다.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든(사회적 현상이든 뭐든 관심 없고) 당장 혐오스러운 존재인 일베 손가락 때문에 사람들이 학교를(때때로 더 노골적으로는 자신을) 나쁘게 볼까봐'라는 이유에서 말이다.

타자지향성을 넘어서지 못하고 '사회적 현상'에 대한 충분한 성찰과 토론이 부재한 대중은 과연 독일인처럼 '당연하게' 하켄크로이츠를 거부하는 단계로 도약할 자격이 있을까.

"저 일베 조각상을 경찰청 앞에 설치했다면 더 좋았을 텐데"

31일 오전 마포구 홍익대 정문에 인터넷 커뮤니티 '일베' 상징물 조각상이 설치되어 있다. 조각상은 일베를 상징하는 자음 'ㅇ'과 'ㅂ'으로 회원을 인증하는 손가락 형상이다. 이 조각상은 조소과 4학년 홍기하씨가 '환경조각연구' 수업 과제로 제작해 '환경조각연구 야외조각전'(5.31~6.20)에 출품한 것으로 '어디에나 있고, 아무데도 없다'는 제목을 붙였다. 30일 오후 설치된 작품에는 음료수와 달걀을 던진 흔적과 자진철거를 요구하는 항의 메모지도 붙어 있다.
▲ 홍대 정문에 설치된 '일베' 상징물 조각상 31일 오전 마포구 홍익대 정문에 인터넷 커뮤니티 '일베' 상징물 조각상이 설치되어 있다. 조각상은 일베를 상징하는 자음 'ㅇ'과 'ㅂ'으로 회원을 인증하는 손가락 형상이다. 이 조각상은 조소과 4학년 홍기하씨가 '환경조각연구' 수업 과제로 제작해 '환경조각연구 야외조각전'(5.31~6.20)에 출품한 것으로 '어디에나 있고, 아무데도 없다'는 제목을 붙였다. 30일 오후 설치된 작품에는 음료수와 달걀을 던진 흔적과 자진철거를 요구하는 항의 메모지도 붙어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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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장의 범위를 홍익대를 넘어 한국 사회 전반으로 확장시켜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나는 포털 뉴스 댓글 창에서 왜 이 석고 덩어리와 홍익대가 한 데 묶여 '혐오'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법철학자 마사 너스바움은 <혐오와 수치심>에서 '분노'와 '혐오'라는 감정을 구분한다. '분노'는 울분이 향하는 대상이 명확하고 부당함에 대한 인식을 포함하는 도덕적인 감정이며, 울분을 해소하고자 어쨌든 주체는 대상에게 다가가야 한다.

하지만 '혐오'는 주체와 대상을 분리시키는 감정이다. 상대를 나를 더럽힐 것만 벌레처럼 여기며 회피하고 배제하게 만드는 위험한 감정이다. 따라서 분노는 세상을 건강하게 바꾸는 미래지향적인 변화를 이끄는 힘이지만, 혐오는 이를 발목잡는 힘이다.

'일베충'이라는 말이 시사하듯 한국 사회에서 일베는 '사회적 현상'으로 인식되지 못하고, 주로 '혐오'의 대상으로 취급됐다. 문제 해결은 계속 지연되고 혐오만 재생산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사람들은 '우리 안에 일베'를 용기있게 직시하지 못한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우리 안에 일베'의 생명력을 유지시키고 있다. 지난 17일 '강남 여성 선택 살해' 사건이 일어났을 때, 많은 사람들이 조현병 환자에 의한 '묻지마 살인'으로 보려 했지만 일각에서는 조현병도 '사회적 맥락'이 있으며 따라서 '여성혐오'로 볼 수도 있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이런 주장은 묵살됐으며 사건은 또다시 '개인일탈'로 처리됐다.

그래서 묘하게 겹치는 두 사건을 떠올리면서, 개인적으로 "저 일베 조각상을 차라리 경찰청 앞에 설치했다면 더 적절했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야 사람들이 '잠재적 가해자'라는 사회적 개념에 대해 생각이란 걸 해볼 기회가 있을 테니까.

"깃대가 바람에 휘날리며 펄럭거리는 소리를 듣고 한 수행승이 "깃대가 흔들리고 있다"고 했다. 그러자 또 다른 수행승이 "아니지, 바람이 흔들리는 거지"라고 반박했다. 두 수행승의 승강이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혜능이 말하였다. 바람이 흔들리는 것도, 깃대가 흔들리는 것도 아니다. 당신들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다." 혜능 <육조단경> 중.

'일베적 멘탈리티' 관련 기사들
① [역사] 2010년 이미 예견된 일베의 탄생
② [사고구조] 이제 국가 앞에 당당히 선 '일베의 청년들'
③ [전술] 그들을 세금 도둑으로 만드는 완벽한 방법
④ [여성혐오] 여자를 혐오한 남자들의 '탄생'
⑤ [대인불신] 요즘 일베의 주요 떡밥은 '찐따'
⑥ [자기계발론] 헬조선에 태어나 노오오오오오력이 필요해
⑦ [보상심리] 시민들 박수 받은 '일베 집회', 왜 엉뚱하게 튀었나


태그:#일베, #조각상, #일베적 멘탈리티, #사회 현상, #직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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